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몇년 전만해도 비웃었겠지만, 이제는 "게임은 장비 빨"이라는 얘기에 대부분 수긍을 하는 분위기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라던가 내게 익숙한 것이 최고라는 의견도 있지만 점점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혹은 숫자로 표현되는 게이밍 장비의 사양과 후기는 너무나도 달콤하다. "저 연예인 화장품 뭐 쓴대?"처럼 "저 선수 마우스 뭐야?"가 통용, 아니 콘텐츠가 되는 시대가 됐다.
다만 개인적으로 슬픈 얘기가 있다. 키보드, 마우스, 헤드셋을 일컬어 키마헤라 부르는데 이 삼인방 중 마지막, 그것도 수년 전 인정을 받은 두 형제들과 다르게 키보드는 이제야 가치가 증명되고 있다.
인정은 하겠다. 마우스는 무선과 DPI를 지나 초경량화까지 이르렀고, 헤드셋은 입체 음향으로 적의 발자국 소리가 나는 방향을 추격할 수 있다는데, 키보드만큼은 강력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키 압력이 너무 가벼우면 손만 스쳐도 눌려서 불편하고, 무거우면 오히려 피로도가 상당하다.
이런 오명은 마그네틱축(자석축) 키보드의 등장으로 말끔히 씻겼다. 마그네틱축이란 쉽게 얘기해서 자기장을 사용하는 무접점 방식의 키보드 스위치인데, 이론을 설명하면 오히려 복잡하고 키보드가 눌리는 입력 지점을 설정할 수 있는 스위치라고 설명하는 편이 훨씬 쉽겠다.
스위치의 입력 지점의 값이 낮으면 살짝만 눌러도 입력이 된다. 거꾸로 입력 지점의 값이 높으면 눌러야 할 길이가 길어짐에 따라 깊게 눌러야 입력이 된다. 일반적인 키보드의 경우 이 값이 물리적으로 정해져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마그네틱축의 경우 이 입력 지점을 소프트웨어 단에서 지정할 수 있다. 덕분에 사용자의 타건 습관 혹은 상황에 따라 입맛대로 설정할 수 있다.
마그네틱축의 많은 장점들이 존재하지만 후술하고, 더 재밌는 얘기가 있다. 키보드도 투자하면 게임에 영향을 줄 만큼의 혁명을 가져온 마그네틱축의 특징들을 2019년부터 표방해온 브랜드가 있다. 바로 스틸시리즈(SteelSeries)다.
옴니포인트 스위치 3.0을 탑재한 래피드 트리거 키보드
스틸시리즈에서 이번에 선보인 '스틸시리즈 Apex Pro Gen3'은 앞서 언급한, 요즘 유행하는 마그네틱축의 래피드 트리거 키보드다. 래피드 트리거는 키보드의 입력이 끊기는 지점과 다시 입력되는 지점을 소프트웨어 단에서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사실 스틸시리즈에서는 자사의 키보드 라인업 Apex를 통해 소프트웨어 단에서 입력 지점 설정이 가능한 자사의 옴니포인트 스위치(OmniPoint Switch)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1.0버전에서는 앞서 언급한 입력 지점 설정이 가능했다. 2.0버전에서는 입력 지점 2개를 갖고 얕게 눌렀을 때와 깊게 눌렀을 때의 입력 값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2-in-1 키 입력 기능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번 옴니포인트 스위치 3.0에서는 래피드 트리거 기능을 완벽히 지원한다.
래피드 트리거 기능이 게임에서 중요한 이유는 입력 지점과 리셋 지점이 정해져있어, 한 번의 키 입력 후 정해진 리셋 지점까지 손을 떼어줘야 재입력이 가능한 일반적인 스위치와는 다르게 래피드 트리거 기능을 지원하는 마그네틱축의 경우 입력 지점과 리셋 지점을 동일하게 설정할 수 있어 손에 힘을 빼서 조금이라도 입력 지점을 벗어날 경우 키 입력이 멈춘다.
키 입력이 멈춘다는 것, 단순해 보여도 일반 스위치와의 차별점은 어마 무시하다. 직접 체험한다면 수십 년간 우리는 키보드의 리셋 지점에게 길들여져 이 물리적 딜레이에 적응하고 살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또 하나, 입력 지점의 설정에 따라 손을 올려만 놔도 같은 키를 연타하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제품 사진
Gen 3답게 더 개선된 점은?
스틸시리즈 Apex Pro Gen3는 글로벌 게이밍기어 전문 브랜드의 대표적인 키보드 라인업답게 탑재된 부가 기능들도 굉장히 유용했다.
대표적으로는 '프로텍션 모드(Protection Mode)'가 있겠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실수로 점멸이 나가는 경우, 한번은 겪어봤을 것이다. 이는 키의 입력 지점을 작게 설정할 경우 정말 농담이 아니고 손만 스쳐도 눌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 프로텍션 모드가 유용하다.
이론은 간단하다. F에 점멸을 두고 F 키에 프로텍션 모드를 적용할 경우, F와 인접한 E, R, T, G, V, C, D 중 하나를 누르다가 실수로 F 키를 스치거나 살짝 눌릴 것을 대비하여 순간 F 키의 입력 지점을 높인다. 해당 기능에는 앞서 언급한 F 키처럼 보호된 키의 입력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감지하는 로직이 내장되어 있다.
또 하나, 스틸시리즈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게임별 프로필을 저장할 수 있는 'GG QuickSet' 또한 유용하다. 이는 게임별로 사전 키보드 세팅을 제공하여 입력 감도부터 시작하여 래피드 트리거, 프로텍션 모드, RGB 조명 등을 해당 게임 실행 시 자동으로 적용해 준다. WASD가 중요한 발로란트와 QWERDF가 중요한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키보드 설정이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밖에 기존 Apex 키보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들도 모두 적용되어 있다. 옴니포인트 스위치 2.0을 통해 도입된 2-in-1 액션 키 기능을 통해 같은 키를 눌러도 살짝 눌렀을 때와 깊게 눌렀을 때의 입력 값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 대표적이다. 키보드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OLED 디스플레이 또한 건재하다. 여전히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PBT 재질의 키캡을 탑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타건감
예전부터 Apex 라인업의 키보드를 많이 만져봤으며, 평소에 워낙 키보드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엄청나게 자극적이지 않았는데, 너무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개선된 타건감.
스틸시리즈 Apex Pro Gen3는 마그네틱축의 키보드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즐거운 타건감을 선사한다. 조금 깊게 얘기하자면 내가 황축에게 실망을 정말 많이 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황축의 타건감을 여기서 느껴볼 줄은 몰랐다.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기존의 Apex 키보드들은 타건감을 위해 구입하는 제품은 아니었다.
타건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이번에 반대로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는데, 바로 하단 모디열을 포함한 타이핑 61개의 스위치만 옴니포인트 스위치 3.0이 적용되어 있다는 부분. 방향 키를 누르거나, 특히 ESC를 누를 때 탄력 없는 타건감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게임할 땐 큰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제품이 마음에 들어서 일할 때 그게 좀 아쉬웠다.
마치며
혜성처럼 등장한 마그네틱축 키보드 열풍. 마그네틱축 키보드를 쓰는 이유가 2019년에 등장한 스틸시리즈의 옴니포인트 스위치와 결이 같기에 제품을 체험하고 기사를 쓰면서 신기하기도, 소름이 돋기도 했다. 스틸시리즈는 차세대 키보드는 이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스틸시리즈 Apex Pro Gen3는 게이머의 취향과 기호에 맞게 한글 각인 혹은 영문 각인, 그리고 텐키리스(TKL) 버전과 풀배열 버전 모두를 지원하고 있다. 아직은 국내 공식 판매되고 있지 않지만, 미니 버전(포커 배열)도 나올 것 같은데 그때까지 지갑 단속을 잘 하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