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메타픽션 스토리, 그 뒤에 묻혀버린 웰메이드 카드 게임
여기 따끈따끈한 신작 카드 게임이 있다. 대전 중 상대에게 가하는 피해를 '이빨'로 계산해 저울에 무게를 재고, 어느 한 쪽의 저울이 바닥에 닿게 되면 승부가 가려지는 데스 게임. 패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멀쩡한 생니는 물론, 나아가 눈알까지 뽑아 승부를 이어나가는 잔혹한 모습에 난 한눈에 반해버렸다.
"바로 이거다" 싶은 게임이었다. 덱빌딩 방식의 카드 게임 장르를 원체 좋아하는 나로선, 공포 요소까지 섞여 으스스한 분위기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스팀 신작 카드 게임, '인스크립션(Inscryption)'이 그토록 달콤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임의 정식 출시 일정을 손꼽아 기다렸고, 스팀을 통해 게임이 출시되자마자 플레이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처절한 데스 게임은 어디로 갔지?
게임명 : Inscryption | 개발사 : Daniel Mullins Ga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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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링크: 'Inscryption' 오픈크리틱 페이지
강렬한 첫인상, 매력적인 룰의 덱 빌딩 카드 게임
출시 전, 데모 버전과 트레일러를 통해 소개된 인스크립션의 가장 큰 매력은 '공포' 요소가 섞인 덱 빌딩 카드 게임에 있었다. 마치 아동용 게임같은 순진무구한 탈을 쓰고 접근한 뒤 무고한 게이머들에게 섬뜩한 공포를 선사했던 '포니 아일랜드(Pony Island)' 개발사의 신작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게임을 처음 켠 플레이어는 '새게임' 대신 이어하기 버튼을 눌러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플레이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둠 속 눈동자의 지시에 따라 섬뜩한 보드 게임을 강요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플레이어의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카드 게임, '인스크립션'이다.
제물을 바쳐 상위 포식자를 필드에 소환하고, 소환 후 남게 되는 뼈까지 자원으로 활용하는 인스크립션의 규칙은 매력적이고 독창적이며, 음습하고 어두운 게임 초반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린다. 게임에는 배틀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10개 이상의 아이템, 그리고 40종 이상의 독특한 카드 능력이 함께 등장한다. 오직 이 게임을 위한, '인스크립션'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한 셈이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접하기엔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 걱정될 수 있지만,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로그라이크 방식을 채용한 덱 빌딩 게임들이 응당 그렇듯,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있다. 게임이 어렵게 느껴질 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의 NPC 카드도 있으며, 이외에도 게임 내 모든 규칙을 소개하는 '룰북'도 언제든 쉽게 펴볼 수 있다.
인스크립션의 두 번째 특징은 카드 게임과 '방 탈출 퍼즐'의 결합에 있다. 플레이어가 카드 게임을 진행하는 것은 이따금 번개가 내리치는 외딴 오두막으로, 방 안에는 다양한 퍼즐 장치들이 존재한다. 카드 게임을 통해 실마리를 얻고, 얻은 단서를 모아 오두막에 있는 퍼즐을 해결하면 카드 덱을 더욱 강력하게 보강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을 수집할 수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게임 플레이에 '덱 빌딩 카드 게임 + 방 탈출 퍼즐'의 순환 구조를 추가해 활력을 불어넣은 셈이다.
몇 번의 재도전과 퍼즐 풀이로 나만의 덱을 키우고, 플레이어의 앞길을 가로막는 보스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리다보면, 촛불이 꽂힌 케이크와 함께 화면이 암전되고, 게임은 재부팅된다. 플레이어는 지금까지의 카드 게임 플레이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으며, 게임 '인스크립션'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진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실제로 '오두막' 페이즈 이후로 게임은 크게 변화한다. 좋은 의미로도,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말이다.
영화처럼 밝혀나가는 미지의 카드 게임 '인스크립션' 속 숨겨진 비밀
초반 카드 게임 페이즈 이후 '인스크립션'은 게임 속의 게임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메타픽션 방식으로 노선을 바꿔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인스크립션'이라는 베일에 싸인 미지의 게임 카피를 획득하게 된 플레이어 중 한 명일 뿐이며, 이 게임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는 식이다. 페이크 다큐 형식의 공포 영화를 즐겨보는 이들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개발사가 이전 '포니 아일랜드'를 통해 보여주었던 방식과 유사하다.
오두막 페이즈 이후의 전개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크게 나뉘게 된다고 소개한 이유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에 기대하는 포인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게임의 경험이 크게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개발사의 전작인 '포니 아일랜드'나 '더 헥스'를 플레이했고, 이야기의 주제를 따라가는 스토리 중심의 플레이를 기대하는 이들의 시점으로 게임을 바라보자.
인스크립션에서 게임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은 어떤 특정 방식에 그치지 않고, 여러 기믹의 조합을 통해 다채롭게 진행된다. 카드 게임에서 사용되는 자원이나 규칙 또한 더 다양해지며, 게임보이 버전 '포켓몬스터' 스타일부터 고전 RPG, 체스 게임, 나아가 '유희왕'의 듀얼을 연상케 하는 게임 플레이까지 다양한 변화구가 등장한다. 인스크립션이라는 커다란 틀은 유지하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비주얼로 질릴 틈을 주지 않는 식이다.
각 게임 페이즈를 넘길 때마다 출력되는 '루크 카더의 영상 기록'은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전개와 긴장감이 압권이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함께 엿보고 있는 듯한 방식으로 몰입감을 더해주고, 이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계속 이어나가게끔 하는 궁금증 유발 장치로서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끔 등장하여 섬뜩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화면 노이즈부터 모니터 밖의 플레이어에게 말을 거는 NPC, 게임 플레이에 실제 플레이어의 PC 데이터가 활용되는 연출 등, 일반적인 게임 속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다양한 메타픽션 연출이 플레이어의 흥미를 돋운다. 보통의 카드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연출이 차례차례 등장하고 여기에 흥미로운 스토리까지 함께 곁들여지니, 플레이어에게 있어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풍성하게 느껴지는 게임이 된 셈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긴장감 있고 으스스한 덱 빌딩 카드 게임인데..."
이번엔 반대의 시선으로 보자. 인스크립션의 초반 오두막 파트 이후의 전개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은 이 게임에서 온전한 '덱 빌딩 카드 게임'을 기대한 이들이다. 게임 자체의 본질이 카드 게임이지만, 카드 게임을 기대하고 게임을 구매한 이들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실상 인스크립션에서 '자신의 덱'을 '빌딩'하는 행위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정성껏 만든 카드 덱은 스토리의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효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두막 파트에서 몇 차례의 죽음을 반복하며 계속 새로운 덱을 만들고, 나만의 덱을 완성하여 보스를 처치하기까지의 여정을 즐겁게 플레이했다면, 완전히 새로운 덱으로 진행되는 두 번째 파트에서의 상실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오두막 파트 이후에도 전반적인 게임 진행은 모두 카드 게임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여기에는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 초반엔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룰이 덱 빌딩과 카드 배틀의 재미를 끌어올려주는데, 이후 파트에서 만나는 적들은 "더 강한 덱을 만들어오라"는 말 뿐, 별다른 패널티 없이 그 상황 그대로 계속 게임을 이어가게 해준다.
이러다보니 이때부턴 덱 구성에 대해 고민을 할 것도 없이, 초반 멀리건이 잘 잡혀서 운이 좋으면 이기고, 운이 안 좋았다면 운이 좋을 때까지 전투를 계속 반복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게임의 본질이었던 덱 빌딩과 카드 게임 전투가 단순히 스토리 진행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카드 게임 파트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개발사의 홍보 방식도 한몫했다. 개발사는 게임 속 스토리를 다루는 후반부와 반전 요소를 감추기 위해 출시 전에 배포한 데모와 트레일러에서는 '오두막' 페이즈만을 중점적으로 노출시켰고, 카드 게임 팬들은 으스스한 공포 분위기가 매력적인 카드 게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오두막 파트가 그러한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었기에 거짓말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펴놓고 보니 그 이상이 없어 '과대광고가 아니었나'라며 망연자실하게 된 이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도 인스크립션의 카드 게임 파트에 매료된 카드 게이머들은 메인 스토리 이후에도 카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무한 모드 등의 별도 모드가 출시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처럼 게임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기대하게 되는 포인트가 달라질 수 있지만, '인스크립션'의 개발사인 Daniel Mullins Games는 전작인 '포니 아일랜드', 그리고 '헥사'가 그러했듯, 플레이어들이 인스크립션의 독특한 스토리와 연출에 집중해주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인스크립션의 출시와 함께 선보인 '비기너즈 덱', 그러니까 초심자 세트에 두 개의 전작을 포함시켜 둔 것을 통해서도 그들의 의중을 짐작해볼 수 있다.
결론만 두고 보자면, 개발사의 계획은 '성공'쪽에 가까운 결과를 거둬냈다. 깊이 있는 카드 게임을 기대했던 몇몇 유저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이들 또한 인스크립션이 보여준 독특하고 차별화되는 연출에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는 출시 하루 만에 약 1,800건에 달하는 리뷰와 함께 '압도적으로 긍정적'을 달성한 인스크립션의 스팀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스크립션은 '슬레이 더 스파이어'로 대표되는 여타 덱 빌딩 카드 게임처럼 수십 시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1회차 플레이에서 대부분의 요소를 즐길 수 있고, 남아있는 도전과제를 마저 찾아내는 2회차를 플레이하면, 게임 속에 준비된 모든 콘텐츠를 다 즐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인스크립션'은 2021년의 막바지에 등장한, 충분히 플레이할만한 가치가 있는 실험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인디 게임이라는 점이다. 2만 원 초반대 가격에 10시간가량의 플레이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는 알찬 게임이니, '공포와 덱 빌딩, 방 탈출'이라는 키워드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면, 스팀을 통해 무료로 배포되고 있는 데모를 시작으로 인스크립션의 세계에 참여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