게임스컴에 앞서 진행되는 개발자들을 위한 컨퍼런스 행사 ‘데브컴(Devcom)’이 독일 현지 시각으로 19일 시작됐다. 데브컴의 개시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첫 강연은 슈퍼이블메가코프의 '켈시 비첨(Kelsey Beachum)' 선임 작가의 키노트 강연으로 꾸며졌다.

켈시 비첨은 미스터리 우주 어드벤처 게임 '아우터 와일즈(Outer Wilds)'의 작가이자 내러티브 디자이너다. 아우터 와일즈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게임 시상식 중 하나인 BAFTA에서 최우수 게임, 게임디자인, 독창성 부문에서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으며, 게임 속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게임이다.

이날 켈시 비첨의 오프닝 키노트 강연은 '더 나은 스토리 완성을 위한 사례: 이야기를 '포장지'라고 부르는 것을 멈춰주길 간청합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많은 이들이 게임 속 스토리를 '놀라운 플레이어 경험을 만들어주는 강력한 도구'라고 평가하지만, 대부분의 개발자가 게임 속 스토리를 만들 때 평범한 대화와 컷신으로만 채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발표는 게임 속 스토리가 단순히 '포장지'의 개념을 넘어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인 사례들을 조명하고, 어떻게 스토리가 게임의 각 분야에 연결되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매력적인 순간으로 이어지게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 슈퍼이블메가코프 '켈시 비첨(Kelsey Beachum)' 선임 작가

켈시 비첨 작가는 강연에 앞서 많은 개발자들이 더 좋은 게임 스토리를 쓰는 것을 돕고 싶고, 이를 통해 더 좋은 스토리를 가진 게임이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첫 번째로 소개한 개념은 '스토리 포장지(Story Wrapper)'다. 포장지는 물건 자체가 아닌 단순한 포장으로, 포장을 벗기면 쓸모가 없어져서 버리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스토리 포장지' 역시 게임 본편과 분리되어 있고, 스토리를 읽거나 볼 때는 플레이가 멈춰있는 것이 특징이다. 켈시 작가는 대표적인 사례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예를 소개했다.

그는 보통 예시로 슈퍼마리오를 이야기하면 '너무 오래된 게임이라 그런거 아니냐'라는 반문을 듣고는 하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AAA급 블록버스터 게임들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특한 스크린 모드와 화려한 컷신을 분리해두어서 스토리가 진행될 때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식이다. 이때 소개된 예시는 언차티드, 킹덤하츠 시리즈 등이다.

▲ 게임과 스토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경우를 '스토리 포장지'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스토리 포장지'가 왜 나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는 포장지 역시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지만, 언제나 폐기될 수 있다는 점을 첫 번째 이유로 소개했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도 결국엔 이야기보다 게임성이 중요하다고 한다든지, 이야기는 나중에 추가해도 된다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스토리가 게임을 구축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역할을 하는 도구이며, 게임의 기본적인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게임 진행의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게임의 핵심 판타지를 연결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게임의 분위기와 톤을 만들고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고, 플레이어에게 어떤 게임 플레이가 요청되고 있는지 맥락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경우에 이야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한 기회의 제한이다. 실제로 게임에서 스토리가 포장지처럼 사용되면, 전체 게임 플레이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순간이 크게 제한된다. 게임 플레이 사이사이의 작은 컷신에서 스토리가 진행될 수 밖에 없는데, 이러면 게임 플레이가 유연성을 잃게 되어 매번 흐름이 끊기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켈시 작가는 복잡한 구성의 스토리를 몇몇 순간에 압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을 더 어렵게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게임 플레이 사이의 컷신은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충분치 않다

세 번째 이유는 이야기 전달을 위한 도구를 사용할 때 걸리게 되는 제한이다. 그는 게임에서 이야기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 툴로는 컷신과 대화(dialogue), 해설(Voice-over), 조사할 수 있는 서류, 환경 요소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오브젝트, 아트, UI 텍스트와 이미지, NPC, VFX, 애니메이션과 음악 등 정말 다양한 방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게임 플레이와 레벨 디자인까지 내러티브 툴로 활용할 수 있다. 켈시는 '에디스 핀치의 유산', '완다와 거상', '레지던트 이블4', '저니'에 반영된 훌륭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게임 플레이와 디자인을 내러티브 툴로 활용할 경우 플레이어에게 매우 독특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으나, 이야기가 포장지로 쓰일 경우엔 이렇게 많은 도구 중 오직 '컷신'과 '대화'만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정말로 다양한 내러티브 툴이 존재하지만, 이야기가 포장지로 쓰일 경우 크게 제한이 걸린다

이렇게 한정된 툴만 활용하여 게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려다 보면, 최악의 경우 '인포 덤프(INFO DUMPS, 한꺼번에 주어지는 배경 정보)'가 발생하게 된다. 켈시는 이때의 예시로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속 부엉이 케포라 게보라를 예로 들었다. 플레이어가 드넓은 하이랄 필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모험을 시작하려고 할 때, 플레이어의 앞을 가로막고 꼭 필요하지 않은 여러 정보를 주입식으로 쏟아내는 부엉이의 존재가 매우 성가시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는 인포 덤프가 이야기나 정보를 전달할 때 아무런 효과도 갖지 못하고 플레이어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더 나쁜 플레이 경험을 만들고, 나아가 이야기가 게임에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주입식으로 쏟아내어지는 대량의 정보는 스토리는 물론, 게임 플레이 전체의 흥미를 떨어트릴 수 있다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 포장지'가 게임과 완전히 나뉘어서 구분된다면,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지게 되는 환상 및 플레이어 경험의 통일성이 무너지게 된다. 켈시 작가는 게임 전반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각 현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게임 콘텐츠와 내러티브를 억지로 꿰매 잇는 일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게임의 메인 스토리는 세계를 구축하고 주요 캐릭터를 소개하는 과정보다 '왜 플레이어가 이러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정당성을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다소 기형적인 모습이 되어버린다. 켈시는 플레이어가 엘리트 드라이버가 되는 게임에서 멋지게 운전하고 경찰을 따돌리고 질주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게임 플레이가 '포인트를 더 많이 얻기 위해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라며, 가능하다면 플레이어 스토리와 내러티브 스토리가 같은 목표로 정렬되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 플레이어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목표가 정렬되는 편이 몰입하기 좋다

이외에도 스토리 포장지는 상품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게임 제작 과정에서 불필요한 마찰이나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스케줄링과 생산에 문제를 일으켜 파이프라인이 통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 게임 개발자들은 점점 스토리를 뒷전으로 미루게 된다.

그렇다면 더 나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선 어떤 형태의 디자인이 필요할까? 켈시 작가는 스토리 개발자들이 숙지하면 좋을 몇 가지 연습 과정들을 소개했다. 첫 번째는 '컷신 줄이기'다. 플레이어를 서사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 컷신을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컷신 줄이기와 함께 시도하면 좋은 방법으로 '다이얼로그 길이 줄이기', '주요 게임 플레이와 주요 스토리 흐름 정렬하기', '플레이어가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구성하기', 다른 부서의 업무와 최대한 연결되도록 계획하기'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켈시 작가는 해당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항상 자문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야기의 맥락이 오로지 서사로만 분류되지 않도록 하고, 내가 생각하는 스토리만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게임 개발 과정이 '팀 업무'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문서화하여 다른 개발자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줄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바로 다음날 버스에 치여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개발 과정에 차질이 없도록 말이다.


게임 개발팀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그는 가능한 이른 시점에 스토리 작가를 팀에 합류시켜야 한다며, 만약 다이얼로그가 필요한 시점에 작가를 고용하면 그건 너무 늦은 시점이고, 결국 내러티브를 기워 맞추는 수술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끝으로 켈시 작가는 여러 정황상 어쩔 수 없이 '스토리 포장지'를 써야만 하는 상황에 참고해야 하는 몇 가지 사항들도 소개했다. 그는 만약 스토리와 게임 플레이를 통합할 계획이 없다면, '처음부터 스토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게임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라'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유형의 게임에선 진행을 주도하기 위해 스토리에 의존할 수 없으며, 좋은 스토리를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젊은 작가들과 개발자들을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딱 하나 이번 강연 중 청중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나머지 게임들과 분리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이야기와 게임 모두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자신의 발표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