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스라마스 공격대의 최종 우두머리 켈투자드는 인간 시절 키린 토의 마법사였다. 마법 연구를 하며 살던 도중 강령술을 연구하게 되고, 머릿속에서 수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금지된 마법을 연구한 대가로 켈투자드는 키린 토로부터 추방당한다. 이후 노스렌드의 얼음왕관으로 향하고 아눕아락의 안내를 받아 거대한 언데드의 지구라트인 낙스라마스를 돌아본다. 이윽고 리치 왕의 앞에 도착한 켈투자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한다.
인간 시절의 켈투자드가 리치 왕의 하수인이 되는 과정은 공식 단편 소설 '지옥으로의 여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편 소설 '지옥으로의 여정' - 에블린 프레드릭슨
“끝도 없는 간섭에 이젠 정말 진저리가 나는군. 중요한 연구를 하던 중이었소. 몇 주간 준비하고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하는 아주 섬세한 마법 말이오.”
심문을 위해 몇 시간이나 기다리며 모욕감에 치를 떤 끝에, 켈투자드는 마침내 자신을 고발한 이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키린 토의 공식 대변인인 드렌던과 모데라, 두 사람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맹렬히 켈투자드를 비난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안토니다스가 나타날 때까지 최후의 심문을 시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 늙다리 대마법사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 거지? 드렌던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쓰는 마법 따위를 ‘섬세하다’고 하는 건 생전 처음 듣는군.”
“무지한 자의 어리석은 의견일 뿐이지.” 켈투자드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멀리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제는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들은 너를 두려워하고 또 시기하지. 하지만, 새로운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결국 지혜와 권능이 너를 따를 거야.
갑자기 섬광이 번쩍이더니 험악한 표정의 백발 대마법사가 전당에 나타났다.
그는 작은 나무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켈투자드,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덕망 높은 안토니다스 님께서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러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셨구려.
어디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소이다.”
“늙어가는 게 두렵지? 그렇지 않나?” 안토니다스가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하나뿐이란 사실도 잘 알겠지?”
좋을 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둬…
숨을 몇 번 고른 후 안토니다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지금 내 건강을 염려할 때가 아닐 텐데…
사실 이번 일로 급한 용무가 있어 다른 곳에 들렀다 왔을 뿐이다.”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내 연구실을 뒤진 건가? 헛수고만 하셨군.”
“그래, 네 연구실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더군. 헌데 노스렌드에 있는 네 창고에서는…"
안토니다스는 역겨운 눈으로 켈투자드를 바라보았다.
망할 놈의 독선에 가득 찬 영탐꾼같으니라고.
“당신에겐 그럴 권한이 없…”
안토니다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려 켈투자드를 침묵시켰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자는 건물을 더러운 마법을 위한 실험실로 만들었다. 직접 확인하라, 동료들이여. 그 연구의 결과물을!”
안토니다스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상자를 열었다. 쥐의 시체 몇 구가 썩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체 중 둘은 상자 측면을 긁어대며 탈출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벌떡 일어났고, 곳곳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 앉아 있던 금발의 하이 엘프,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살아 더는 놀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캘타스 왕자마저도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켈투자드는 상자 안의 쥐들을 돌아보고 모두 쓰러져 꿈쩍도 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 실험도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젠가 안정적인 언데드 표본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 노고를 인정받게 되겠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너를 침묵시킨 마법에는 큰 허점이 있다. 어떻게 해제할지 알려줄까?
시간, 그리고 늘 켈투자드의 편에서 목표에 한 발짝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그 수수께끼의 음성만 있으면 된다.
‘그래, 알려줘!’ 켈투자드는 마음속으로 답했다.
또다시 빛이 번쩍이더니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가 안토니다스 옆으로 다가가자 하이 엘프 캘타스는 복잡한 표정과 음울한 눈빛으로 그녀의 뒤를 응시했다.
하지만 제이나 프라우드무어는 그녀의 임무에 완전히 집중하여 그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선명한 파란색 눈이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켈투자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설명하는 안토니다스에게서 상자를 받았다.
“제 부하들이 상자를 조사한 후에 내용물은 확실히 태워 없앨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순간이동으로 그곳을 떠났고,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바라보던 하이 엘프 왕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같았으면 켈투자드는 이 소리 없는 소극을 조롱하며 즐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침묵하는 사이 안토니다스는 장황한 비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켈투자드는 다시 마법을 해제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 상황을 묵과했다. 지금까지 이 자가 미심쩍은 마법을 추구하면 꾸짖기만 했다.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악의 마법을 실험했다는 증거가 이렇게 드러났다.
그 지역 주민들은 키린 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저주로 여기는 실정이다.”
“거짓말!” 마침내 켈투자드가 폭발하듯 외쳤다.
마법사 몇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있어 보였다. 어떤 해명이라도 기다리는 눈치였다.
“농민들도 우리만큼이나 2차 대전쟁을 잊지 않고 있소.
당신이 오크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오크 흑마법사들이 막강한 힘을 가진 건 사실이오.
우리의 저항이 무의미한 그런 힘이오. 거기에 대항할 마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오!”
“죽은 쥐로 군대라도 만들 셈이냐? 자연의 질서를 거슬러 창조한 조악한 존재들로?”
안토니다스가 냉담하게 물었다.
“네 일지도 찾았다. 네 끔찍한 사업에 대해 자세히도 적었더군.
이 하찮은 생물들을 부려서 오크에 맞서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오크가 현재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수용소를 탈출해서 우리에게 다시 위협이 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지만.”
“당신보다 젊다고 날 어린아이로 보지 마시오.” 켈투자드가 반박했다.
“사실 쥐는 연구의 진행 상황을 가늠하는 기준일 뿐이오. 일반적인 실험 기법이란 말이오.”
안토니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북쪽에서 보낸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 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너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 국왕이 세금을 올려서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걸.
맹목적으로 힘을 좇는 네 행동은 농민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 로데론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단 말이다.”
켈투자드는 세금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안토니다스가 과장하는 게 틀림 없다.
게다가, 진정한 마법사라면 보다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겠소.” 켈투자드가 이를 부드득 갈며 답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정도 비밀을 감출 순 없다…" 드렌던이 말했다.
모데라도 거들었다.
“우리가 백성을 보호하면서 스스로 위험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신중하게 처신해 왔는지 너도 잘 알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겉모습은 물론이고, 진실한 내면에서도 마찬가지야. 네 연구에 성과가 있었다면 기껏해야 우리를 이교도로 몰았던 것뿐이다.”
지나친 망언이었다.
“우리는 벌써 수백 년 동안 이교도로 불렸어! 교회는 우리의 방식을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건재하다.”
모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재앙과 타락만을 불러오는 어둠의 마법은 피했기 때문이지.”
“아니야, 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만.” 안토니다스의 목소리가 지쳐있었다. 그는 드렌던과 모데라를 향해 말했다.
“말로 해서 들을 자 같았으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당신네 뜻은 알겠소.” 켈투자드는 격분했다.
“젠장, 당신네 헛소리는 질리도록 들었소! 하지만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소! 이런 구닥다리 집회는 당장 때려… ”
“넌 이 집회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다.” 안토니다스가 말을 가로막았다.
“토론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네가 소유한 영토를 모두 철저히 수색하고 있다. 우리 기준에 따라 어둠의 마법에 물들었다 판단되는 물건은 모두 몰수해 조사한 후, 파괴할 것이다.”
켈투자드의 이름 모를 동료가 이미 경고했던 상황이었다. 비록 그때는 믿지 않았었지만. 이상하게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자 왠지 모를 해방감이 밀려왔다. 사실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기에 실험의 범위가 위축됐고, 그래서 연구의 진전이 더디었기 때문이다.
안토니다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증거를 바탕으로, 테레나스 국왕님도 우리의 판결에 동의했다. 그 광적인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네 지위를 박탈하고 모든 재산을 압류할 것이다. 그리고 달라란은 물론 전 로데론에서 추방하겠다.”
켈투자드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었지만, 좌중에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키린 토가 이번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대해 쉬쉬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의 행동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불러 올 파급효과를 두려워했으리라. 그런 두려움이 이번 한 번만은 켈투자드에게 도움이 되리라. 그의 재산이 왕의 금고로 들어가진 않으리라.
늑대 한 무리가 주문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켈투자드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에는 물러났다.
어깨너머로 돌아보니 놈들이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극지의 찬바람도 잦아들고 있었다. 저 멀리 앞쪽에 산봉우리가 보였고, 그 광경은 그에게 환희와 불길한 예감을 전해주었다. 바로 얼음왕관의 정상이었다.
전에 이 빙하에 도전한 이들도 있었지만 살아남아 후일담을 전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켈투자드는 혈혈단신 얼음왕관의 꼭대기에 올라 온 세상을 내려다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혹한의 땅, 이곳 노스렌드 대륙의 지도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손에 들어온 지도는 켈투자드가 떠날 때 후다닥 꾸린 짐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울뿐더러 목적지 또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순간이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안감에 모피를 두른 망토를 입었지만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 다리는 마치 돌기둥처럼 굳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서 추위를 피할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빛이 보였다. 마법의 문양이 새겨진 방첨탑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성채였다.
이제 살았다! 켈투자드는 서둘러 방첨탑을 지나 순수한 힘으로 이루어진듯한 다리를 건넜다.
그가 다가가자 요새의 성문이 열렸지만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춰야 했다.
기괴한 모습을 한 두 생명체가 입구 양쪽을 지키고 서 있었다. 허리 아래가 마치 거대한 거미처럼 생긴 생명체였다.
여섯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몸통은 인간과 비슷했고 마치 팔처럼 두 개의 앞발이 붙어 있었다.
그 모습도 놀라웠지만 상태는 더욱 기괴했다.
몸통에는 절개된 상처가 수없이 많았고 최악의 상처에는 서툴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 경비병의 팔은 희한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송곳니가 달린 주둥이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왔지만 닦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익숙한 언데드의 악취가 풍겨왔지만, 경비병들에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켈투자드의 생쥐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들 거미 생물은 생전의 힘과 능력을 거의 보존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경비를 세울 수도 없을 테니까. 이들을 만들어낸 자는 굉장한 실력의 강령술사임이 분명했다.
놀랍게도 경비병들은 켈투자드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그는 뜻밖의 행운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 흔쾌히 요새로 들어섰다.
바깥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복도 앞쪽으로 반은 거미 모습을 한 생명체를 본뜬 석상이 부서져 있었다. 요새는 최근에 지은 듯했지만 그 석상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북쪽으로 오는 동안 고대의 폐허에서 비슷한 물건을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온몸의 한기 때문에 생각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추측건대, 한 강령술사가 거미들의 왕국을 정복하여 이들을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고 보물을 전리품으로 취했으리라.
켈투자드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여기서 분명 굉장한 비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복도 끝에 거미와 딱정벌레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의 거대괴수가 보였다.
그것은 천천히 켈투자드에게 다가왔다. 드높은 몸통에는 더 많은 상처와 붕대가 보였다.
경비병들과 같은 언데드였지만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놀라움보다는 공포가 느껴졌다.
켈투자드는 자신에게 이런 괴물을 무덤에서 일으킬 능력은 고사하고 물리칠 힘이라도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생명체는 거대한 몸통에서 울려 퍼지는 깊은 저음으로 켈투자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록 완벽한 공용어를 구사했지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혀차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대마법사여, 주인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나는 아눕아락이라 하오.”
지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주인님 밑에서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거대한 생명체가 켈투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를 한입 식사거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긴장한 켈투자드는 긴장한 채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아직은 때가 아니오.” 아눕아락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당신은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을 바쳤소. 감탄할 만한 목표였지.
하지만, 마법사로서 당신의 경험은 주인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하오.”
도대체 이런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혹시 이 청지기는 그를 경쟁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가능한 한 빨리 오해를 풀어야 했다.
“키린 토의 전 일원으로서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마법을 쓸 줄 압니다.
주인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더라도 성공적으로 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고 볼 일이오.”
아눕아락의 안내를 받아 수많은 지하도를 내려갔다.
지표면 아래 깊숙이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둘은 거대한 지구라트로 들어갔다.
낙스라마스라고 부른다는 그곳은 반인 반거미 생물들이 만든 또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아눕아락이 처음 보여준 방에는 급격히 그들만의 특징을 잃어버린듯한 언데드로 가득했다.
하지만 진짜 거미들도 언데드 사이로 분주히 돌아다니며 거미줄을 치고 알을 낳고 있었다.
켈투자드는 역겨운 표정을 애써 감췄다. 거대한 청지기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들켜 그를 만족시키고 싶지 않았다.
켈투자드는 언데드 거미 중 한 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군요. 같은 종족에서 파생된 겁니까?”
“그렇소, 우리는 네루비안족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살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주인님이 오셨고, 그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우린 어리석게도 그분께 도전했소.
우리가 승리할 수도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은 게지. 우리 중 다수가 죽고 언데드로 부활했소.
살아생전 난 왕이었소. 하지만 지금은 이곳의 지하군주이지.”
“불사의 몸을 받는 대신 그분을 섬기기로 했다는 뜻이군요…"
켈투자드가 혼잣말했다. 놀라웠다.
“‘동의했다’는 말에는 선택의 의미가 담겨있고요.”
그 강령술사에게는 언데드를 복종시킬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켈투자드는 아마 필멸의 종족 중에서 이곳에 자유 의지로 발을 들인 첫 번째 인물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점점 불안해지던 켈투자드는 화제를 돌렸다.
“이곳은 당신의 동족으로 가득하군요. 지금 이곳을 통치하는 게 당신입니까?”
“난 언데드가 되어 동료들을 이끌고 새로운 주인님을 위해 이 지구라트를 정복했소.
그리고 주인님의 뜻대로 이곳을 뜯어고쳤지. 하지만 내게 낙스라마스를 통치할 권한은 없소.
또한 이곳에 우리 종족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오. 이곳은 네 전당 중 하나에 불과하오.”
“그렇다면, 갑시다. 지하군주여, 나머지도 보여주세요.”
두 번째 전당에는 켈투자드가 꿈에 그리던 모든 것이 있었다.
마력이 깃든 유물과 실험 도구며 그곳의 다양한 물건들을 보니 자신의 옛 실험실이 참 초라했다고 느껴졌다.
거대한 실험실은 엄청나게 많은 조수를 수용해도 될 만큼 넓어 보였다.
여러 동물의 신체 일부를 모아서 솜씨 있게 꿰매어 붙인 언데드 야수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사람의 팔다리가 달린 인간형 언데드도 있었다.
하지만, 네루비안과 달리 인간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운명에 저항하려는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강령술사가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인근 묘지에서 시체를 구한 것이 틀림없었다. 현명한 행동이었다.
키린 토에서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즉각 조치했을 테니까.
켈투자드는 세 번째 전당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눕아락은 무기고와 전투 훈련 장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하군주를 따라 찾아간 방에는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물통과 화물 상자가 단단히 포장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낙스라마스에 이렇게 엄청난 수량의 보급품이 필요한 것일까?
피라미드가 포위되는 사태를 대비해 미리 비축해둔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마침내 아눕아락과 켈투자드는 마지막 전당에 도착했다.
정원처럼 꾸민 마당에 자라고 있는 거대한 버섯 포자에서 유독가스가 뿜어져 나와 켈투자드는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 아래의 토양도 피폐한 채로 병들어 보였다.
좀 더 조사해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때 발밑에서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구더기를 닮은 주먹만 한 생명체였다.켈투자드는 겁에 질려 허둥지둥 다음 방으로 향했다.
작은 가마솥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안에는 초록빛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났지만 호기심이 생긴 켈투자드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눕아락의 커다란 앞발이 재빨리 그를 가로막았다.
“주인님께서는 당신이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시오. 아직은 때가 아니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날 죽일 수 있는 액체인가요?”
“살아 있는 육신으로는 주인님을 섬길 수 없는 자들이 많이 있소. 이 액체는 그 문제를 해결할 때 쓰지.”
얼이 빠진 켈투자드에게 지하군주가 말했다.
“이리 오시오. 당신에게 보여주겠소.”
아눕아락이 그를 데려간 감옥에는 두 명의 죄수가 있었다.
행색을 보니 마을 주민 같았다. 한 남자가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둘 다 살아 있었지만 여자는 병색이 역력했다.
켈투자드는 지하군주를 근심스럽게 쳐다봤다.
절망에 빠진 여자의 흐릿한 눈동자가 켈투자드를 발견하자 금세 반짝였다.
“주인님, 자비를 베푸세요! 제 몸이 허물어지고 있어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요.
제발 제게 불화살을 내려 안식을 허락하세요.”
그녀는 강령술사의 노예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눕아락의 말로는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켈투자드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외면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감옥 쇠창살에 매달렸다.
“제발, 조그마한 동정이라도 베풀어 주세요! 최소한 우리 남편의 안전이라도 보장해 주세요!”
그녀가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쉬, 여보! 조용히 해.” 그녀의 뒤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저 여자 좀 조용히 시키십시오!” 켈투자드는 거친 목소리로 아눕아락에게 속삭였다.
“저 소리가 성가신가?” 아눕아락은 한줄기 번갯불처럼 쇠창살 사이로 앞발을 날려 여자의 심장 부위를 관통했다.
지하군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의 몸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남자는 슬픔에 울부짖었다. 켈투자드는 죄책감이 들어 그를 외면했지만 바닥에서 여인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크게 구부려지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남자도 충격에 울음을 그치고 입을 떡 벌린 채 서 있었다.
죽은 여인의 피부가 희미한 녹색을 띤 회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발작도 서서히 멈추고 그녀는 어느새 구부정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더니 남편을 발견하고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경비병, 당장 이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 그녀는 거칠게 외쳤다.
경비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뒤엉킨 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헝클렸다.
그때 켈투자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혈관이 검게 변하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음산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남편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당신 괜찮아?”
남자가 잠시 주저하다가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씁쓸한 웃음소리는 고함으로 바뀌었다.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남자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인이 힘껏 밀쳐내자 남자는 감옥 안을 날아올라 쇠창살에 강하게 부딪혔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물러서.”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쉬고 있었다.
“당신을 해치니까.”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뒷걸음질치다가 어느새 감옥 반대편 벽까지 이르렀다.
“당신을 해친다고. 당신을…" 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켈투자드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천천히 가슴에 난 구멍으로 한 손을 가져갔다.
거친 쇳소리와 함께 얼굴을 찡그린 그녀는 상처에서 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 핥았다. 그리고 빨아 먹었다.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그녀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고 피가 뿜어져 나와 감옥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켈투자드는 뒤로 물러났다.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말로는 표현 못 할 기괴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뭔가를 뜯어내고, 찢고, 씹는 소리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건 때때로 나지막이 들려오는 구슬픈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그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멈출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극도의 메스꺼움과 공포를 느낀 켈투자드는 순간이동으로 낙스라마스를 빠져나왔다.
눈길을 몇 걸음 비틀거리며 걸었지만, 결국 토하고 말았다.
깨끗한 눈을 한 줌 집어 더러워진 입가와 얼굴 전체에 거칠게 문질러 보았지만,
결코 자신이 본 것을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걸까?
하나씩 차례로, 혼란스럽게 흩어졌던 생각들이 하나로 정리됐다.
강령술사는 세상 모든 이들이 비난하는 그 마법을 그냥 학구적인 호기심만으로 파고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요새를 방어하는 정도에서 멈출 생각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좀비로 만드는 액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낙스라마스에는 거대한 규모의 보급품, 무기, 방어구에 훈련소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건 방어 수단이 아니다. 전쟁 준비였다.
갑작스러운 돌풍이 그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으스스한 망령 한 무리가 그의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년 전 켈투자드는 보랏빛 요새에서 그들에 관한 문헌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희뿌옇고 반투명한 형체를 지닌 망령들에 대해 모호하게 기술되어있던 설명 어디에도, 번뜩이는 두 눈에 담긴 싸늘한 원한은 언급된 적이 없었다. 망령 중 하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다시 생각해보는 건가? 너도 봐서 알겠지만 간사한 재주를 부려봤자 헛수고일 뿐이다. 주인님을 피할 수 없어. 그래,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어디로 가고 싶으냐?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볼까? 누굴 믿겠느냐?”
맞서 싸우거나 달아나거나. 영웅적인 선택이었다.
아니, 영웅적이지만 무의미한 선택. 그가 죽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강령술사의 제자가 되는 데 동의하면,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충분히 훈련한 뒤에는 강령술사를 능가하여 쓰러뜨릴 수도 있으리라. 켈투자드는 망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날 그에게 데려가 주시오.”
망령은 그를 다시 요새 안으로 순간 이동시켰고 여러 전당을 지나 밑으로, 또 밑으로 데려갔다.
켈투자드는 어딜 지나왔는지 나중에 결코 기억해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침내 그들은 지하 깊숙이 자리한 거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으스스한 냉기가 뼛속까지 사무쳐왔다.
동굴 가운데는 아찔할 정도의 바위 첨탑이 우뚝 서 있었다.
첨탑 측면에는 나선 모양의 계단에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켈투자드와 망령들은 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흥분과 두려움으로 고동쳤다. 그는 느려지는 걸음을 다시 한번 재촉했다.
하지만, 그 효과도 오래가지는 않았고 아주 무거운 손아귀가 뒤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노스렌드까지의 긴 여정으로 생각보다 훨씬 지친 것이 분명했다.
올려다보니 멀리 첨탑 꼭대기에 커다란 수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송이의 눈도 쌓이지 않은 그 수정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강령술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망령 하나가 차가운 돌풍을 불러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속도가 다시 늦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켈투자드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몸쪽으로 잡아당겼다. 숨이 가빠왔지만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얼굴로 세찬 진눈깨비가 불어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계단 중간에서 지팡이에 기대어 멈춰 서 있었다.
공기가 매우 탁해서 숨쉬기도 힘들었고, 그는 어느새 헐떡이고 있었다.
“잠시만, 좀 쉬게 해줘.” 켈투자드는 가까스로 내뱉었다. 그의 뒤에 있던 망령 하나가 답했다.
“우리는 안식이 없는 몸이지. 그런데 왜 네게만 안식을 허락하겠느냐?”
켈투자드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점점 더해만 가는 피로에 어깨를 움츠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니 빛나는 수정에 가까이 와 있었다.
여기서 보니 수정은 흡사 왕좌처럼 생겼고 중앙에 흐릿하지만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를 손에 만져질 듯한 사악한 기운이 둘러싸고 있었다.
망령들이 그의 몸을 스치자 켈투자드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는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차갑게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잡아당기는 그의 목구멍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켈투자드는 뒤돌아 달아나고 싶다는 끔찍한 충동에 휩싸였다.
“주인님은 대체 어디에 있나?"라고 외치는 그의 새된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싸락눈이 휘몰아쳐 마치 잔인한 채찍처럼 그를 때렸다.
켈투자드는 비틀거리다가 다시 똑바로 섰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위쪽의 왕자는 그를 더욱 짓눌렀다.
그의 고개를 찍어 누르고, 그의 등을 굽게 했다. 똑바로 서서 걸을 수가 없었다.
켈투자드는 곧 무릎을 꿇고 기었다.
강령술사의 음성이 켈투자드의 머릿속에 울렸다.
이제는 키린 토에서처럼 친절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것이 네게 들려줄 첫 번째 교훈이다.
나는 너나 네 종족에게 어떠한 애정도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이 세계에서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려 한다.
오해하지 마라.나에겐 그러한 권능이 있다.
가혹한 망령들은 켈투자드를 계속 앞으로 떠밀었다.
창피함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는 지팡이마저 버리고 두 손으로 기었다.
강령술사가 내뿜는 사악한 기운이 그를 눈 속 깊이 짓눌렀다. 켈투자드는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신이여, 그는 잘못 알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철저히 오해하고 있었다.
이건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극심한 공포 때문이었다.
네 아무리 무모하게 날뛰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으리라.
나는 결코 잠들지 않는 자이니.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책을 읽는 것처럼 네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노라.
나를 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은 품지 마라.
네 연약한 마음으로는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부리는 이 힘에 도전할 수 없으리니…
켈투자드의 로브는 이미 오래전에 찢어졌고 바지는 얼음 첨탑의 거친 계단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손과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 또 다른 흔적을 그리고 있었다.
켈투자드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려 발버둥쳤다.
왕좌에서는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뿜어져 나왔고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왕좌는 수정이 아니라 얼음으로 이뤄져 있었다.
불멸이란 굉장한 선물일 수도 있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통일 수도 있다.
네가 나를 부정한다면 진정한 고통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때 너는 내게 죽음을 구걸하리라.
켈투자드는 가까스로 왕좌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갔다. 그리고 더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왕좌로부터 나오는 초인적인 힘과 증오의 기운에 압도당하여 제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한쪽 뺨이 단단한 돌 바닥에 닿았다.
“제발,” 그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제발!” 이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마침내 그를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망령들은 멀리 날아가 버렸지만, 켈투자드는 일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일어설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무의식 중에 그를 괴롭히던 존재를 쫓았다.
왕좌 위가 아니라 그 안에 판금 방어구 일체가 ‘앉아’ 있었다.
켈투자드는 갑옷이 검은색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눈을 깜박이며 다시 보니, 그 표면에서는 어떤 빛도 반사되지 않았다. 사실 계속해서 쳐다볼수록 모든 빛과 희망, 그리고 이성을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시가 박힌 장식 투구는 마치 왕관처럼 보였다.
투구에는 푸른색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고, 갑옷의 다른 부분처럼 그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한쪽 건틀릿은 거대한 도검을 쥐고 있었는데, 칼날에는 다음과 같은 뜻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힘이 있었노라. 그리고 여기 절망 또한 있었노라.’
나의 부관이여, 네가 가장 갈망하는 꿈을 이루고도 남을 만큼의 지식과 마법을 주겠다.
그러나 그 대가로 너는 살거나 죽거나 네게 남은 시간 나를 섬겨야 한다.
날 배신한다면 영혼이 없는 하수인으로 만들겠노라.
그때도 너는 내게 복종하리라.
리치 왕이라는 이 유령을 섬겨야 한다고? 켈투자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를 섬기면 큰 힘을 얻게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원토록 계속되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그를 너무 늦게 찾아왔다.
게다가 진정한 죽음을 맞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런 저주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 당신의 종입니다. 맹세합니다.” 쉰 목소리로 켈투자드가 말했다.
리치 왕은 켈투자드에게 낙스라마스의 환영을 보여주는 것으로 답했다.
빙하 바깥에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넓게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들은 어둠의 마법이 꿈틀대는 팔을 함께 들어 올리고 내리는 것을 반복하며, 입을 모아 낮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켈투자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었다.
대지가 그들의 발 밑에서 진동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너를 세상으로 내보내 내 권능의 증인으로 삼으리라.
산 자들에게 나의 대사로 파견하겠노라.
그곳에서 동지를 모아 나의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라.
그들에게 환상을 심어줘라. 질병과 폭력을 이용하라.
그리고 아제로스에 나의 주둔지를 세워라.
놀랍게도 얼어붙은 지면이 움직이며 쪼개졌고, 그 틈을 뚫고 지구라트의 꼭대기가 솟아나왔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주문에 더욱 힘을 쏟았고 웅장한 피라미드가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얼음 조각과 바위 덩어리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곧 그 구조물 전체가 대지의 구속을 벗어나 솟아올랐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낙스라마스는 공중에 떠올랐다.
여기, 너의 방주가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