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형인 매스 이펙트가 고꾸라지고, 야심 차게 준비한 막내도 쓰러지니, 바이오웨어는 2014년 최고의 게임으로 평가받은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의 후속작을 준비했습니다. 바이오웨어의 잘생긴 둘째 형은 다시금 RPG 제작의 명가라는 위상을 되찾아놓을 수 있을까요? 오늘 리뷰할 게임은 드래곤 에이지: 더 베일가드입니다.
게임명: 드래곤 에이지: 더 베일가드
장르명: RPG
출시일: 2024. 11. 01.
리뷰판: 정식 출시 버전개발사: 바이오웨어
서비스: EA
플랫폼: PC, PlayStation 5, XBOX X|S
플레이: PC
베일을 벗은 베일가드
액션에 힘을 강하게 실었다
드래곤 에이지의 네 번째 작품인 베일가드는 테다스 대륙의 북부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플레이어는 '루크'라는 주인공을 통해 모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루크'는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이었던 베릭에게 고대 신 '솔라스'의 의식을 방해하기 위한 파티원으로 발탁되었으나, 베릭이 부상을 입고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자, 세상을 구하기 위한 조촐한 파티의 리더가 됩니다.
베일가드가 전작과 가장 달라진 부분은 캐릭터의 전투와 관련된 부분일 겁니다. 전작들도 액션성이 포함된 RPG라고 할 수 있겠으나, 베일가드는 보다 더 액션 게임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스킬을 쓸 때를 제외하면, 전투에서 정지된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점프나 구르기, 상대방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서 막거나 피하는 요소들도 있습니다. 오리진이 전술적 접근 위주, 인퀴지션이 거기에 약간의 액션을 섞었다면, 베일가드는 실시간 전투에 큰 힘을 실었습니다.
베일가드의 전투는 충분히 재밌습니다. 점프, 회피, 경공격, 강공격이 기본에, 공격 버튼을 꾹 누르고 있으면 나가는 충전 공격, 공중에서 사용하는 낙하 공격, 구르기 후 대시 공격 등 진짜 액션 게임에 가까운 프리셋을 쉽게 활용 가능합니다. 여기에 물리 방어막, 마법 방어막을 가진 상대에 따라 어떤 공격을 사용할지 선택해야 하는 고민, 동료들의 스킬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등을 실시간 전투에 잘 녹여서 빠르고 화려한 액션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루크'는 전사, 도적, 마법사를 선택할 수 있고, 직업마다 또 다른 3가지 전문 분야가 존재해서, 꽤 다각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깊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드 토스에 특화된 캐릭터라든지, 무력화가 강력한 캐릭터라든지, 이런 플레이어가 원하는 특화성을 캐릭터에 부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게임 중반까지는 이런 캐릭터의 액션을 보는 것이나, 성장하는 것, 장비를 파밍하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우나, 캐릭터 빌드가 완성되는 중후반부부터는 베일가드 액션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주인공 1인을 활용한 액션성이 전부이기 때문인데요. 쓰는 스킬도 같고, 해야하는 전술적 행동도 같고, 몬스터를 처치하면 얻는 보상도 같은 전투가 20시간 이상 이어지면서, 초반에 받았던 흥미로움은 빠르게 식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동료들의 전투 상호 작용이 아주 적다는 부분에서도 오는 단점입니다. 루크와 동료2명으로 구성되는 파티에서 동료 두 명은 체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위험한 동료를 치료한다거나, 전방이나 후방으로 배치시킨다거나 하는 전술적 선택지가 없습니다. 동료가 전투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그저, 어떤 적을 공격하고, 쿨타임이 올 때마다 세 개의 스킬 중 어떤 스킬을 사용할지 고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루크, 잘했어', '엄청난 공격이었어'라고 칭찬하는 것밖에 없죠.
아름다운 테다스 대륙의 풍경
선형적이고 전체적으로 쾌적하지만
드래곤 에이지: 더 베일가드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테다스 대륙의 풍경을 아름답게 표현한 방식입니다. 베일가드에서 테다스 대륙의 북쪽, 테빈터, 안더펠, 네바라, 안티바, 리베인 등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숲 사이 고고하게 떠있는 엘프 유적이라든지, 반짝반짝 빛나는 밤의 도시 등 구경만 해도 재미있는 지역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최근 AAA게임들이 신경을 덜 쓰는 듯 보이는 그래픽 최적화도 상당히 잘 되어있는 편이었습니다. FHD, GTX 3070의 높음 옵션으로 60프레임 이상을 전투 중일 때나, 아닐 때나 계속 유지하면서 게임할 수 있었습니다.
베일가드의 월드는 선형적입니다. 오픈 월드 구성이 아니라, 가야 할 길, 갈 수 있는 길, 못 가는 길이 정확히 정해져 있는, 그리고 순서에 따라 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벽에 막혀 가지 못하는 길은, 반드시 다음 동료를 영입하면 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고, 무언가 구슬을 넣어야 하는 문이 존재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퀘스트 중 어떤 것을 해결해야 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선형적인 퀘스트 라인, 월드 구성이 나쁘다고 느껴진 것은 아닙니다만, 스스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고, 때로는 길을 헤메기도 하면서 주위 풍경에 넋이 나가는 경험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험하는 재미를 소소하게 방해하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로딩 시간입니다. 게임을 켜고 플레이를 할 때까지의 로딩이 아니고, 게임 화면에서 맵을 켜거나, 장비를 교체하기 위해 메뉴를 불러오는 과정의 검은 화면을 보는 시간이 꽤 깁니다. 처음에는 그리 신경쓰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백번 이상 메뉴 화면을 불러와야 하는데, 이런 사소한 불편함이 불쾌함으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게임이 튕기는 크래시나, 어느 지역에서만 떨어지는 프레임 이슈, 자막 오타, 오디오 글리치, NPC의 대화가 끊기거나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는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버그도 있었습니다.
베일가드의 단점
동료, 세력의 이야기
베일가드의 이야기는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구성과 같습니다.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동료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고, 팩션, 즉 다양한 세력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영향력을 얻은 뒤에, 최종장에서 나와 그들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성은 바이오웨어가 아주 잘하는 분야입니다. 예전 드래곤 에이지도 그랬고, 매스 이펙트도 그랬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서양 RPG가 이런 스토리를 따라갑니다. JRPG의 왕도가 용사가 전설의 검을 뽑아서 마왕을 물리치는 거라면, 서양 RPG의 왕도는 이런 팩션과 동료들의 힘으로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이죠.
그런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요? 당연히 나와 같이 세상을 구할 동료와 세력에게 충분한 서사가 주어지는 것이겠죠. 그들을 내가 얼마나 애착하느냐에 따라,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등장할 때 드라마틱함이 갈리니까요. 베일가드의 동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외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들과 나와의 이야기가 굉장히 평평하게 느껴집니다. 예를들면, 베일점퍼 소속인 여성 메이지 벨라라와 인퀴지션 소속 드워프 로그 하딩은 게임에서 거의 비슷하게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퀘스트 라인 또한 흥미롭지 않습니다. 그나마 안티바의 까마귀인 루카니스가 그 캐릭터만의 매력과 서사를 조금이나마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당초 동료들과의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아이언맨은 3편까지 나왔고, 스파이더 맨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도 장편 시리즈를 만들면서 서사를 쌓았건만, 베일가드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동료들의 이야기가 깊이 있지도 않고, 길지도 않아 아쉬웠습니다.
세력들의 묘사도 아쉽습니다. 그레이 워든은 그저 다크 스폰과 싸우는 기사 집단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해 충분히 묘사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일 점퍼나 심연의 감시자, 부의 군주같은 세력도 그들이 가진 저마다의 문화와 매력에 대해 풀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많은 것 같지만, 게임에서 충분히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가장 아쉬운 인물은 부의 군주 동료인 타쉬입니다. 그리고 이 타쉬는 바이오웨어가 DEI,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과 관련해 베일가드에서 표현하고 싶은 핵심입니다. 타쉬는 쿠나리 종족이고,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논 바이너리라고 합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얘기합니다. 타쉬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전부터 남들이 자신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이 타쉬라는 캐릭터로 플레이어에게 다양성을 얘기하는 방법이 다소 교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이오웨어는 아주 예전부터 다양성에 대한 중요함을 게임에 넣는 회사였습니다. 드래곤 에이지 뿐만이 아니라, 매스이펙트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베일가드처럼 캐릭터의 등장부터 정체성을 '루크'부터 모니터 밖에 있는 플레이어에게 지지해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는 없었습니다. 이 캐릭터가 있어서 이 베일가드라는 게임의 게임성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느끼진 않았지만, 먼저 말했듯 어벤저스식 구성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클라이막스에 가서 게임성으로 일부 치환되는게 필수입니다. 아이언 맨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닥터 스트레인지에 대한 서사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그리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타쉬가 더 아쉽습니다. 타쉬가 느끼는 혼란은 비단 성정체성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쿠나리의 전통과 리베인의 문화에 대한 혼란도 가지고 있고요, 자신이 입에서 불을 뿜거나,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다른 쿠나리들과 종적으로 뭔가 다르다는 거에 대한 혼란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크고 듬직하지만, 마음속은 아주 복잡한 사춘기 청소년같은 캐릭터에 대한 세심한 이야기적 터치가 있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을겁니다. 베일가드의 세상에 살고 있는 타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중요함을 얘기하기 위해 밖에서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 이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고 애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에 대한 얕고 매력적이지 않은 서사는, 게임의 분위기 역시 가벼운 쪽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드래곤 에이지 프랜차이즈의 다크 판타지적 분위기는 이번 베일가드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리진에서 그레이 워든의 입단 의식을 거부한다고 단칼에 죽여버리거나, 2의 리안드라 호크의 이야기처럼 끔찍하고 가슴 먹먹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게임 플레이 자체도 액션성이 강조되기도 했고, 이야기 톤도 밝아졌으니, 누군가는 드래곤 에이지의 후속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후속작이 아닌 것 같다는 부분은 비단 느낌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전작과의 연결성이 상당히 약하다는 사실도 존재합니다. 과거 게임의 선택이 현재 게임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며, 오리진의 '워든'이나, 2의 '호크'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 방식이 새로운 플레이어에게는 진입 장벽을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시리즈의 오랜 팬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솔라스에 대한 서사는 전작을 해봐야 완벽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설명이 없이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괜찮은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후속작
전설적인 프랜차이즈의 후속작을 기대했다면...
드래곤 에이지: 더 베일가드는 전체적으로 괜찮은 APRG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전투가 재미있는 편이고, 레벨 업마다 어떤 스킬을 찍을까, 어떤 스킬을 써볼까 고민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서브 퀘스트를 제외한 굵직한 퀘스트, 와이스 홉스 미션, 최종장 근처의 미션은 아주 재밌게 즐길 수 있습니다. 플레이 타임도 넉넉합니다. 좋은 엔딩을 보기 위해선 동료, 세력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기 때문에, 4~50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범주의 세부 카테고리가 '드래곤 에이지'라는 전설적인 RPG라는 것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시리즈 중 가장 뛰어난 오리진은 제쳐두고라도, 바로 시리즈 전작이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인퀴지션이잖아요. 팬 베이스가 바라는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베일가드가 전작을 해보지 않은 신규 팬들을 대거 유입시킬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RPG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낡은 서사나 교조적인 다양성을 보기 싫은 사람도,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흐린 눈으로 주제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할 만한 게임이 될 수 있겠지만, 게임은 눈을 크게 뜨고 해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