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니지의 혈맹(血盟)은 '혈판을 찍어 굳게 맹세함. 또는 그런 관계'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인(人)과 인의 관계, 더 나아가 의(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라는 뜻이 깊게 내포되어 있다. 비록 온라인에서 만난 관계지만,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정의가 있었다. 뜻이 맞는 군주를 친형처럼 따르며, 명분을 중요시하는 그런 집단이 바로 리니지의 혈맹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유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때 그 시절에는 마치 원탁의 기사라도 된 것처럼 혈맹에 충성하고 군주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요즘 젊은 게이머들은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그땐 그 나름대로 낭만과 무드가 있었다. 군주에게 예를 갖추며, 마치 기사 작위를 하사받는 듯한 느낌으로 혈맹에 가입하고, 군주의 말 한마디에 묵묵히 칼질하던 시절, 속된 말로 중2병 같았지만 그땐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재야의 인재가 된 것처럼, 유비 같은 군주와 혈맹을 원했고, 군주는 조운과 황충 같은 이들을 찾아다녔다.
남자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 모두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를 꿈꾸다
비록 온라인상에서의 관계, 따지고 보면 철저히 남남임에도 불구하고 혈맹에 많은 의미부여를 해가며 스스로 군신 관계를 자처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리니지가 첫 서비스를 시작하던 때가 1998년, 전성기라 불리며 많은 유저들이 리니지를 플레이했던 때가 2000년대 초중반이다. 당시 무협, 판타지 소설과 비디오, 영화 등이 유행하던 시기다. 이때 리니지를 즐겼던 많은 유저들은 혈맹의 군신 관계 속에서 아서왕 혹은 원탁의 기사를 꿈꾸며 리니지에 몰입했다. 무협과 판타지 혹은 삼국지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로그라이크 넷핵 기반으로 잘 짜인 리니지의 혈맹 시스템은 당시 린저씨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군주와 혈맹원의 군신관계. 왕좌에 오르고 성을 차지하기 위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단합해야 하는 리니지의 방향성은 남자들의 권력욕을 자극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저들은 울티마 온라인을 통해 이러한 향수와 경험을 간직하고 있을 시기였는데, 리니지의 혈맹 시스템이 남자들의 본능적인 욕구를 또다시 깊게 자극한 것이다.
매우 단순한 PvP, 허접했지만 무림의 은둔 고수와 싸우는 듯한 느낌이 물씬
시스템적으로 보면 당시 리니지는 울티마나 다옥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전투(PvP)만 놓고 보면 리니지가 결코 뒤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단순히 HP나 레벨 등 아무런 정보를 모른 채 오로지 칼을 섞어봐야만 상대의 강함을 알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불편한 시스템은 마치 무협 소설에서 재야, 은둔 고수와 싸우는 느낌을 줬다. 당시에는 F5(물약)만 누르며 칼질만 하는 게 끝이었고 오로지 장비 수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됐지만, 어느 한쪽이 죽거나 베르(귀환)하기 전까지는 쉽게 우위를 가릴 수 없었다.
요즘 게임처럼 개인의 피지컬과 컨트롤로 캐리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편한 것 투성이였지만 린저씨는 이러한 전투 시스템에 열광했다. 누구나 Ctrl 버튼만 누르고 칼질하면 똑같이 싸울 수 있었다. 단순하지만 나름대로 기본에 충실한 시스템이었다. 요즘 젊은 게이머에겐 컨트롤이 필요 없다며 허접해 보인다는 평을 받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의미 부여를 해가며 전투를 하는 재미가 있었다.
자연스레 만나는 혈맹, 소속감을 느끼며 중립으로 발전
리니지의 매우 단순한 전투 시스템은 혈맹 시스템과 궁합이 매우 좋았다. 무림의 은둔 고수와 싸우는 듯한 느낌을 줬기에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유저들도 구전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알릴 목적으로 PK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혈맹과 혈맹 전투(혈전 시스템)에서 용병으로 참전하여 유명세를 얻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유명세를 얻는 이유는 유명 혈맹에 스카우트되기 위함이다. 자신과 목적이 비슷하거나 많은 강자가 즐비한 혈맹에 가입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했다. 유명 혈맹에서 활약하고 더 큰 유명세를 얻어 D.K 혈맹의 장지롱이나 아키도라, 밀키스처럼 되길 원한 것이다. 유명 혈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강하거나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이들이 필요했다. 서로 필요에 따라 맺는 관계였지만 나중에는 중요한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평범한 유저들은 자연스레 만난 이들과 친해져 혈맹에 가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주의 레벨이 몇이든, 장비가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학창 시절의 반장처럼 혈맹원 사이의 가교 역할만 잘 맡아주면 됐다. 이렇게 화합한 단순 친목 혈맹이 몸짓이 더 커지면 중립 혈맹이란 칭호가 따라왔다. 좋든 싫든 수십 명의 인원이 함께하는 집단이고 혈맹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다른 세력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혈맹이 성장하고 커지는 과정에서 사소한 시비와 다툼이 발생한 건 필연적이다. 중립 혈맹끼리 적대 관계가 되어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립 혈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닌 자기 식구가 받은 부당함을 되돌려주고 사과를 받는 것이다. 또 자신이 속한 혈맹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사실 중립 혈맹 간 전쟁에서 어느 혈맹이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투 경험을 쌓고, 혈맹 내 더 끈끈한 정이 쌓이게 된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속한 혈맹의 강함을 뽐낼 목적으로 중립 전쟁만 즐기는 혈맹도 꽤 많았다.
혈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라인' 세력
친목이니 중립이니 해도 결국 모든 혈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이다. 왕좌에 오른 군주 머리 위에 표기되는 면류관은 군주가 리니지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혈맹원은 세금 분배라는 엄청난 보상을 위해 자신이 속한 혈맹의 군주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마치 원탁의 기사처럼. 비록 게임이지만 성을 차지했을 때 따라오는 부와 명예를 위해 성을 노렸다.
성을 차지한 혈맹은 본격적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다. 면류관을 쓴 군주가 곧 왕이고, 혈맹원은 왕국 기사단이 된다. 혈맹 내부에서 정해지고 배분된 부군주와 정예 기사, 수호 기사, 돌격 대장의 지위도 상승한다. 그리고 이들은 세금이라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받게 된다.
세금 맛을 본 군주와 혈맹은 그 혜택에 매료되어 왕좌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무수히 많은 혈맹이 도전해오기 때문에 단일 혈맹으로는 성을 지키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성 혈맹은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대가로 다른 혈맹과 동맹을 맺는다. 막대한 세금 일부를 분배해주며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철저한 비지니스 관계. 이렇게 성 혈맹을 중심으로 동맹 혈맹이 모이게 된 세력이 '라인'이 되며, 성 혈맹의 군주가 라인 전체를 통솔하는 '총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성을 차지한 혈맹은 자신이 속한 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세율을 올리기도 하고, 각종 보스 몬스터를 독식하기 위해 일반 유저와 중립 혈맹의 보스 몬스터 토벌을 제한하기도 한다. 권력 맛을 본 라인은 자연스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유저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버 내 '악'으로 승화한다.
라인의 욕심과 욕망의 끝은 사냥터 통제로 이어졌다. 아마 리니지 유저라면 알고 있을 데포로쥬 서버의 Dragon Knights 혈맹(이하 D.K)이 대표적이다. 당시 D.K 혈맹의 군주 전사의숨결은 적대 세력이 매우 많아 안정적으로 카오를 풀 수 있는 사냥터가 필요하단 명분으로 본던 5~7층을 수년간 통제했다. 통제 구역에 온 이들은 초보, 일반 유저할 것 없이 묻지마 PK로 접근을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레벨업의 선구자였던 포세이든(스피드 혈맹의 군주) 역시 주요 사냥터를 수년간 통제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유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시작된 '반왕'
일반 유저에게 있어 라인은 그저 기득권 세력일 뿐이다. 이들이 어떤 명분으로 세금을 올리고 사냥터를 통제하든 간에 그저 일반 유저를 괴롭히고 권리를 빼앗아 간 나쁜 녀석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계급 사회가 그대로 반영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유저들은 더 많이 분노했다. 일반 유저가 서민이라면 성 혈맹은 정치인이고 이 라인에 속한 다른 혈맹이 재벌인 셈이다.
반왕 세력이 탄력을 받는 시기는 라인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다. 참다못한 유저들이 스스로 봉기하여 라인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이러한 흐름에 군소 중립 혈맹이 봉기하여 라인에 맞선다. 통제 사냥터를 되찾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가 연일 이어지고, 더 나아가 라인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방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필드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반왕임을 자처하며, 일반 유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라인과 반왕이 싸우고 있으면 반왕에게 힐과 버프를 주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실 반왕은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원작에서도 그렇고 결코 의로운 세력이 아니다. 신일숙 작가의 원작 스토리상에서는 순수 혈통이 아닌 켄라우헬이 붉은 기사단의 압박으로 데포로쥬에게 왕관을 넘기고, 스스로 반왕임을 선포한다. 그리고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 흑마법과 악마와 손잡고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아덴 왕국의 통치자였던 데컨과 듀크데필, 그리고 데포로쥬까지 모두 이상적인 통치자였던 반면, 켄라우헬은 간웅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아주 사악한 악당이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 반왕이 갖는 이미지는 원작 스토리와는 정반대였다. 라인이 악이고, 반왕은 의로운 세력이었다. 반왕 역시 여러 혈맹이 모인 또 다른 라인이지만, 라인이란 표현 자체가 리니지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였기에 라인이라 불리는 것을 꺼렸다. 반왕으로 모인 이유가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함이었기에 대부분의 반왕 세력은 통제 중단, 세율 감소 등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유저들 역시 열렬한 지지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공한 반왕은 라인이 되고 또 다른 반왕이 등장, 무한 순환의 고리
많은 혈맹이 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성의 메리트 때문이다. 반왕도 마찬가지다. 사냥터 통제를 되돌리고, 세율을 낮추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이들이 원하는 실리는 결국 성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존의 라인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율을 높이지 않는다거나 더 이상의 통제는 없다고 말한다. 마치 총선 때의 정치 공약을 보는 것처럼.
대부분의 반왕이 라인의 부당함에 맞설 목적으로 모였다고는 하나 이들도 인간이다. 라인을 해체시키고 총군을 왕좌에서 끌어낸 후에는 반왕의 수장이 그 왕좌에 앉게 된다. 어찌 되었든 이들도 세금을 걷는 기득권 세력이 된 것이고, 좋든 싫든 새로운 '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세력이 성을 노리기 위해 '반왕'임을 자처하고 일어서게 된다. 상대적으로 반왕의 수가 적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비칠 수는 있지만, 결국 이러한 과정도 기득권 세력이 되기 위함이다.
허울 좋은 공약을 내세워 일반 유저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모인 반왕 세력이 결과적으로 거사를 성공한 사례는 매우 흔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궁극적인 목표는 성이다. 설사 세금에 관심이 없더라도 수백명이 모인 혈맹 내에서 탐욕스러운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을까.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다. 단 한 번의 잡음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 다들 초심론을 내세우며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공약해도 종국에는 기득권을 놓지 못한 채 변질되어 씁쓸한 말로를 맞이한다. 20년의 리니지 역사상 초심을 유지하며 일반 유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치했던 군주는 거의 없었다. 또 이러한 혈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데포로쥬 서버에서 통제를 창시한 D.K 혈맹에 맞서며 반왕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MAN 혈맹의 1대 군주 '쭈미오빠'는 "영원한 반왕은 없다"는 말과 함께 "결국 반왕도 라인이 되기 마련, 이럴 때마다 반왕임을 자처하는 혈맹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립에서 반왕, 반왕에서 라인이 되는 과정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 이미지 출처 : 리니지 공식 홈페이지(play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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