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중요성, 그리고 담배 한 모금
가끔 복잡한 컨트롤 없이 스토리를 즐기고, 머리를 쓰는 게임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시기에는 게임을 하더라도 소설책을 읽듯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지곤 하죠. 이럴 때 저는 스팀을 켜고 게임 검색 태그를 '드라마', 혹은 '풍부한 스토리' 에 맞춰놓고 신작을 찾아보곤 합니다. 꽤 그럴듯해 보이는 게임이 여럿 등장하지만, 대부분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지만요.
그러던 중 한국어 인터페이스와 자막을 지원하면서도, 유저 평점도 '매우 긍정적'을 기록 중인 따끈따끈한 신작 어드벤처 게임을 발견했습니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연상케 하는 미래적인 분위기,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고전적인 트렌치 코트를 갖춰 입은 탐정이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메인 일러스트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게임의 타이틀은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입니다
게임명 :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 | 개발사 : DigiTales Interact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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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링크: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 오픈크리틱 페이지
느와르와 SF를 더한, 잘 만들어진 텍스트 기반 어드벤처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이하 라쿠나)'는 과거 업무 중에 발생했던 사고 트라우마로 인해 자동차 타기를 꺼리게 된 CDI 수사관 닐 콘래드의 이야기를 다룬 느와르 어드벤처입니다. 플레이어는 가족보다 일을 중시하며 어딘가 결핍된 삶을 살고 있는 수사관 닐을 조작하여 여러 사건과 만나고, 이면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제목에 'SF'가 당당히 표기되어 있지만, 게임 속에 SF 요소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사고 현장을 조사할 때도 지문이나 용의자의 흔적을 순식간에 특정해내는 식의 미래 기술을 활용하기보다, 사건 현장의 정황이나 관계자들의 진술을 듣고 단서를 찾아내는 경우가 더 많죠. 그야말로 전통적인 방식인만큼 추리에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게임의 '공상과학' 부분에 이끌려 선택한 유저들에게는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이동할 때 자동차 대신 항상 지하철을 애용하는 주인공의 행보를 따라가다보면, 사이버펑크 분위기가 물씬 나는 도시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가득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인공, 그 뒤로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이 주는 분위기 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첫 인상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라쿠나는 대부분의 어드벤처 게임들이 보여주는 몇 가지 '공식'을 벗어나, 플레이어에게 유연한 플레이 감각을 선사합니다. 포인트 앤 클릭 스타일로 단서를 특정해내는 방식 대신, 조작키로 캐릭터를 움직이고, '달리기'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게임 진행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텍스트 기반의 스토리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진행이나 단서 확보를 위한 조사 과정에 하나의 늘어짐도 없이 빠르게 진행할 수 있어 게임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텍스트 기반 어드벤처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스토리겠지요. 라쿠나는 플레이어에게 다수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유저가 직접 만드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끔 하고 있습니다.
챕터를 진행할 때마다 무조건 하나 이상의 선택지가 등장하고, 이는 의미 없이 NPC의 대답만 조금씩 바뀌는 가벼운 질문들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과 가족, 헌신과 배신 등 플레이어의 도덕적 가치를 저울질하는 내용의 무거운 질문들이 주를 이루죠. 매 차례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게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스토리 안에서, 그리고 엔딩에서 플레이어가 몸소 실감할 수 있게 합니다.
스토리 중심 게임이라고 기대하게 만들고는 "A는 당신이 한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문구 하나로 퉁쳐버리는 방식에 아쉬움을 느꼈다면, 본인의 선택이 게임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라쿠나의 스토리 전개 방식이 흥미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담배 한 모금만큼 간절해지는 분기별 저장, 스킵 기능
인생에 한 번씩 찾아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있도록 '저장'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인생에는 저장 기능도, 불러오기 기능도 없죠.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며 대리만족할 수 있는 선택지형 게임이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아온 것일 테고요.
라쿠나는 실제 우리내 인생이 그러하듯, 분기별 저장 기능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치인 것으로 해석됩니다. 게임 초반부터 이러한 부분을 안내하는 내용을 표시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것이 개발자의 의도인 것은 분명하나, 게임 속에 준비된 모든 콘텐츠를 빠짐없이 맛보고 싶은 플레이어로서는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분기별로 다른 선택지, 혹은 수사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가 궁금하다면 '다회차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데요. 1회차를 완료한 후에 다시 게임을 시작해도 스토리 연출이나 튜토리얼 기능을 스킵할 수 없습니다. 또 아름다운 픽셀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컷씬, 선택지에 따라 볼 수 있는 엔딩의 종류도 여럿이지만, 나중에 이를 돌아볼 수 있는 '갤러리', 혹은 이를 수집했음을 증명하는 '도전 과제' 역시 일절 제공되지 않고 있죠. 스토리에 등장하는 단서 찾기나 수수께끼도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2회차를 시작하기까지의 허들이 너무 높게 느껴지는 편입니다.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는 재미있는 느와르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게임을 구매한 가격이 출시 할인을 포함하여 약 14,000원 정도였으니, 팝콘 없이 주말 극장가의 황금 시간대에 홀로 영화를 본 셈 치면 딱 계산이 맞아떨어집니다. 시도하기 어려운 2회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약 3시간 이상의 플레이 타임이 보장되니, 장편 영화보다는 조금 더 긴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라쿠나는 복잡한 컨트롤이나 조작에 대한 걱정 없이, 그저 담담하게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연출이나 자극적인 액션보다 게임의 '스토리'에 가치를 두는 플레이어라면, 라쿠나의 스토리에서 특별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과거의 뉴스나 이메일 등의 텍스트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주가 되므로, 장문의 텍스트를 읽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구매 전에 다시 한번 재고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해지는 비 내리는 날에 플레이하기 좋은 어드벤처 게임, '라쿠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