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모 개발사의 대표에게 뜬금없는 소개 메일을 하나 받았다. 주변에 능력있는 개발사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언질을 해두었던 터라 반가운 일이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소개 문구가 심상치 않다. '발군의 역량을 가진 회사'

단순히 소개를 위한 수식어일 수도 있지만, 함께 보내온 프로토타입의 영상을 보니 빈 말은 아니라는 느낌이 온다. 영상만으로 게임의 재미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허투루 만든 게임은 아닌 것 같다. 기본적인 디자인부터 전투 장면까지 곳곳에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더욱 좋은 점은 게임의 배경이 판타지가 아니라 무협이라는 점. 요즘에는 다소 고루하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성인 남성에게 무협이란 판타지 못지않게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물론 단서가 하나 달려있다. 제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영상은 마음에 들었으니 이제 진짜 게임을 구경해 볼 시간이다.



▲ 스카이피플의 박경재 대표



부랴부랴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설 때부터 범상치 않다. 처음 손님을 맞이하는 입구에는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도검 거치대에 칼 2자루가 장식되어 있고, 약간 어두운 느낌의 사무실 곳곳에는 게임 콘셉트 원화와 함께 태도나 소태도, 박도 등 동양의 검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무실 곳곳에 놓인 무기들도 인상깊었는데, 대표의 집무실에 들어가니 뭔가 딱 봐도 '난 심상치 않은 놈이요'라고 주장하는 듯 시린 날의 검이 걸려 있다. 영화에서나 보던 검이 눈 앞에 있으니 문득 호기심이 들었지만, 박경재 대표의 급한 목소리가 검으로 향하는 내 손을 만류한다. "진짜 검이니 손대지 마세요. 다칠수도 있습니다." 화들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검이라고?'

"워낙 게임하고 무협을 좋아하다보니 취미도 무기 수집이라서요. 사무실에 장식되어 있는 검들은 참고용으로 구입한 가검이나 진가검 - 날을 세우지 않은 검 - 이지만, 제 방에 있는 이 놈은 도검 소지 허가증이 필요한 진짜 검입니다. 도검을 관리하는 도구까지 제대로 갖춰놓고 있구요. 진짜같이 느껴지는 무협의 전투를 구현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태생적으로 폭력과 투쟁에 끌리게끔 만들어졌다. 문명 사회로 넘어오면서 본능은 이성 아래로 모습을 감췄지만, 표출할 기회를 찾는다면 언제라도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본능을 대리만족시켜줄 수 있는 격투기나 스포츠, 액션게임이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한 일.

검과 마법, 서양의 판타지는 재미있고 대중적이다. 그러나 좀 더 무거운 재미를 원하는 성인 남성들의 취향에는 가볍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은 유쾌한 추리극이지만, 때로는 폭력이 지배하는 신시티의 음험함에 끌린다. 그래서 비장미 넘치는 무협은 성인 남성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스카이피플 박경재 대표가 현재 만들고 있는 게임도 무협이다. 무협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 게임들이 매년 수십개씩 쏟아지다보니 '무협'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다소 옅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제대로 만든 - 진짜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솔깃할만한 콘텐츠와 분위기를 함께 갖춘 - 무협 게임은 거의 없다. 정말 찾기 힘들다.

▲ 콘셉트 원화. 실제 게임도 똑같이 구현되어 있다.


▲ 사무실 곳곳에 놓인 검들




박경재 대표가 만드는 게임의 목표는 무협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이다. 집무실에 진짜 검까지 갖추어놓을 정도로 팬을 자처하는 대표가 만든 게임이라면, 진짜 예상외의 물건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그냥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무공이나 문파 좀 나오고 동양적인 의복이 나온다고 무협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감독들, 예를 들어 장예모 감독의 영화를 보면 정말 서정적이고 조용한 가운데 비장미가 철철 넘쳐흐릅니다. 무협이라면 복수와 대립, 갈등 구조를 게이머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싯적에 기자 역시 무협이라면 꽤 좋아했다. 박경재 대표와 함께 재미있게 썰을 풀다보니 그의 독특한 이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13년 경력의 개발자기도 하지만, 무협을 너무 좋아해서 예전에는 직접 고무림(문피아)에 장르 소설을 연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에는 뭘해도 결국 주인공이 짱(?)먹는 먼치킨이나 읽기 쉬운 가벼운 무협이 인기라고 하죠? 저는 고무림 시절부터 무협을 좋아했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문파들이 나오면서 수많은 인연들이 얽히고 설키는 예전 스타일의 무협을 더 좋아합니다. 복수극과 혈투는 필수고, 사랑을 다루어도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같은 거. (웃음)"

무협 이야기만 했는데 한참 시간이 흘렀다. 정작 게임 이야기는 하나도 못했다. 한참 서로 웃고 떠든터라 이제 와서 게임 제목부터 물어보기에는 분위기가 좀 애매하지만 게임 기자의 본분은 찾아야겠다. 박경재 대표가 만들고 있는 게임은 어떤 게임일까?

"백발마녀전 혹시 보셨나요? 그런 느낌을 모티브로 한 무협 게임입니다. 영원히 서로 사랑하기로 맹세했지만 오해가 겹치면서 인연이 엇갈리고, 정파나 사파의 대결 구도가 끼어들면서 파국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물론 이 와중에 문파들끼리 서로 갈등이 벌어지고 하겠죠? 게임 제목도 그래서 '혈투' 입니다."

콘셉트는 알겠는데, 게이머들도 이제 뻔한 홍보성 멘트에는 안 속는다. 홍보 영상을 보여줘도 믿기 힘들다는 판에 몇마디 설명만으로 게임의 재미를 유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연 어떻게 무협이라는 재미를 모바일 게임으로 구현했을까? 중요한건 결국 게임이니까.

"일단 정파와 사파가 나뉘고 각기 다양한 문파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부하 및 무림 고수 등을 자신의 문파에 영입해서 진형을 짜게 되구요. 전투는 각 캐릭터의 인공지능에 따라 자동으로 진행되지만, 한꺼번에 10명(5 vs 5)의 전투가 벌어져서 실시간 대전 격투나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을 지켜보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전투를 보고만 있으면 재미없으니 필살기와 일섬 시스템을 통해 게이머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 입체감이 느껴지는 전투. 배경의 앞쪽과 뒤쪽에서 모두 전투가 벌어진다.


▲ 직접 뽑아본 진가검.


또 하나 강조되는 것은 실시간으로 오가는 유저들간의 갈등과 대립이다. 무협의 세계관에 따라 유저들이 소속된 문파들의 대결 및 서열 구도를 자연스럽게 유도해서 온라인 게임 못지않은 커뮤니티와 재미를 구현할 예정이다. 박경재 대표의 말에 의하면 채팅만 봐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구파일방같은 유명한 문파들도 있고 마교나 모용세가 등 많습니다. 물론 정파와 사파의 대립이 주요 콘텐츠지만 내부의 갈등도 존재하구요. 각 문파의 근거지가 실제 세계 지도에 있는데, 계속 밀리면 근거지까지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변화들이 게이머들의 주도 하에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같은 공간에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사건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 중요합니다. 또 자기 캐릭터가 확실히 제압하고 제압당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쾌감과 복수심이, 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쩔어줍니다. 유저분들이 게임에 딱 들어갔을때 채팅창에 서로 오가는 말싸움만 봐도 '아 이 게임이 뭔가 재미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려고 합니다."


실제같은 무협 속의 전투와 문파전을 구현하기 위해 도입된 부분은 또 있다. 캐릭터는 2D지만, 게임속의 배경은 다단계의 3D로 구현되어 있어 좀 더 깊이가 느껴지는 전투를 구현했다. 또한 전투 중 사기(Morale)에 따라 문파 구성원들의 행동에도 다양한 변화가 오고 간다.

"배경이 3D이기 때문에 평면같지만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한꺼번에 입체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마치 무대 위의 연극을 보는 듯한 입체감을 주게 되죠. 덕분에 고요한 호수나 대나무 숲 등 서정적인 무협의 배경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전투도 사기에 따라 변화가 생깁니다. 싸우다가 사기가 떨어지면 문파원이 도망간다던가 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구요. 그러면 무협의 추격전같은 느낌이 되겠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퇴각 불가 명령을 내릴수도 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도 문파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옥쇄를 각오하고 싸우는거죠. 이렇게 곳곳에 무협의 맛과 갈등을 위한 장치들이 숨어 있습니다."


한참 유창하게 전투를 설명하다 말고 박경재 대표가 잠시 머뭇거린다. 그가 설명을 멈춘 곳은 게임의 핵심 중 하나인 '일섬 시스템.' 어떤 부분을 망설이는 것인지 물어보자, 생각치 못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심의" 였다.

"애초에 무협을 좋아하는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만든 게임이다보니 표현의 수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섬(一閃)은 번쩍임이라는 뜻이지만, 보통 게임쪽에서는 단칼에 베어버린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상대의 약점을 찾아 단번에 베어버린다는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서 피가 튀는 것은 물론이고 절단같은 표현까지 넣었던 적이 있습니다. 무협에서는 외팔이 검객도 종종 나오니까요.

게이머가 일섬에 딱 성공하면 화면이 확대되면서 잠깐 멈추고 '쉬익~'하는 칼소리와 함께 상대방을 단 칼에 베어버리는거죠. 그런데 만들고보니 심의가... (웃음) 그래서 하드코어한 표현들은 전부 삭제했습니다. 원래 전투 중에 화면에 피가 튀는 식으로 무협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장치들이 많았는데 모조리 빠졌어요. 표현의 제약이 덜한 해외에 진출한다면 그때는 제대로 구현해볼 생각입니다."



▲ 주인공 '인랑'


예민하지만 절대 놓칠 수 없는 질문, 게임 속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과금도 치열해진다. 경쟁이 메인 콘텐츠인 게임에서 과금 밸런스는 게임 전체의 재미와 맞먹을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 가장 실패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비즈니스 모델(BM)이다.

"라펠즈라고 해외에서 오랫동안 많은 인기를 얻은 온라인 게임이 있는데, 홍정기 이사님이라고 당시 BM의 구현에 참여했던 전문가 분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희가 함께하고 있는 액토즈 소프트 내부에서 과금 밸런스를 따로 담당해주시는 분들에게 레벨 디자인이나 세밀한 수치까지 기록된 1기가가 넘는 문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문가 분들의 조언은 충분히 받았죠.

다만 장점인지 단점인지... 스카이피플은 스타트업이라서 인원 규모가 작고, 과금 부분을 너무 고도화하게 되면 저희가 대처할 수 없는 부분까지 구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적용할 예정이고, 운영 부분 역시 저희가 끝까지 붙잡고 있을 생각입니다. 유저분들께서 과금으로 실망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처음 스카이피플을 소개받을때 발군의 역량을 갖춘 잠룡같은 회사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게임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된다. 스스로를 알리기 위한 노력은 투박할지 몰라도, 게임을 만들어내는 실력은 여느 유명 회사 못지 않다. 언제쯤 이 게임을 만나볼 수 있을까?

"저도 게임 개발을 13년 넘게 했지만 공동대표인 권준호님은 디자인 경력만 25년이 넘는 1세대 개발자입니다. 스카이피플의 다른 분들도 대부분 10년 이상인 중견이에요. 아무리 돈이 된다고 해도 퍼즐이나 러닝같은 캐주얼 게임을 만들기는 좀 그렇더군요. 캐주얼 장르 자체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저희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장르는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과 동남아 등 꽤 여러 국가에서 게임을 개발해봤는데, 결국 결론은 그 장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맞는 개발자들이 뭉치면 모바일에서도 충분히 시장에 통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빠르면 내년 상반기가 될텐데 무협의 팬 분들 그리고 치열한 전쟁의 재미를 기다리는 게이머 분들은 저희 스카이피플의 '혈투'를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진짜 무협의 재미가 살아있는 게임, 혈투! 꼭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