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었습니다. 매번 비슷한 게임을 봐 왔으니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발칙한 외도를 한 게임들을 즐기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게임들은 '잘 팔리는' 부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재미를 전달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아웃 오브 인덱스 2016 선정작 이야기입니다. 총 12개 게임이 선정되었습니다. 이중에서 저를 충격에 빠뜨린 게임을 모았습니다. 완성도가 너무 좋아서, 창의력이 놀라워서, 혹은 너무 무서워서 등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1. 레플리카(Replica) - 당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적용된 기술이나 게임 형태로만 본다면, 바로 뒤에 소개할 '라인 와블러(Line Wobbler)'가 더 참신합니다. 그런데 굳이 레플리카를 앞에 놓은 것은, 이 게임이 가진 메세지의 무게감 때문이에요.
플레이어는 주인 모를 휴대폰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그 휴대폰을 해킹해라. SNS든, 전화 내용이든 다 뒤져서 테러리즘의 증거를 찾아내라.'
이른바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휴대폰 주인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해킹한 SNS 어플의 대화를 읽으며 점점 여러 감정이 뒤섞이고, 스스로의 양심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정부에서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플레이어의 선택을 요구하기에 멈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담고 있는 메세지는 매우 입체적입니다. 전체주의, 사생활, 개인의 양심 등 논의할 소재가 다양합니다. 전 이중에서 플레이어의 양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해본 게임 중 이것 때문에 참 힘들었던(?) 게임이 '페이퍼 플리즈'였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임 화면은 플레이어의 손, 그리고 휴대폰 화면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 안에서 레플리카의 모든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평소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휴대폰과 완전히 똑같은 구조인 만큼, 위화감 없이 게임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스팀에 출시되었고 설정을 통해 한국어로 즐길 수 있습니다.
아, 개발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먼저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어쨌든, 아웃 오브 인덱스에서 개발자가 밝힌 엔딩 숫자는 총 12개입니다.
2. 라인 와블러(Line Wobbler) - "2D? 3D?..... 제가 만든 건 '1D' 게임입니다!"
"아,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이군."
현장에서 라인 와블러를 처음 보고 딱 든 생각이었어요. 그정도로 참신했습니다. 비디오 게임이 아니었어요. 화면이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저 LED 한 줄이 '게임기'입니다. 뭔가 요상하게 생긴 스프링 막대가 '컨트롤러'였고.
신기한 것은 저 한줄의 LED 안에 '스테이지', '몬스터', '공격', '함정' 등 던전 크롤러 게임의 특징이 모두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게임은 단순해요. 플레이어 쪽에 있는 녹색 점 하나를 반대편 끝까지 이동시키면 됩니다. 중간에 노란색 점이 일자로 늘어서 있는 '용암'이 있는데,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지나가야 합니다. 붉은색 점은 '몬스터'로, 컨트롤러를 좌우로 털듯이 흔들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동속도가 느려지는 구간, 반대로 빨라지는 구간도 있었는데 절묘한 '점'의 움직임 덕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스테이지 구성, 간단하지만 귀에 착착 감기는 레트로 사운드까지, '게임'이라고 부르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더 대단한 점은 저정도 참신한 게임이 나름대로 상업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점이에요. 대중적으로 보급하기엔 무리겠지만, 포켓볼이나 다트처럼 펍에서 한 잔 하며 친구들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어요. 아웃 오브 인덱스 운영진 중 한 명이 '맘 같아선 집에 가져가고 싶어요'라고 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담으로, 용암이 선으로 되어 있으니 2D 게임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요. 실제로는 LED 꼬마전구 여러개가 동시에 켜지는 구조입니다. 외국에서도 1D 게임으로 분류하고 있고, 저 역시 그에 동의합니다.
3. 코스믹 트립(Cosmic Trip) - "네? 이게 인디 게임이라고요?"
제가 행사장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2년 전에도 아웃 오브 인덱스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렇게 '정리된' 게임이 없었거든요. 참신한 발상의 요람이었지, 이런 귀티 나는 게임이 올 곳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코스믹 트립'은 현재 스팀 얼리억세스로 등록된 작품이고, '바이브'가 있어야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자원을 캐서 수비 병력 생산 및 타워를 건설하는 점은 RTS를, 외부 세력으로부터 기지를 방어하는 요소는 디펜스를 닮았습니다. 이게 말로 들으면 평범한데, 실제 플레이하는 걸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지더군요.
시스템이 참신한 것도 있지만, 제가 정말 놀랐던 이유는 '게임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였습니다. 인디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그래픽이나 사운드가 모두 최상급에 속했고, 조작감은 지금까지 해본 VR 게임들을 훌쩍 상회하는 수준이었어요. 특히 UI가 인상깊었습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게임 디자인의 일부분으로 잘 녹아 있었거든요.
장르적 특징을 다소 캐주얼하게 해석했기에 깊게 파고들 게임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개발진이 이를 역으로 노려서 '짧고 굵게'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대기업들이 가열찬 경쟁을 벌이고 있는 VR 게임 시장에서, 밀리지 않는 실력의 인디 게임사가 있다는 데 많이 놀랐습니다.
4. 스타이플(Stifled) - "왜 선밖에 없는데 무섭지?"
올해 아웃 오브 인덱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게임입니다. 가장 나중에 소개되었거든요. 저는 프레젠테이션을 먼저 보고, 이후 게임을 시연해봤는데... '아웃라스트'랑 비슷하게 무서웠습니다. 데모가 15분짜리였는데 10분 정도 하고 게임 껐어요.
플레이어는 의문의 사고를 당해 처음 보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그럼 이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런 젠장!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조명 비슷한 것조차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눈 앞에 보이는 낡은 폐공장 안을 수색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이 폐공장, 조금 이상합니다. 이 정도로 어두우면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하는데, 누군가 주변에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막한 어둠을 뚫고 갓난아기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스타이플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플레이어의 '귀'만 믿고 진행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정확히는 소리가 내는 파동으로 주변 지형을 파악한 후, 말 그대로 '기어가듯' 나아가야 하죠. 그런데 이 소리를 플레이어가 직접 내야 합니다. 마이크로폰에다 목소리를 내면, 게임에서 이를 인식해 주변에 파동을 퍼뜨립니다. 즉, 소리를 안 내면 다시 어두워집니다.
일단 귀에 이어폰이든 헤드폰이든 끼고 있어야 하는데다, 공포 게임이라는 장르 특성상 매우 높은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또, 그놈의 울음소리 내는 아기가 엄청 무섭게 생겼습니다. 저도 끝까지 안 해서 뭐라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노약자나 임산부는 그냥 안 하는 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