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염소 두 마리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야훼께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자젤에게 보내야 한다.
아론은 야훼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리고
아자젤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야훼 앞에 세워두었다가
속죄제물로 삼아 빈들에 있는 아자젤에게 보내야 한다.
레위기 16장 8-10절
'안나 푸에르테'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깊고 맑은 눈은 보호본능을 불러왔고, 반대로 짙은 눈썹은 곧게 뻗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귀족적 매력을 지닌 여성들이 으레 그렇듯 군더더기 없는 몸과 큰 키를 지니고 있었으며, 늘 미소를 띄운 입술로 나긋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단 하나, 그녀에게 흠결이 있다면 그녀가 코요테 벨리의 악마숭배자 집단인 '아자젤의 감시자'를 이끄는 리더이며, 최근 몇 달 간 그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 본 기획은 실제 플레이를 기반으로 단편 소설 형태로 가공되었습니다.
게임명: 디바우어(Devour) | 개발 : Joe Fender, Luke Fann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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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숭배자
샘(Sam)은 다시 한 번 뛰는 심장 위를 짚었다. 동시에 이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속으로 한 번 더 욕설을 뱉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이 없었다. '안나'가 잠적한 이후 몇 달 간, '아자젤의 감시자'의 일원들은 다들 안나의 뒤를 따라 감쪽같이 사라졌다.
단체 특성 상 드러내고 다니진 못했지만, 그 중엔 일상 속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한 명씩 자취를 감출 때마다 샘은 자신이 다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이제 남은 방법은, 넷 밖에 남지 않은 동료들과 함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안나를 찾고,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상황을 해결하는 것 뿐이었다.
"여길 밟고 넘어가면 됩니다."
모임 때와 같은 갈색 로브를 입은 '네이선(Nathan)'이 저택 울타리 앞 드럼통을 보며 말했다. 이 남자는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표정은 언제나 똑같았다. 도대체 왜 이런 사람이 악마숭배자 집단에 들어왔을지 샘은 늘 궁금해하곤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셋뿐인 동료 중 하나였다. 모임 때마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몰리(Molly)'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비교적 최근에 숭배자가 된 자라(Zara)는 늘 그렇듯,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안나는 분명 저택 안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번제를 위한 염소들도 저택 어딘가에 있겠죠. 그 염소들을 제물로 바쳐 아자젤을 진정시키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네이선이 여전히 기계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는 건가?"
"안나는 아자젤과의 유대를 끊고 싶어했습니다. 혼자선 힘들거라 말했는데, 기어코 혼자 시도했나 보군요. 안나는 아자젤에게 홀려 있겠죠."
"안나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저택 안에 있는게 확실한가?
"그럴 겁니다. 아자젤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안나에게 알려준게 저니까요. 아마 실패했겠죠. 어찌됐건, 우리가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은 우리 중 하나가 사라질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곧 따라가겠지만요."
샘은 대꾸하지 않고 입굴을 깨문 채 울타리를 넘었다. 녹이 슨 철제 울타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애초에 이 빌어먹을 집단에 가입한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샘은 그냥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뿐 딱히 악마나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비이성적 상황을 겪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악마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 동네를 떠서 평범하게 살겠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안나 푸에르테
염소는 생각보다 찾기 어렵지 않았다. 저택의 앞마당엔 커다란 철제 화로가 준비되어 있었고, 머지 않은 곳에서 새끼 염소 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붉은색으로 불길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샘은 '염소의 눈이 원래 붉던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옆에 놓인 열쇠로 우리를 열자, 이 작은 염소들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도망쳐 저택 곳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물 같은 거라도 쳐 뒀어야 했는데'
샘이 혀를 차며 염소 한 마리가 들어간 지하실 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네이선이 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부터 챙겨 가시죠"
"손전등?"
"저택 안엔 빛이 없습니다. 그리고 왼쪽 스위치를 누르면 자외선 램프가 켜집니다. 악마들에겐 효과가 있을 겁니다만, 배터리가 작으니 남발하시면 안 됩니다"
못미덥지만, 받아 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샘이 손전등을 켠 채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자라와 몰리가 뒤를 이었고, 네이선이 맨 뒤에서 따라왔다. 그리고, 우두커니 선 인영이 곧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샘은 수개월 만에 마주한 안나의 모습에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눈썹은 몽땅 빠져 있었고, 피부 곳곳은 마치 허물을 반쯤 벗은 파충류처럼 탈락해 있었다. 심지어 그 네이선조차 안나의 모습에 일그러진 표정을 보였다. 잠깐이나마, 샘은 말을 걸어 안나와 대화를 시도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척 봐도 안나는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은 경련하듯 떨렸으며 입으론 비명과 낱말이 섞인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안나는 이 쪽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샘은 조심히 안나의 옆을 지나쳐 도망친 염소에게 다가갔다. 뒤따라온 몰리가 준비한 짚단으로 염소를 꾀어냈고, 이내 염소의 목덜미를 드는 순간이었다.
"으워우웅어엉"
안나가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일행에게 다가왔다. 대경실색한 몰리와 자라는 비명을 지르며 지하실 밖으로 도망쳤고, 샘은 쿵쿵대는 심장을 느끼며 손전등의 자외선 램프를 안나에게 겨누었다. 네이선 또한 침착한 표정으로 안나에게 자외선 램프를 쪼였지만, 샘은 네이선의 굳은 입술과 식은땀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네이선의 말이 맞았는지, 안나는 주춤거리듯 멈춰섰고, 일행은 겨우 지하실을 빠져나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몰리가 염소를 손에 든 채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요...?"
샘은 말없이 몰리에게 염소를 빼앗듯 잡아채 목을 꺾어 화로에 던졌다. 그리곤 마당 한 켠에 놓였던 휘발유를 들이붓고 그대로 불을 붙였다. 잠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던 샘이 말했다.
"이러면 된 건가?"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짓씹듯 덧붙였다.
"이제 아홉 마리만 더 하면 됩니다"
아자젤과 염소
일행은 안나의 눈을 피해가며 염소를 찾아 모았다. 그렇게 몇 마리를 더 제물로 바치자, 이제 바닥에서 악마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되다 만 악마들인지 바닥을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것 밖에 못했고, 자외선 램프를 쬐면 마치 태양빛을 맞은 흡혈귀마냥 타버렸지만, 샘은 왠지 모르게 그 악마들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마리 남았군"
온몸이 땀으로 푹 젖은 샘이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이는 네이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6마리쯤 잡았을 때였을까? 자라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안나와 마주쳤다. 안나는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보이며 자라를 한 손으로 들고 사라졌고, 그 뒤로 자라가 흘린 새된 비명만이 남았다.
얼마 후, 네이선이 기진맥진해 쓰러진 자라를 발견하고 구해오기 전 까지, 샘은 자라를 잃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라는 의외로 다친 곳 없이 멀쩡했고, 소변을 지려 옷이 더러워졌긴 했지만 샘은 본인이 그 처지에 처했다면 본인 또한 마찬가지였을거라 생각했다. 겨우 일행에게 돌아온 자라는 울음기 가득한 얼굴로 안나가 자기를 제물 대신 쓰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염소를 제물로 바칠 때마다, 안나는 더욱 빨라지고 과격해졌다. 일행의 움직임도 탐험보다는 잠입에 가깝게 변했다. 안나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했지만, 다행히 소리없이 다가오진 않았다. 샘은 등진 벽 뒤로 뛰어가는 안나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심장 소리가 부디 기대만큼 작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스로 느끼기엔, 안나의 발소리와 별다를 바 없었다.
몰리가 도서관의 낡은 책장 사이에서 발견한 9번째 염소를 불태웠을 때, 안나는 더 극적으로 변했다. 네이선은 멀찍이서 본 안나에 대해 그답지 않게 흥분한 채 말했다.
"뿔이 자랐습니다. 아자젤이 그녀를 완전히 삼켜버린게 틀림 없어요."
이전의 모습도 최악에 가까웠건만, 네이선의 말마따마, 안나의 이마엔 두 개의 뿔이 삐죽 솟아나 상상 속 '염소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열 번째 염소를 찾았을 때, 샘은 안나의 변화가 그저 외모 뿐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염소를 들고 화로로 향하고 있을 때, 샘은 멀찍이서 들리는 안나의 괴성을 들으며 떨리는 몸을 부여잡는 한편 안나가 멀리 있음에 안도했다.
그러나 몇 초 후, 쏜살같이 달려오는 안나를 보고 샘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뻔 했다. 마치 처음 듣는 세 개의 외국어가 섞인 듯한 괴성을 지르며 쫓아온 안나는 네이선의 목덜미를 그대로 잡아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찌나 세게 목줄을 쥐었는지, 네이선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리는 신음만 흘리며 자취를 감췄다.
"일단 태워버리고 생각하지"
샘은 내심 잡혀간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동시에 안도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애써 상황을 합리화했다. 불타는 마지막 염소를 바라보며, 샘은 네이선이 차라리 잘못됐길 바라는 자신에게 한번 더 놀랐다.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음에도, 저 저택은 두 번 다시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내 바뀌었다. 그 끔찍함의 원인이 마치 목덜미를 잡힌 염소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화로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활활 타는 화로의 위에 뜬 안나는 샘과 몰리, 자라를 훑듯이 쳐다보았다. 샘은 그 눈빛이 마치, 저 상태가 되기 전 아름답던 안나의 눈빛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곧, 거센 불길이 올라왔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와중 안나가 외쳤다. 아니, 안나가 아닌, 안나 속 무언가가 외쳤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녀와 기다릴 것이다"
그리곤, 굉장히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웃으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몸의 일부가 숯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어재끼는 그 전율적 광경에 샘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간절히 해가 뜨기를 바랐다. 평소엔 자고 일어나면 마중을 나왔던 태양이 오늘따라 영 미적지근하게 오는 듯 느껴졌다. 다른 두 사람의 표정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안나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샘은 부디 이 악몽과 같은 제례가 끝났기를 바랐다. 끝나기만 한다면 네이선을 구하러 다시 저택에 들어가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샘은 긴 밤의 마지막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