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도 생존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존'이 들어간 게임 중 진득하게 한 건 '뱀파이어 서바이버'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공포 게임도 그닥 좋아하지 않고, 소울라이크도 딱히 즐기지 않는다. 나와 같은 게이머가 적지 않다. 필요 이상의 긴장을 원하지 않는 부류. 마음 편한 게임을 선호하는 입장에서, 지난 몇 년 간 이어진 생존 게임과 소울라이크의 흥행은 퍽 지루하게 느껴졌다.

'브이 라이징'을 처음 알게 된 것이 2년 전이었음에도, 그냥 지나친 이유다. 얼리 액세스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지만, 크래프팅 생존이라는 장르가 생각보다 높은 장벽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조용히 갈 길 가시라 말씀드렸건만, 이상할 정도로 주변의 간증이 이어졌다. 그간 눈이 멀어 갓겜을 앞에 두고도 몰라봤다는 말부터 게임을 하고 나니 살이 빠졌다느니, 미나리가 피를 맑게 해 준다고 어머니가 말했다는 등 이쯤 되니 궁금해서라도 한 번 만져야지 싶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 이뤄진 정식 출시. 한 번 찍먹이나 해보려고 손가락을 담갔는데, 아뿔싸 너무 깊게 담갔다. 생각보다 깊이가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맛있다.

게임명: 브이 라이징(V Rising)
장르명: 생존, 액션 RPG
출시일: 2024.5.8
리뷰판: 출시 빌드(1.0)
개발사: 스턴락 스튜디오
서비스: 스턴락 스튜디오
플랫폼: PC
플레이: PC


흡혈귀는 세상이 쉽다

'브이 라이징'에서 V의 의미는 명료하다.

'뱀파이어'

대부분의 생존 게임이 웬 무인도에 표류한 불쌍한 청년이나, 얼떨결에 전장에 맨몸으로 떨어진 유사 군인이라는 설정을 가져가는 것과 달리, 브이 라이징은 근본적이면서도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컨셉을 지녔다. 주인공이 뱀파이어라는 것. 그냥 컨셉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이 설정 하나가 브이 라이징이 다른 생존 게임들과 무척 다름에도 설득력을 주는 장치가 되었다.

▲ 이상할 정도로 목이 긴 이 친구가 이 게임의 주인공

먼저, 음식 시스템이 없다. 게임 내에서 섭취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혈액 뿐이며, 혈액의 등급과 종류에 따라 제각각 다른 버프를 받을 뿐, 혈액 외 다른 걸 먹을 필요는 없다. 흡혈귀니까! 오히려, 음식을 피해 다녀야 한다. 이를테면, 마늘 같은 것 말이다.

▲ 그렇다고 아무거나 주워먹으면 안 된다. 이왕이면 몸에 좋은 거 먹어야지

타 생존 게임에서는 그저 감사한 햇빛도 브이 라이징에서는 열심히 피해 다녀야 한다. 햇빛에 노출되면 사망까지 정확히 5초가 필요하다. 흡혈귀니까! 다른 생존 게임은 밤이 두려운 게 정상이지만, 이 게임은 낮이 무섭다. 나무나 절벽 그늘 사이로 이동하면 어찌어찌 낮에도 다닐 수야 있지만, 전통적인 밤과 낮의 개념이 뒤집혀 있는 건 사실이다.

▲ 햇빛 알러지가 이렇게 무섭다 끼엑!

여기까지는 그저 재미있는 설정 놀음이지만, 조금 깊이 파고들면 다소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브이 라이징'은 다른 생존 게임에 비해 굉장히 쉬우며, 동시에 명료하다. 다른 생존 게임을 상상해보자. 대부분 팬티 한 장 입고 무인도 해변가에 떨어지는데, 게임을 처음 하는 게이머는 이 때부터 뭔가 막막해진다. '뭘 해야 하지?'

재료를 채집해서 도구와 장비를 만들고, 사냥과 채광, 벌목 등을 통해 원자재를 모아 나만의 작고 귀여운 쉼터를 만든 후 영역을 늘려나가는 게임의 기본 개념 정도야 알지만, 실제로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다. 게이머 또한 게임 속 주인공처럼 무인도에 갓 떨어진 정도의 지식만 갖고 시작하게 되니까.

하지만, '브이 라이징'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게임 속 주인공은 이미 한참 전부터 살아온 고인물 흡혈귀고, 본인이 뭘 해야 할 지 잘 안다. 알람이 울리면 직장인들이 척수 반사로 몸을 일으키고, 홀린 듯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그냥 자다 일어났을 뿐이다.

▲ 게임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뭘 해야 좋은지 다 알려 준다. 이것이 흡혈귀의 일상 루틴

쓸모없이 복잡한 데다, 허기니 갈증이니 신경 써야 할 음식 시스템도 없으며, 지금 장비로 적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고, 길도 안 닿는 나대지에 어설프게 건물을 세우게 되는 다른 게임과 달리 집을 지을 수 있는 주거 목적의 부동산 용지 또한 시스템이 명백하게 알려준다. 뜬금없이 무인도에 떨어져 21세기 원시인이 되어버린 다른 게임과 달리 브이 라이징의 주인공은 기품 있고 경험 많은 밤의 귀족이니까.

결과적으로, 다른 게임에 비하면 굳이 '생존'이라는 키워드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긴장의 선이 낮다. 크래프팅과 하우징이 가능한 오픈 월드 액션 RPG인데, 세션제 멀티플레이를 곁들인 느낌 정도일까? 달리 말하면, 과한 긴장을 꺼려하는 게이머들도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다. 지인들이 같이 하자고 꼬셔도 손사래치며 "쉽지 않음"을 읊던 내가 먼저 "피 한 모금 하지 않을래?"라고 먼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그냥 크래프팅이 되는 쿼터뷰 액션 RPG 정도의 긴장감


세상은 쉬운데 싸움이 쉽지 않다

물론, 마냥 쉬운 게임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브이 라이징의 환경적 생존 난이도는 매우 쉽다. 게임을 한 두 시간만 만져도 '해선 안될 짓'을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생존 게임에서 죽기 직전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이래도 될까?'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만만한 수준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난이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 바로 '전투'다. 단순히 '어렵다'의 개념이 아니다. 전투 난이도는 게이머의 반사 신경과 판단력에 따라 달라지기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게임 전체를 볼 때 긴장을 만드는 요소가 전투라는 뜻이다.

▲ 파밍과 제작 단계에서 딱히 긴장할 건 없다

전투는 크게 다수의 일반 몬스터와 치러지는 전투, 그리고 보스전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긴장감 있는 전투'는 보스전이다. 이를 말하기 전, '브이 라이징'의 콘텐츠 순환 구조를 먼저 말하고 넘어가야 한다.

브이 라이징의 콘텐츠 구조는 매우 뚜렷하다. 위에서 보여준 뱀파이어의 기상 후 기본 루틴을 수행하다 보면 가끔 탁 막힐 때가 있는데, 바로 이 때가 보스를 잡으러 나서야 할 때다. 가령 성채 티어를 올릴 때가 되면 생가죽을 가죽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거나 하는 식으로 레시피가 없는 제작을 요구하는데, 이때 필요한 레시피나 새로운 주문, 연구용 재료 등을 대부분 보스들이 가지고 있다.

▲ 하지만 게임이 막히면 보스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때문에, 브이 라이징의 콘텐츠 구조는 파밍 - 제작 - 보스 사냥 - 파밍의 구조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모습을 띄게 된다. 보스가 일종의 마일스톤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보스를 찾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 V 블러드 창에서 잡아야 할 보스를 찍고, 추적만 켜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고인물 흡혈귀인 주인공은 피냄새를 맡고 방향을 특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나는 보스들은 결코 쉽지 않다. '흡혈귀 생활 할 만 하군?'하고 느슨해진 흡혈귀씬에 긴장감을 주는 이 녀석들은 맵 전역에 50종이 넘게 존재하며, 각각 다른 공격 패턴과 기믹을 지니고 있다. 고난이도로 올라가면 로스트아크 레이드가 생각날 정도로 장판을 깔며 게이머를 괴롭힌다.

▲ 의자에 기대서 게임하다 갑자기 허리 꼿꼿이 펴게 만드는 녀석들

▲ 후반부로 갈수록 흉악한 녀석들이 많아진다

이 녀석들이 게임에 긴장감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보스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점도 한 몫을 한다. 특정 구역을 지키고 있는 보스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몇몇 보스들은 맵을 돌아다니며 운 없는 아기 흡혈귀들에게 시비를 거는데, 그냥 길 가다 만나면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면 되지만 다른 보스를 잡는 와중 걸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브이 라이징은 모든 적대 개체가 게이머만을 적대하는 시스템이 아니며, 각 적의 유형에 따라 서로 죽을때까지 싸우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다 범위 공격기가 다른 적대 개체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잘만 활용하면 전투를 유리하게 풀어나갈 수도 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험상궂은 손님처럼 싸움에 끼어드는 보스는 뒷목을 잡게 만든다.

▲ 진짜 제발 이러지 마세요

▲ 전 아직 선생님 만나기 싫다고요...


흡혈귀는 오래 산다

브이 라이징을 정리하면 이렇다. 재료를 파밍해 캠프와 새로운 장비를 만들고, 더 만들게 없어지면 보스를 두들겨 패서 새로운 제작법을 익힌 후 다시 재료를 파밍해 캠프를 요새로 만들고, 또 만들게 없어지면 또 다른 보스를 쥐어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과정의 연속이다.

▲ '생존'게임이라기엔 편의성이 과하게 좋은 편

물론,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즐길 거리들이 존재한다. 신선도 높은 적을 생포해 피주머니로 만든다거나, 텃밭을 꾸려 농경 흡혈귀의 삶을 즐긴다거나, 크게 쓸모는 없지만 압도적으로 멋있는 고딕풍 성채를 꾸미고 음산하게 붉은 조명을 깔아 '흡혈귀다움'을 뽐낼 수도 있다.

멀티 플레이 세션에서는 이보다 더 할 것들이 많아진다. 4명까지 묶일 수 있는 '클랜' 소속 뱀파이어들과 함께 사냥을 간다거나, 다른 뱀파이어 클랜과 투닥거리고 상대 성채를 박살낸다거나, 오래 접속하지 않은 흡혈귀의 성채 자리를 기웃거리며 부동산 용도변경 시기를 노려볼 수도 있다. 나만 해도 실제 리뷰를 위한 플레이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 솔로 세션으로 플레이했지만, 온라인 세션은 명백히 더 재미있었다. 선배 흡혈귀들이 노른자위 땅에 죄다 알박기를 해 놔서 시골에 집을 마련해야 했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 역시 뱀파이어라면 이 감성이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며 '이제 자리를 잡았다'라고 느끼기까지 최소 수십 시간이 걸린다. 얼리 액세스 이후 꾸준한 수평적 콘텐츠 확장이 이뤄졌기에 출시 빌드 기준으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 모든 콘텐츠가 결국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는 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새로운 제작법과 장비들을 해금하고, 색다른 보스들을 상대하는 과정은 분명 즐겁지만, 게이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라운 무언가는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수작을 넘어 명작으로 갈 만한 포인트가 짚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 일정 수준에 이르면 '노가다 겜이었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게임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브이 라이징은 뚜렷한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임이 아니다. 보다 하드코어한 생존 게임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느긋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취향의 문제이기에 단점이라 하기 어려우며, 콘텐츠 구조가 단조롭다는 점 또한 최정상급 게임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뜻일 뿐, 브이 라이징이라는 게임이 지향하는 수준은 충분히 보여준다.

뱀파이어는 오래 산다. 세상 어느 미디어를 봐도 요절하는 뱀파이어나 노환으로 사망하는 뱀파이어는 없다.

이 게임도 비슷하게 오래 갈 것 같다. 손끝에 찍어 맛이나 보려다 고무장갑 면적만큼 담가 버렸다. 믿을 수 없는 반전의 서사시와 놀란 감독이 놀랄 연출, 언리얼 엔진 쇼케이스에 낼 만한 고퀄리티의 그래픽 중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게임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충실하게 갖췄다. 경험 상, 이런 게임이 오래 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