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는 e스포츠 역사에서 칠전팔기(七顚八起)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선수가 있다. 7회 준우승의 아픔을 이겨내고, 8번의 도전 끝에 당당히 IEM 월드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린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어윤수가 그 주인공이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여러 번 미끄러졌을 때, 대부분 커다란 좌절감을 느끼고 주저앉는다. 하지만, 어윤수는 주저앉지 않고 잡초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12년 노력의 결실로서 염원하던 우승자 타이틀과 15만 달러 상금 그리고 블리즈컨 직행 티켓을 얻었다.
12년의 노력의 결실 이루다
"우승하면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나오더라.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옆에서 (백)동준이가 "형 이거 사실 꿈이야. 자고 일어나면 다 없어진다"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진짜 꿈이면 어쩌지' 하면서 놀라기도 했다. 우승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상금보단 우승 타이틀이 나에게 더 간절했기 때문에 우승했다는 것 자체가 더 기뻤다. 상금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어머니가 우셔서 나도 같이 울었다. 여동생도 나의 경기를 거의 다 챙겨 보는데, 동생도 같이 울먹거리더라. 셋이 스피커 통화를 하면서 계속 울었다."
기적의 확률을 뚫고 올라간 결승전
"초반 오픈브라켓에서 같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나는 여기 있을 레벨이 아니다"라며 잘난 척을 했다. 그만큼 높이 올라갈 자신이 있었다. 오픈브라켓을 뚫고 24강에 진출했는데, 24강을 0승 3패로 시작했다. 사실상 0승 3패로 출발하면 99% 탈락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잘난 척을 많이 했는데, '광탈'하게 돼서 선수들에게도 많이 부끄러웠다.
멘탈이 완전히 나간 상황에서 어차피 탈락이니까 남은 두 경기를 대충 해야겠다 싶었는데, '유써멀' 선수를 이기자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생기더라. 결국, '스칼렛' 선수까지 꺾고 2승 3패를 기록했고, 승점 1점 차이로 12강에 진출했다.
12강에서 (주)성욱이와 만났는데, '나는 원래 24강에서 떨어질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며 져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 그런데 3:0으로 성욱이를 이겼다. 8강서 만난 '세랄' 선수를 상대로도 마음을 비우고 플레이했는데, 풀세트 끝에 이겼다. 4강도 마음을 비우고 했더니 이겼다. 그렇게 결승전까지 올라가니까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만나면 가장 부담스러운 상대인 조성주, 이신형, 이병렬 선수가 빠르게 탈락해서 더 마음 편하게 경기에 임했던 거 같다. (전)태양이도 부담스러운 상대였는데, 완전히 반대편 대진에 있어서 부담이 없었다. 대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웃음)."
과감한 배짱이 부른 우승
"그동안 경기에서 상대에게 맞춰가는 플레이를 많이 했다. 눈치를 많이 봤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과감하게 플레이하지 못해서 준우승을 많이 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 대회에서도 맞춰가는 플레이를 많이 했는데, 결승전 0:2로 밀리는 상황에서 '배짱 있게 하자'는 생각으로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스코어를 역전할 수 있었다.
요즘 프로토스가 저그 상대로 후반을 가지 않고 타이밍 러쉬를 하는 것이 트렌드다. 대부분 프로토스가 빠르게 러쉬 타이밍을 잡기 때문에 저그는 업그레이드를 누를 여유도 없다. 그래서 6세트를 제외한 대부분 경기에서 과감하게 배를 불리지 못했다.
하지만, 6세트에서 상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배를 불렸다. (김)대엽이도 그것을 알아채고 즉흥적으로 러쉬 타이밍을 잡았는데, 빌드 최적화가 완벽하게 되지 않아서 타이밍이 빠르지 않았다. 결국 대엽이의 올인을 다수의 히드라리스크로 막고 이길 수 있었다. 원래 프로토스의 올인을 다수의 히드라리스크로 막는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독한 결승전 트라우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준우승을 세 번 정도 했을 때,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주변에 있는 게이머 형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 같다. 특히, (정)명훈이 형의 도움이 컸다. 명훈이 형도 준우승을 네 번한 뒤 우승했는데,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줬다. 명훈이 형이 "너는 끝까지 하면 언젠가 우승할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더라. 팬들이 계속 응원해줘서 우승하기 전까지 그만두지 못하겠더라. 팬들의 사랑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반대로 나를 너무 희화한 팬들도 있어서 자존심이 상해 그만두지 못한 것도 있다. ‘이렇게 놀림만 받고 은퇴할 순 없다’고 생각하며 오기로 버텼다.
결승전 트라우마의 경우, 주변에서 많은 조언을 해줬다. 심리 치료를 받아보라는 말도 들었지만, 딱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병렬이가 2017년에 우승을 싹쓸이했을 때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부담감을 버리고 편하게 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했다. 그 말이 인상 깊어서 나도 그렇게 했는데, 잘 된 거 같다. 앞으로도 편한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할 생각이다."
28살, 프로게이머로서 적지 않은 나이
"나는 나이를 먹어도 기량이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량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더라. 반응 속도와 APM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물론, 나의 예전 피지컬보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보통 선수들 보다 떨어지는 건 아니다(웃음). 다른 잘하는 저그 선수들이 워낙 피지컬이 좋다. 그들과 비교해서 조금 더 낮아진 거 같다.
이번 IEM 우승 인터뷰서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나이 때문에 해외 대회 출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김)도우 형이 지금 29살인데, 해외 경기 출전이 굉장히 힘들다고 하더라. 나는 블리즈컨을 확정 지었기 때문에 아직 군대 계획은 안 세웠는데, 내년 말 안에 갈 것 같다.
얼마 전까지 군대 갈 나이가 다가왔기 때문에 전역한 선수들이 많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번에 우승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전역한 선수들이 딱히 부럽지 않더라(웃음).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는데, 요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e스포츠 최고의 7전 8기 주인공
"올해로 데뷔 12년 차가 됐다. 이대로 준우승만 하고 이룬 것 없이 은퇴하는 게 아닌가 걱정한 적도 있다. 그런데 7번 준우승 이후 8번 도전 끝에 우승하게 됐다. 나의 스토리를 보면서 감명 깊어 하는 분들이 많더라. 주변에서 축하도 많이 받았다. 프로게이머로서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 뿌듯하다.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 좌우명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어떤 분야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결과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준우승만 오래 해서 솔직히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28살이 되고 손목도 조금씩 아파지면서, '안 되겠다'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노력하다 보니 되긴 되더라.
결승전이 끝나고 이재선 선수가 나에게 "형이 우승한 거 보고 나도 울었다"며 "형도 했으니, 나도 언젠가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성적이 안나와서 은퇴를 고민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준 것 같아서 뿌듯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팬들에게
"준우승을 많이 했을 때 나를 놀리는 분들이 많았다. 다들 나를 놀리면서 나의 팬이라고 하더라.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우승하고 이제 나를 놀리지 못하게 돼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다들 자기 일처럼 좋아하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팬들이 했던 놀림이 다 응원이었구나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 12년 차인데, 한결같이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시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작을 준우승으로 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준우승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우승한 것을 보니 꼭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올해 우승으로 시작했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올해의 마지막을 블리즈컨 우승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현재 블리즈컨 직행 시드도 확보했고, 상금이 큰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여유가 많이 생겼다. 간절함이 조금 떨어지긴 했는데, 어쩔 수 없는 거 같다(웃음). 그래도 아직 7개월이나 남았으니 후반에 열심히 해서 블리즈컨 우승도 노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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