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구매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고민한 적은 처음이었다. 비단 이런 생각을 나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체험판을 했을 때의 즐거움과 재미는 부정할 수 없었지만, 언어 압박이라는 커다란 장벽이 걸림돌이 됐다. 세상에, 셰익스피어의 영문 고전에서나 나올 법한 'thou couldst' 같은 문장이 텍스트로 나오는 게임이라니.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저 포도는 분명 실 거야"라는 외침이 목 중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하지만 고민 끝에 맞이한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신 포도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시대를 역행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그래픽. 과거 JRPG의 향수에 기대기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느껴졌다. 외국어 투성이의 지문, 음성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시대 역행?" - 과거의 느낌을 지금 기술로 살리다
그 옛날 '스퀘어' 방식의 RPG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단적으로 시대를 역행한 게임이다. 언리얼 엔진4를 이용한 3D 배경, 2D 16bit 캐릭터를 보여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그러니까, 패미컴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올드 게이머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시절을 현재의 기술력으로 재현한다.

때문에 최신 게임 엔진으로 만든 게임임에도, 현재 스퀘어 에닉스가 제작하는 '파이널 판타지',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와 비교해서도 확연히 다른 그래픽을 보여준다. 게임의 전반적인 형태, 시스템들 모두가 두 회사가 따로 떨어져 있던 시절의 게임들에 맞춰져 있다. 자칫하다가는 구시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게임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비주얼로 마감됐다.

▲ 현재 스퀘어 에닉스의 간판 타이틀, '파판'과 '드퀘'와는 다른 방식의 비주얼이다.

초반부터 확인할 수 있는 광원 효과부터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부분이다. 도트로 만들어진 게임에서 3D로 넘어가며 달라지는 장점이자, 과거의 향수를 지금에 맞게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마을로 어귀에서부터 떨어지는 햇살의 표현, 지방마다 다른 색감, 도시 구조에 따라서 달라지는 카메라 워크, 아웃 포커싱 등은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세계를 아름답게 담아낸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OST로 여행길을 즐겁게 마무리한다. 플레이하는 내내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이 함께하며, 그 시절의 향수를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게임의 외적인 모습은 이미 30여 년도 넘은 과거를 바라보고 있으나, 현재의 기술력으로 이를 충분히 의미 있고 세련되게 재해석한다. 고전의 향기를 담은 그래픽임에도 허투루 만들지 않고 오히려 많은 공을 들였다.


▲ 옛날 느낌이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세련됐다.


" 무엇이 턴제에 긴박감을 만드는가" - 흥미로운 시스템들
단순 커맨드가 아니라, 턴제 임에도 타이밍을 젤 것.

일반적으로 인카운터 시스템, 턴제 기반 전투는 전반적으로 느린 템포라는 인상이 강하다. 정적으로 진행되기에 강렬함을 주기 어렵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게임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연출과 부가적인 시스템을 추가하여 게임의 호흡을 변경하고자 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전투에서 호흡을 달리하기 위해 변화를 준 것은 옥토패스 트래블러도 마찬가지다.

전투를 관통하는 시스템은 개발진의 전작인 '브레이블리 디폴트'와 '브레이블리 세컨드'에서 선보였던 시스템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어 시에 포인트를 획득하고, 공격 시에는 포인트를 사용하여 더 공격적이고 타이밍을 노리도록 유도한다.

매 턴마다 하나씩 쌓이는 '부스트'는 게임을 풀어나가는 데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부스트 포인트를 소모하여 공격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진행된다. 무기를 사용한 공격이라면 사용한 부스트 포인트 (최대 4개)에 따라서 공격 횟수가 증가하며, 마법 또는 스킬이라면 공격력이 강화되는 방식이다.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큰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어느 순간에 부스트를 사용할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 부스트 시스템은 전투를 진행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로 사용한다.

공격 횟수와 대미지의 증가라는 흐름은 '브레이크 시스템'과 맞물리게 된다. 특정 공격이 누적되면 적이 스턴 상태에 빠지는 브레이크는 부스트의 전략적인 사용을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적 좌측에 표기되는 방패 모양은 특정 무기 또는 속성으로 1회 공격할 때마다 1씩 감소한다. 0이 되는 순간, 적이 연출과 함께 무방비 상태에 빠진다. 이후에는 입는 대미지 또한 증가하므로 더 손쉽게 적을 없앨 기회가 온다.

그리고 동시에 플레이어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부스트로 공격횟수를 늘려서 적을 브레이크하고 패턴을 끊을 것인지. 아니면 부스트를 스킬에 투자해서 한 번에 강한 대미지를 줄 것인지 말이다. 적이 몇 등장하지 않는 초반에는 바로 적을 브레이크 하는 것이 이득이겠으나, 적의 숫자와 함께 요구 공격 횟수가 늘어나면서 고민은 깊어진다.

▲ '브레이크'는 전투에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난이도 설정이 적정 레벨대에서는 굉장히 빠듯하다. 단순히 능력치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전투 방식에는 큰 한계가 있는 게임이다. 브레이크 이전에는 제대로 된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전투에서 브레이크와 부스트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난이도가 높은 퍼즐 게임처럼 완벽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몇 번의 브레이크 실수는 전멸로 이어지므로 전반적으로 전투는 긴장감이 넘치고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 HD 진동으로 쫄깃한 타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더불어 게임의 깊이를 한참 늘릴 수 있는 시스템들도 매력적이다. 대표적으로 잡 체인지 시스템이 그러한데, 파티를 주점에 가야만 변경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언제 어디서나 메뉴를 통해 변경할 수 있도록 설계해뒀다. 이는 곧 다양한 서브 직업의 패시브 스킬을 조합하고 연구하라는 의미다.

▲ 파티 변경은 불편하게, 잡 체인지는 편하게 만들었다. 충분히 의도한 부분.

전직을 하더라도 획득한 서포트 스킬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다양한 직업을 옮겨가며 최적의 세팅을 찾으라는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스킬을 배우는 데 들어가는 잡 포인트(JP)를 축적했다가 원하는 직업의 패시브 스킬만 쏙쏙 골라 담을 수 있는 방식이다.

패시브는 다른 직업의 것을 사용하고, 스킬은 또 다른 직업의 것을 사용할 수 있는 방식.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가 구상할 방법의 수는 끊임없이 늘어난다. 단순히 직업 수로만 따져도 8명의 주인공 * 8개의 직업과 4개의 상위 직업까지 고려하면 꽤 많은 조합이 가능하다. 여기에 각자 주인공이 가진 고유한 스킬들이 있으니 파티 조합에 따라서 시너지도 달라진다.

▲ 조합은 무궁무진하다. 서브 직업에 따라 캐릭터 스프라이트도 바뀐다.

▲ "왜 사요? 훔치면 되는데?" 테리온 같이 공짜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수가 되긴 한다.


"대하드라마를 기대했나?" - 큰 줄기는 없다
그 옛날 '스퀘어'의 실험작에 가까운 게임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흥미로운 전투 시스템과 잡 시스템 등으로 게임의 깊이를 부여한다. 하지만 8명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법에서는 생각보다 모자란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실망했을 지점이다.

출시 이전 8명의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스토리 텔링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리고 이 8명의 주인공이 어떻게 엮일 것인가를 기대하는 팬들이 다수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실제 게임의 모습은 기대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일단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8명의 주인공은 각자 다른 목적으로 움직인다. 주인공 각각의 이야기를 따지자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서로 여행을 하는 목적이 확고하고 JPRG의 전형적인 클리셰에서 벗어나 있다. 짧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8개 있는 셈이다.

▲ 8명의 주인공이 모여있는 이 일러스트는 결국 거짓말에 가까운 것.

그러나 이들이 얽히고설키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일반적인 스테레오타입의 일본 RPG가 보여준 구조를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실망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최종 장에는 한 줄기로 모여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8명의 여행자라는 타이틀의 의미처럼, 이들 모두가 주인공이며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옴니버스도 아니고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이야기기에, 서로의 접점은 희박하거나 부재하다. 2챕터부터는 동료끼리 대화를 시작하기는 하나, 매우 짧고 이마저도 각자의 메인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있다.

인물들 간에 접점이 없다는 것은 시나리오 연출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플레이어가 선택한 주인공 외에 다른 주인공이 파티에 참가하는 과정부터 확실하게 드러난다. 옥토패스 트래블러가 주인공 8명을 조명하는 방법은 '서로 각자의 이야기가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 선택한 캐릭터의 챕터1을 클리어하면,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이후 진행되는 챕터2의 권장 레벨은 22레벨. 챕터 1을 클리어하고 나서는 보통 7~8정도 레벨일 테니, 다음 시나리오에 바로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플레이어는 원하는 방향, 원하는 캐릭터를 찾아서 대륙을 모험하며 성장한다.

▲ 첫 장을 끝내면 대륙을 돌아보는 것부터 추천하니, 말은 다 했다.

새로운 동료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해당 캐릭터의 1장을 끝내야만 동료로 영입할 수 있게 된다. 이후 마을의 사이드 퀘스트가 개방되고, 각 캐릭터의 챕터2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이후로도 구성은 같다. 각 캐릭터의 챕터2가 진행되는 장소를 방문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인공 8명의 시나리오는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동료로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챕터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면 다른 주인공들은 컷신에서 사라진다. 이후 전투를 진행할 때는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만, 등장과 재등장의 반복 속에서 연결고리는 점차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 '전투를 할 때 만' 동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나리오 면에서는 다른 게임들과 지향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인물마다 시나리오가 있다는 점에서, 과거 스퀘어의 실험작이었던 '라이브 어 라이브 (LIVE A LIVE)'를 연상케 한다. 라이브 어 라이브는 시나리오 구조가 매우 독특한 게임이었다. 각자 다양한 세계관의 주인공 7명이 있었고, 플레이어는 각 세계관을 플레이한다. 그리고 최종장에서는 각 주인공이 만나게 되고 마지막 장의 주인공이었던 최종 보스와 대결하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줬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라이브 어 라이브가 보여준 모습에서 각 주인공이 만나는 최종장의 이야기가 빠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이드 퀘스트를 통해서 모든 주인공이 활약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보스 러쉬 형식에 가깝고 별도의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관에 관련된 단편적인 정보만이 제공되므로, 사실상 시나리오는 각 캐릭터의 이야기에서 끝을 맺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큰 줄기로 이어지는 카타르시스를 주지는 못하지만, 개별의 이야기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다.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이와 같은 구성과 마무리여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 합병 이전 스퀘어만 있던 시절의 '라이브 어 라이브' 에 가깝다.


옥토패스 트래블러, 이건 실험적인 게임이다.
신 포도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글이 아쉽다.

게임의 완성도만을 따지면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잘 만든 게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지문을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게임은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턴제임에도 독특한 호흡을 보여주는 전투, 긴장감과 더불어 쾌감을 주는 진동의 손맛, 매력적인 주인공과 연구하고 파고들 수 있는 시스템 등은 게임의 완성도를 한껏 높인다. 단순히 전투만 따로 떼어 놓고 봐도 이건 잘 만든 티가 난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다. 메인 퀘스트야 게임 내에서 목적지와 더빙을 지원하므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늘어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추론하고 직접 찾아야 하는 사이드 퀘스트에서 걸림돌이 생긴다. 사이드 퀘스트는 캐릭터의 특수 능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다수를 이룬다. 이 때문에 지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세계 곳곳을 탐색해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누굴 대상으로 훔치느냐에 따라 해결 방법이 달라지는 퀘스트도 있다. 일정 수준 정도만 되더라도 플레이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화가 됐다면 무난히 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 "요즘 믿을 만한 무법자를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를 거야"로 퀘스트 지문이 끝난다. 나보고 어쩌라고..

정리하면, 과거 스퀘어 게임들이 보여줬던 RPG들의 정수를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게임이다. 시나리오 면에서는 기대치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테지만 시스템 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패미컴으로 게이머에 입문했을 올드 게이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 요즘 시대에도 이런 아트웍과 비주얼을 원하는 수요층이 있음을 증명했다. 최근 일본에서 제작한 RPG 중에서는 최고의 완성도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겉보기에 시대착오적이었던 스퀘어 에닉스의 시도, 옥토패스 트래블러. 과거 JRPG의 황금기를 압축한 듯한 이 게임은 팬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로 기억될 듯싶다. 이래저래 플레이 타임을 다 합하면 60시간은 훌쩍 넘어갈 볼륨으로 말이다. 한국어화와 관련해서는 매우 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혹시나 찾아올 후속작에서 갈증이 해결되길 기다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