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월드오브워쉽을 좀 안다. 서버 이관 당시 계정 옮기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공들여 키운 10티어 함선들이 줄줄이 날아가는 눈물겨운 사건(덤으로 옆 동네 탱크들도 다 증발했다)을 겪으며 의기가 꺾였지만,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배를 몰았다. 탱크는 너무 많이 날아가는 바람에 내상을 심하게 입어 할 수 없었지만 바다는 날 치료해줬다.

하지만, '잘 안다'가 아닌, '좀 안다'인 이유는, 직업 특성 상 다른 게임도 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월드오브워쉽은 간혹 이벤트나 콜라보가 있거나, 새로운 함선 트리가 나와 궁금할 때, 가끔 바다가 보고싶을 때 한 번씩 켜는 게임 정도로는 조금씩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가 떨어졌다.

"너가 월드오브워쉽 좀 하는거로 아는데, 이번에 새로 콜라보 한다니까 한번 해 보려무나"

그렇게, 무엇과 콜라보하는지도 채 모른 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디테일을 전달받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려, '블루아카이브'와의 콜라보. 넥슨게임즈가 개발하고,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인터넷 밈을 만들어낸 서브컬쳐계의 리빙 레전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난 블루아카이브를 하나도 모른다.

▲ 진짜? 모름?

그렇게, '블루아카이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점에서의 월드오브워쉽 블루아카이브 콜라보 체험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벽람항로때도 몰라서 헤맸는데 또 헤멜 처지... 체험용 계정(한시적 사용)은 워게이밍이 지원해 주었다.


함선... 함선을 보자
칙칙한 배들 속 유독 빛나는 녀석들

게임을 켜고, 로비에 접속하니 무려 600척이 넘는 함선이 나를 반긴다. 워게이밍이 제공한 체험용 한시 계정인데, 내가 무얼 체험할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전부 다 넣어준 것 같았다. 스무 척 남짓 들어 있는 내 계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족함. 일일 첫 승만 따도 하루가 부족할 분량이다.

그 사이, 앞에 'BA'라는 코드를 달고 있는 세 척의 함선이 있다. 미국 10티어 전함 '몬태나', 독일의 8티어 프리미엄 전함 '티르피츠', 그리고 일본의 9티어 순양함 '타카하시'가 그 주인공이다. 게다가, 세 척의 배에 다 처음 보는 상큼한 일러스트의 함장들도 함께 타고 있다. 보통 워쉽의 함장들은 하나같이 근엄 진지한 표정의 중년 아저씨들이고, 콜라보레이션 정도 해야 신선한 얼굴이 나오기에 대충 그럴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그렇다.

문제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 친구들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것. 21세기를 사는 지성인답게 단톡방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먼저, '몬태나'를 모는 '타카나시 호시노'라는 친구. 한쪽 눈 색이 다른걸 보니 홍채 세포의 DNA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으헤 아저씨"

▲ 함선 생김새는 몬태나 그대로다. 차이점이라면 핑크빛 도색과 뒤편에 떠있는 헤일로(이것도 물어보고 알았음)

두 번째 함선은 '티르피츠'. 티르피츠는 개인적으로 꽤 익숙한 함선인데, 서비스 초기 그럭저럭 쓸만한 고티어 전함이었기 때문에 아주 죽자고 굴렸다. 아마 티르피츠만 1천 판을 넘기지 않았나 싶다. 티르피츠의 함장은 '이자요이 노노미'라는 친구인데 역시 초면인지라 또 집단 지성의 힘을 구했다.

▲ 기사에 올릴거라 하자 황급한 모자이크 요청이 쏟아졌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마흔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다.

▲ 흉부가 돋보이고 돈이 많은 함장이 타는 티르피츠. 형광 라임색이 돋보인다.
주포 화력은 좀 답답하지만 포탑이 겁나게 빨리 돌기에 움직이면서 쓰기 좋은 배다.

마지막 주자는 일본의 9티어 순양함인 '타카하시'다. 개인적으로는 꽤 낯선 함선인데, 개인 계정으로 게임을 플레이할때 일본의 배는 아예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딱히 일본이라서 안 키운 건 아니고 그냥 다른 나라 함선들이 더 마음을 울렸다. 게다가 유일하게 키운 순양함 트리도 미국 중순양함 트리(디모인으로 마무리되는)였기에 운영 상 완전히 다른 일본 경순 트리는 만져본적도 없다. 그렇지만, 체험은 해 봐야 하니 일단 함장님부터 봤다.

▲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가 모는 타카하시

▲ 게임 내에서 몇 번 못 본 함선이라 딱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두 척에 비하면 컬러링도 좀 심심한 느낌


함장님 실전 뛰실 시간입니다
뭐라고 막 말하는데 일본어라 모르겠다

격납고 구경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직접 한 판씩 게임을 돌려 보기로 했다. 구경과 역순으로 가장 먼저 몰아본 배는 '타카하시', 익숙한 함선이 아닌 만큼 그냥 중간만 가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웬걸, 아군이 너무 맹활약을 하는 바람에 뭔가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게임이 끝나 버렸다.

▲ 아니 내가 뭐 하기도 전에 끝났네

▲ 명징하게 직조해낸 케이블들과 이동진씨 깃발이 눈에 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함장들의 음성과 배경 음악이 전부 바뀐다는 것. 원래같으면 중후한 한국어로 게이머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할 함장이 캐릭터에 맞게 일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배경음악도 뭔지 모르지만, 여튼 신나는걸 보니 아마 블루아카이브에 나온 BGM이 아닐까 싶다. 사실 잘 모르겠다.

문제는, 일음을 들어도 내가 일본어 문외한인지라 뭐라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제대로 알아들은 건 '센세'밖에 없었다. 어차피 게임 내 상황은 다른 방법으로도 표기가 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지만, 한창 줌 당기고 사격하다 풀었더니 배가 불타고 있어서 당황하긴 했다. 한국어였으면 바로 불 껐을텐데 에잉.

▲ 후 그래 이게 내 배지

두 번째로 몰아볼 함선은 '티르피츠'. 수없이 탔던 배인지라, 도색이 바뀌었음에도 거부감따위 없다. 대구경 포탄을 자랑하는 함장과도 초면이지만 뭔가 내적 친밀감이 더해진다. 아마 티르피츠를 타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배는 숨은 무기가 있다. 양측에 위치한 작고 귀여운 어뢰 발사관. 비록 바닷속 핵폭탄이라 할 수 있는 전문 어뢰쟁이들에는 못 비비지만 전함끼리 붙어 싸우는 극히 드문 상황에서 조커 카드로 꺼내들 수 있다.

이 친구 또한, 목소리가 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를 모르는 나에게는 그냥 간지러운 음성으로만 들리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내가 전함이라는 거니까. 전략적 사고는 순양함들이나 하는거지, 전탄발사맛에 중독된 전함맨들은 스스로의 강함에 취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나도 나에게 취한 채 선두돌파를 시도했다.

▲ 아.

▲ 사요나라

제일 먼저 격납고로 사출당한 티르피츠를 잠시 잊고 다음 배에 올랐다. "으헤 아저씨"가 타는 '몬태나'. 몬태나 또한 나름 익숙한 배인데, 몬태나를 자주 몰지는 않았지만 바로 전 티어인 '아이오와'가 내 주력 함정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2012년도 영화인 '배틀쉽'을 본 이후 아이오와급 함선에 정신이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에 티어업을 하고도 아이오와급만 죽어라 탔다.

어쨌거나, 객관적으로 볼 때 '몬태나'는 꽤 훌륭한 함선이다. 관통력은 부족하지만 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12문 포배열도 그렇고, 고각포라 포각도 잘 나오는데다 갑판 위쪽을 노리기도 좋다. 이번엔 취하지 않았다. 모범 전함처럼 뒤에서 화력 지원 하다가 앞 라인 정리되면 들어가야지

▲ 아이오와에 비해 살짝 통통해져 귀여운 몬태나. 함선 옆에 뭐라 쓰여 있는데...

▲ 특목고 못 간 친구들이 가는 학교 이름이었다.

몬태나 역시, 함장님이 바뀐 만큼 목소리가 바뀌었다. 물론, 격납고에서 일반 함장으로 교체하면 다시 엄격, 근엄, 진지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할 테지만, 저런 도색의 함선을 탄다면 말리고 싶다. 옆구리에 고등학교 이름을 박은 배에 중년 아저씨 함장은 좀 그렇다. 당연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들었다. 중간중간 '산큐'라고 하길래 고유명사인가 했는데 고맙다는 뜻이었다. 아 땡큐...

▲ 전함은 이 맛에 탄다. 격침시킬때마다 양갈래 함장님이 뭐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지만 귀여우니 됐다.

▲ 아 너무 좋아용~

이렇게, 콜라보로 추가되는 함장들과 안면도 트고, 배도 한 번씩 몰아 봤다. 엄밀히 말하면, 게임 플레이가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순항시엔 배가 보이니 보는 맛이 살지만, 포격전에 들어가면 좀처럼 볼 일이 없다.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 거다. 줌 당기고 리드샷 재고 있으면 1인칭이라는 것...

이 빈틈을 채워주는게 보이스 액팅이다. 엄격, 근엄, 진지의 삼박자가 어우러진 레귤러 함장이 아닌, 듣기만 해도 귀가 간질간질한 목소리들이 마구 흘러나오는데, 신선하면서도 새롭다. 물론, 일본어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들었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 더 즐겁지 않았을까?

월드오브워쉽과 블루아카이브를 전부 플레이할 만큼 수비 반경이 넓은 기자가 없었기에, 그나마 워쉽을 아는 내가 체험했지만, 중간부터는 그냥 배 몰 줄 몰라도 블루아카이브를 아는 기자를 투입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 봤다. 굴삭기 기사들을 우주비행 훈련시켜 보내는 영화 '아마겟돈'을 보면 늘 '그냥 우주비행사들을 굴삭 훈련시키는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비슷한 딜레마를 느꼈다.

여튼, 2D 멀미에, 미소녀 울렁증, 서브컬쳐 알러지를 지닌 나로서는 매우 희귀하면서도 독특한 경험이었다. 관련 행사를 한 번 다녀오면 족히 몇 시간은 정신적 피로로 앓아눕는 편향된 취향의 소유자임에도 어지러움보단 신선함이, 울렁거림보단 독특함이 더 좋았던 경험이었던 것 같다. 만약 개인 계정에 저 배가 생긴다 해도 계속 몰 수는 있을 것 같다. 물론 친구들과 같이 하게 되면 고이 접어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