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8 리뷰
정재훈 기자 (Laffa@inven.co.kr)
여러 게임을 리뷰하다 보면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게임을 다 했는데도, 딱히 할 말이 없을 때입니다. 전작과 같은 게임성에서 그래픽만 좋아졌다거나, 이미 다른 게임에서 숱하게 본 조각들을 모아 만들어진 경우. 쓸 말이 없습니다. 그냥 그럴싸한 말들과 희망찬 해석으로 지면을 채워나갈 수밖에 없죠.
그러나 가끔은, 게임에 크게 문제가 없을 때도 장르 구분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게임 디자인이 장르적 한계에 크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경우, 게임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입니다. 고전 아케이드 종스크롤 슈팅인 '1945'와 '1942'를 각기 리뷰한다고 가정하면 쓸 말이 궁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때문에, 오늘 다룰 '철권8'의 리뷰 또한 살짝 걱정은 했습니다. 전 꽤 오랜 시간 철권을 플레이했지만, 이를 리뷰의 차원에서 풀어내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철권뿐만 아니라 모든 대전 격투 게임의 근본은 결국 크게 세 가지 개념에 기초를 둡니다. 정해진 공방 프레임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빈틈을 잡아내거나 상대 공격을 눈으로 보고 막을 수 있는 반사신경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의 대전 경험을 쌓았는가죠.
하지만, 이런 걱정은 수십 시간 '철권8'을 플레이하면서 가뿐히 사라졌습니다. 철권8은 기존의 철권 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수많은 변화를 보여주었고, 반다이남코가 앞으로 이 시리즈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언젠가 철권8을 리뷰할 때가 올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줄은 몰랐죠.
리뷰에 앞서, 안내 사항을 먼저 말씀드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1. 밸런스 관련 사항(공방 프레임 변화 및 특정 캐릭터의 강함 등)은 다루지 않습니다. 이는 차후 업데이트를 통해 변경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2. 자세한 서사 내용(스토리 스포일러)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스토리에 대한 언급은 감상과 정도만 다룹니다.
3. 철권 커뮤니티의 일반적인 커맨드 표기법(동양식 표기법)을 사용합니다.(예시 →☆↓↘△ = 6n23rp)
- 숫자: 넘버패드에 대응하는 방향
- n: 중립
- lp rp lk rk: 순서대로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
게임명: 철권8
장르명: 대전 격투
출시일: 2024. 1. 26.
리뷰판: 사전 리뷰 빌드개발사: 반다이남코
서비스: 반다이남코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사람이 무서운 그대들에게 선보이는 철권
대전 격투 게임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모르면 맞아야죠'. 테켄 크래쉬 중계 중 나온 이 멘트는 실제로 모든 대전 격투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입니다. 상대 공격이 상중하 중 어디로 향하는지, 패턴 플레이에서 내밀 수 있는 카드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잡기를 어떤 버튼으로 풀어야 하는지, 모르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는 꽤 오랜 시간 맞아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바로 이 점이, 대전 격투 게임이 다른 온라인 게임들처럼 수많은 유저층을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원래 모든 게임이 초보 단계는 이기기보단 지면서 배우는 게 맞지만, 대전 격투는 그 패배감이 남다릅니다. 팀 게임이 아니니 팀 탓을 할 수도 없고, 아이템 개념도 없어 순전히 실력으로만 겨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패배가 더 쓰라릴 수밖에 없습니다. 못생겼단 말은 참아도 게임 못한다는 건 못 참는게 게이머들 아닙니까?
모든 대전 격투 게임 개발사가 이 심리적 장벽을 해체하고자 했고, 여러 방법을 시도해 왔습니다. 철권8는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죠. 그 중 첫 번째가, 굳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즐길만한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철권8에는 멀티 플레이가 아닌, 싱글 플레이로 즐기는 모드가 크게 세 가지 있습니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 모드(Dark Awaken)'와 캐릭터별 미니 시나리오인 '캐릭터 에피소드', 그리고 '슈퍼 고스트 배틀'이죠. 먼저 스토리 모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미 데모 버전이 풀려 아마 관심있는 분들은 초반부를 플레이해보셨을 겁니다만, 데모 버전에서 플레이할 수 없는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철권 시리즈는 매번 토너먼트를 여는 이유와 패배자가 다시 기어오르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고, 때문에 서사도 엉망진창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6편부터야 뭔가 해보려는 시도를 했고, 7편에 이르러서는 '미시마 사가'라는 이름으로 긴 스토리 모드를 만들어냈지만, 부실한 전개와 '기승전고우키'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죠.
하지만, 8편의 서사는 조금 접근이 다릅니다. 전작까지 철권의 서사가 미시마 3대의 투쟁과 그 와중 휘말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8편의 서사 중심은 '카자마 진'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데모 버전에서도 공개된 뉴욕에서의 혈전부터 데빌과의 기나긴 주도권 다툼, 그리고 어머니인 '준'과의 관계까지, 철권8은 '카자마 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몇몇 이벤트성 싸움을 제외하면 플레이어는 순전히 '카자마 진'의 입장에서 게임을 즐기게 됩니다.
엔딩을 본 입장에서 여전히 서사 구조 자체는 훌륭하다 말하긴 부족합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고, 다소 뜬금없다 느껴지는 요소들도 있지요. 하지만, 카자마 진의 첫 등장부터 보아온 오래된 철권 게이머로서 '스토리 모드의 게임 경험'은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진행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변한다거나, 게임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등 과감한 시도도 이뤄졌고, 액션 연출 또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막바지엔 후속작 떡밥까지 넉넉하게 넣어 주니 앞으로도 이 정도 퀄리티만 해 주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캐릭터 에피소드' 또한 충실합니다. 정사가 아닌 'What if' 스토리인 만큼 한 캐릭터 당 5번의 대전이라는 짧은 길이의 콘텐츠이지만, 모든 등장 캐릭터가 지니고 있기에 독립된 모드로서 아쉽지 않은 볼륨인데다, 메인 스토리 모드에서 다루지 않은 각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드이기에 충분히 훌륭합니다. DLC 캐릭터들도 이 모드에 포함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죠.
마지막으로, '슈퍼 고스트 모드'가 있습니다. 이 모드에선 총 세 가지 유형의 고스트와 대전할 수 있는데, 자기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CPU 고스트죠. 이중 CPU 고스트는 전작의 트레져 배틀과 유사하게 커스터마이징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연전식 모드입니다. 가장 윗단에는 텍킹 계급의 '하라다 PD'가 있으며, 격파시 '수염 아저씨' 칭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고스트는 앞서 홍보한 대로 싸우면 싸울수록 내 패턴을 학습하는 AI와의 싸움입니다. 내가 날 이겨서 어디에 쓰나 싶겠지만, 내 약점을 분석하기에 상당히 좋습니다. 오래 싸우다 보면 나보다 잘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이 썩 좋진 않더군요. AI는 생각보다 빠르게 학습하며, 컴퓨터보다는 사람을 상대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좋았습니다. 콤보 중 실수도 하더군요.
그리고 세 번째가 슈퍼 고스트 모드의 핵심인 '다른 사람의 고스트'입니다. 멀티 플레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출시 전이기에 정확히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론 상 프로게이머들의 고스트와도 대전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두들겨 맞겠지만, 사람에게 직접 맞는 것보단 나으니 큰 굴욕감 없이 연습을 이어갈 수 있겠죠. 슈퍼 고스트 모드의 가장 큰 존재 이유입니다. 굳이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도 실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 모르면 맞아야 하고 굴욕감을 그대로 감수해야만 했던 이전과 달리 부담 없이 실전을 겪을 수 있습니다.
대전 격투에서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가 가능한가?
철권8이 대전 격투 게임이라는 장르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첫 번째 방법으로 혼자서도 즐길 많은 콘텐츠를 넣어 두었다면, 이제는 두 번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 때입니다. 초심자가 처음 격투 게임을 플레이할 때 공격과 방어 양쪽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방어는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몰라서 어렵다면, 공격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공격이 될 지를 몰라서 어렵죠.
지난 수년 간, 격투 게임 업계는 중 '공격'을 어떻게 하면 쉽게 만들어내느냐에 주목했습니다. 철권7의 어시스트 모드나 스트리트 파이터6의 모던 컨트롤 등이 이에 대한 참오 끝에 만들어진 모드죠. 철권8또한, 원활한 공격을 위한 '스페셜 스타일'이 존재합니다. 원버튼으로 켜고 끌 수 있으며, 적용 시 단일 버튼 연타만으로 공중 콤보나 주력기를 쏟아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렇게 직접적으로 조작을 대행해주는 시스템은 캐릭터를 전혀 모르는 극초기에나 사용하고, 이후 바로 끌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연구해도 파훼되는데다 몇몇 기술이 패턴화되어 있는 시스템인 만큼 고점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때문에, 철권8은 여기에 한 가지 변화를 더 주었습니다. 바로, 기존 커맨드 중 입력이 빡빡하거나, 어렵다 여겨지는 기술 대부분의 커맨드를 굉장히 간소화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7편에서 저를 포함한 수많은 유저들이 로우를 포기하게 만든 이른바 '스이슈날(rk lk 46 n 6 rk)'은 입력이 굉장히 빡빡해 저거만 할 줄 알아도 숙련된 로우 유저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8편에선 커맨드가 간소화(rk lk 6rk)되어 보자마자 연습도 없이 썼습니다. 너무 쉽게 되서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철권7에서 데빌진이 콤보 도중 연계기로 많이 끼워넣는 '마두2타(66 lk rp)'도 그냥 'lk rp'로 간소화되었으며, 짧은 시간에 커맨드를 우겨넣어야 하는 킹과 니나 윌리엄스의 연속 잡기도 그냥 원버튼으로 이어집니다. 그 외에도 히트 상태에서는 느긋하게 입력한 풍신권도 초풍신권이 된다거나, 요시미츠의 '외법섬(6n23 lp)'이 '3lprk'로 나간다거나 하는 등 조금이라도 '어렵다'라고 느껴질만한 기술들은 대부분 커맨드가 간소화되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쉬워진 기술들을 이전의 커맨드, 이른바 '정커맨드'로 입력 시 간소화 커맨드로 사용할 때완 달리 위력이 조금 더 늘어난다거나, 프레임 상 이득을 본다던가 하는 형태가 되면서 기존 커맨드도 충분한 활용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기술에 따라서 격차가 커지기도 하죠. 킹의 연속잡기의 경우 자이언트 스윙 기준으로 정커맨드가 1.5배 정도 강한 수준입니다. 같은 콤보도 이전보다 훨씬 쉬운 난이도로 구사할 수 있지만, 정커맨드로 구사하면 더 강해지는 간단한 셈법입니다.
때문에, 초보자는 초보자대로, 또 숙련자는 숙련자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숙련자들의 콤보를 쓰고, 숙련자들은 그 콤보를 더 강한 위력으로 쓸 수 있으니 말이죠. 대전 격투 게임의 실력 상승은 마치 계단을 오르듯 이어집니다. 하나의 벽을 깰 때마다 계단을 한 단계 올라가는 셈인데, 이전엔 가끔 너무 높은 계단이 놓여 있어 충분한 재능이 있는 이들만 이를 넘어서곤 했죠. 본작의 변화는 이 계단의 높이를 최대한 비슷한 높이로 맞춰둔 느낌입니다. 시간만 투자하면, 계속해서 실력이 오를 수 있도록 말이죠.
한 가지 더 게임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아케이드 퀘스트'의 존재입니다. 아케이드 퀘스트는 아바타를 만들어 오락실을 차례차례 도장깨기 하는 느낌으로 등반하는 일종의 긴 튜토리얼 모드인데,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개념을 하나씩 배우게 됩니다. 히트 시스템, 레이지 아츠, 공중 콤보, 확정 반격(딜레이 캐치) 등등 철권의 기본이 되는 개념을 천천히 배우며 익숙해지게 돕죠.
철권을 오래 플레이한 분들에겐 다소 심심한 모드이지만, 배워야 할 게 많음에도 곧장 실전으로 넘어가는 대전 격투 게임의 특성 상 갖추기 어려웠던 느긋한 교육 커리큘럼이 생겼다 보면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슈퍼 고스트 배틀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심화 연습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다만, 게임이 전체적으로 '쉬워졌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난이도 곡선이 완만해졌을 뿐, 전체적인 고점은 오히려 전보다 높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의 정석이죠. 기술에 다양한 부가 효과가 붙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상대의 회복 가능 체력바를 삭제하거나, 소모된 히트 게이지를 다시 채우는 기술, 체력을 회복하거나 반대로 내 체력을 깎으면서 큰 피해를 주는 기술들이 생겨 더 복잡하고 깊어진 면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심화 단계에 해당하지만, 기존의 숙련자들도 더 파고들 구석이 생겼다는 거죠.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적어도 이번엔 말이지
앞서, 초보자는 공격과 방어 모두에서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격이야 각종 보조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든 만들 수 있고, 본작에서는 상당한 양의 커맨드 간소화를 통해 더욱 쉽게 만들어 두었지만, 방어는 숙련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립니다. 제대로 방어하려면 상대의 공격을 읽어야 하는데, 경험밖에 답이 없거든요.
숙련자가 초보자를 이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게임이 방어적으로 흐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발악해도 뚫리지 않는 상대 앞에서 확정 반격을 얻어맞다 보면 말 그대로 '벽'을 느끼는 상황에 이르고, 이는 수많은 유저들의 책상 폭행과 게임 삭제로 이어졌습니다. 조금씩 실력이 늘어나는 재미를 보다가 어느 순간 도무지 이길 수 없겠다 싶은 상대가 나타났을 때, 정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소년 만화에서나 등장할 뿐 실제로 그리 많지 않거든요.
다만, 이번 작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철권8은 철권7보다 훨씬 공격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게임입니다. 괜히 개발진이 게임을 소개할 때 '어그레시브'한 게임이라 표현한 것이 아닐 정도로요. 그리고 이 '공격성'의 대부분은 게임의 새로운 기능인 '히트 모드'가 만들어냅니다.
단순히 말하면, 히트 모드는 특정 기술을 통해 발동되어 일정 시간 동안 강력한 상태가 되거나, 일시에 소모해 일격기를 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이지가 하나만 존재하고, 한 라운드에 한 번만 쓸 수 있는 기능이죠.
기본적으로 히트 모드가 활성화되면, 지속적으로 게이지가 줄어듭니다. 강력한 특정 기술을 사용하면 더 빨리 줄어들 수도 있고, 혹은 일시에 전부 소모하게 될 수도 있죠. 다만, 공격을 이어가는 도중엔 게이지 소모가 멈추기 때문에 히트 게이지가 남아있는 동안 더 많은 공격을 쏟아붓는 것이 이득입니다. 게다가 히트 상태에서는 모든 공격이 상대의 방어를 뚫고 적게나마 피해를 주는 '가드 데미지'를 주게 되죠.
결과적으로, 히트 모드는 발동되는 순간부터 굉장히 공격적인 플레이를 요구합니다. 공격을 이어갈 때의 이득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할 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공격을 멈출수록 손해를 보게 되죠. 당연히, 상대 입장에서는 히트 모드를 낭비시키고 가드 데미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방어를 굳히기보단 역습을 노리게 됩니다.
때문에, 실력 차가 큰 상태에서 상대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일방적으로 이기는 건 여전히 문제가 없지만, 비슷한 실력을 가정하면 히트가 켜짐과 동시에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게 됩니다. 히트 상태에서 쓰는 기술들은 상대가 막아도 프레임 손해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 확정 반격도 별로 없죠.
여기에, 백스탭만으로 전투를 회피할 수 있는 '무한맵'도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전투 과정에 따라 벽이 부서지거나 바닥이 무너지는 기믹이야 여전하지만, 그 중간에 벽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체력적 우위를 점한 후 도망다니거나, 특정 기술을 쓰면서 상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플레이는 이제 봉인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가드 데미지'를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실제 함께 철권을 즐겨온 이들도 가드 데미지의 존재에는 호불호를 보였죠. 하지만, 이 가드 데미지가 철권이라는 시리즈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적 시스템임을 가정하면 이해 못 할 부분도 아닙니다. 어쩌면, 상대의 레이지아츠를 막고 바로 레이지아츠를 지르는 이른바 '레막레'가 사라진 거도 방어적 플레이의 유리점을 줄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철권 시리즈의 인트로에서, 카자마 진과 카즈야는 서로의 안면을 향해 풀파워 펀치를 꽂습니다. 누구도 가드를 올리지 않고 서로를 부수기 위해 달려들죠. 아마 그 장면이, 현재 철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승부를 피하지 않고 더 확실한 공격을 가하는 이에게 승리를 주는 형태 말이죠.
명확한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부족함이 없는 후속작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철권8은 훌륭한 스토리 모드와 풍족한 캐릭터 에피소드, 그리고 한계가 없는 고스트 배틀을 통해 멀티 플레이 없이도 충분히 즐기며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복잡한 기술을 원버튼으로 바꿔주는 스페셜 스타일과 함께 대부분의 어려운 커맨드를 간소화해 초보자들의 기술 활용도를 크게 높였고, 정커맨드 입력에 대한 혜택을 주면서 숙련자들의 만족도도 함께 챙겼죠. 히트 시스템의 도입과 무한맵의 삭제로 전반적인 게임 흐름이 공격적인 형태가 되었으며, 개발진 또한 이 방향이 철권 시리즈가 나아가려는 방향임을 공고히 밝혔습니다.
사실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들은 많습니다. 언리얼 엔진5를 활용하면서 확연히 바뀐 그래픽 퀄리티와 질감, 전보다 더 현실적으로 변한 땀 효과와 피격 모션,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카자마 진의 이야기. 여전한 개그센스로 풀어낸 각 캐릭터 에피소드까지 말하고자 하면 계속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멀티 플레이를 원활히 할 수 없었음에도, 그만큼 만족스러웠습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사랑받는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이라는, 꽤 가볍지 않은 무게를 얹을 만한 충분한 어깨 힘을 지닌 타이틀이란 점이 새삼 느껴졌죠.
'철권8이 최고의 철권이냐?'라는 물음에는 아직 답하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유저들의 대전이 이뤄지는 게임인 만큼, 사후 관리가 얼마나 잘 이뤄지는지, 그리고 새롭게 등장할 캐릭터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따라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갈릴 수 있겠죠.
하지만, 최고가 될 만한 잠재력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철권8은 그간의 어떤 철권과 비교해도 화려하고, 답답함이 없으며, 시작하기 쉬우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게임입니다. 그만큼 훌륭한 경험이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즐기게 될 것 같습니다. 명백하게 생각나는 단점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제 주력 캐릭터인 레이우롱이 아직 없다는 거죠.
그러나 가끔은, 게임에 크게 문제가 없을 때도 장르 구분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게임 디자인이 장르적 한계에 크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경우, 게임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입니다. 고전 아케이드 종스크롤 슈팅인 '1945'와 '1942'를 각기 리뷰한다고 가정하면 쓸 말이 궁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죠.
때문에, 오늘 다룰 '철권8'의 리뷰 또한 살짝 걱정은 했습니다. 전 꽤 오랜 시간 철권을 플레이했지만, 이를 리뷰의 차원에서 풀어내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철권뿐만 아니라 모든 대전 격투 게임의 근본은 결국 크게 세 가지 개념에 기초를 둡니다. 정해진 공방 프레임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빈틈을 잡아내거나 상대 공격을 눈으로 보고 막을 수 있는 반사신경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의 대전 경험을 쌓았는가죠.
하지만, 이런 걱정은 수십 시간 '철권8'을 플레이하면서 가뿐히 사라졌습니다. 철권8은 기존의 철권 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수많은 변화를 보여주었고, 반다이남코가 앞으로 이 시리즈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언젠가 철권8을 리뷰할 때가 올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줄은 몰랐죠.
리뷰에 앞서, 안내 사항을 먼저 말씀드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1. 밸런스 관련 사항(공방 프레임 변화 및 특정 캐릭터의 강함 등)은 다루지 않습니다. 이는 차후 업데이트를 통해 변경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2. 자세한 서사 내용(스토리 스포일러)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스토리에 대한 언급은 감상과 정도만 다룹니다.
3. 철권 커뮤니티의 일반적인 커맨드 표기법(동양식 표기법)을 사용합니다.(예시 →☆↓↘△ = 6n23rp)
- 숫자: 넘버패드에 대응하는 방향
- n: 중립
- lp rp lk rk: 순서대로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
게임명: 철권8
장르명: 대전 격투
출시일: 2024. 1. 26.
리뷰판: 사전 리뷰 빌드개발사: 반다이남코
서비스: 반다이남코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사람이 무서운 그대들에게 선보이는 철권
대전 격투 게임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모르면 맞아야죠'. 테켄 크래쉬 중계 중 나온 이 멘트는 실제로 모든 대전 격투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입니다. 상대 공격이 상중하 중 어디로 향하는지, 패턴 플레이에서 내밀 수 있는 카드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잡기를 어떤 버튼으로 풀어야 하는지, 모르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는 꽤 오랜 시간 맞아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바로 이 점이, 대전 격투 게임이 다른 온라인 게임들처럼 수많은 유저층을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원래 모든 게임이 초보 단계는 이기기보단 지면서 배우는 게 맞지만, 대전 격투는 그 패배감이 남다릅니다. 팀 게임이 아니니 팀 탓을 할 수도 없고, 아이템 개념도 없어 순전히 실력으로만 겨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패배가 더 쓰라릴 수밖에 없습니다. 못생겼단 말은 참아도 게임 못한다는 건 못 참는게 게이머들 아닙니까?
모든 대전 격투 게임 개발사가 이 심리적 장벽을 해체하고자 했고, 여러 방법을 시도해 왔습니다. 철권8는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죠. 그 중 첫 번째가, 굳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즐길만한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철권8에는 멀티 플레이가 아닌, 싱글 플레이로 즐기는 모드가 크게 세 가지 있습니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 모드(Dark Awaken)'와 캐릭터별 미니 시나리오인 '캐릭터 에피소드', 그리고 '슈퍼 고스트 배틀'이죠. 먼저 스토리 모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미 데모 버전이 풀려 아마 관심있는 분들은 초반부를 플레이해보셨을 겁니다만, 데모 버전에서 플레이할 수 없는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철권 시리즈는 매번 토너먼트를 여는 이유와 패배자가 다시 기어오르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고, 때문에 서사도 엉망진창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6편부터야 뭔가 해보려는 시도를 했고, 7편에 이르러서는 '미시마 사가'라는 이름으로 긴 스토리 모드를 만들어냈지만, 부실한 전개와 '기승전고우키'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죠.
하지만, 8편의 서사는 조금 접근이 다릅니다. 전작까지 철권의 서사가 미시마 3대의 투쟁과 그 와중 휘말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8편의 서사 중심은 '카자마 진'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데모 버전에서도 공개된 뉴욕에서의 혈전부터 데빌과의 기나긴 주도권 다툼, 그리고 어머니인 '준'과의 관계까지, 철권8은 '카자마 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몇몇 이벤트성 싸움을 제외하면 플레이어는 순전히 '카자마 진'의 입장에서 게임을 즐기게 됩니다.
엔딩을 본 입장에서 여전히 서사 구조 자체는 훌륭하다 말하긴 부족합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고, 다소 뜬금없다 느껴지는 요소들도 있지요. 하지만, 카자마 진의 첫 등장부터 보아온 오래된 철권 게이머로서 '스토리 모드의 게임 경험'은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진행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변한다거나, 게임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등 과감한 시도도 이뤄졌고, 액션 연출 또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막바지엔 후속작 떡밥까지 넉넉하게 넣어 주니 앞으로도 이 정도 퀄리티만 해 주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캐릭터 에피소드' 또한 충실합니다. 정사가 아닌 'What if' 스토리인 만큼 한 캐릭터 당 5번의 대전이라는 짧은 길이의 콘텐츠이지만, 모든 등장 캐릭터가 지니고 있기에 독립된 모드로서 아쉽지 않은 볼륨인데다, 메인 스토리 모드에서 다루지 않은 각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드이기에 충분히 훌륭합니다. DLC 캐릭터들도 이 모드에 포함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죠.
마지막으로, '슈퍼 고스트 모드'가 있습니다. 이 모드에선 총 세 가지 유형의 고스트와 대전할 수 있는데, 자기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CPU 고스트죠. 이중 CPU 고스트는 전작의 트레져 배틀과 유사하게 커스터마이징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연전식 모드입니다. 가장 윗단에는 텍킹 계급의 '하라다 PD'가 있으며, 격파시 '수염 아저씨' 칭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고스트는 앞서 홍보한 대로 싸우면 싸울수록 내 패턴을 학습하는 AI와의 싸움입니다. 내가 날 이겨서 어디에 쓰나 싶겠지만, 내 약점을 분석하기에 상당히 좋습니다. 오래 싸우다 보면 나보다 잘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이 썩 좋진 않더군요. AI는 생각보다 빠르게 학습하며, 컴퓨터보다는 사람을 상대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좋았습니다. 콤보 중 실수도 하더군요.
그리고 세 번째가 슈퍼 고스트 모드의 핵심인 '다른 사람의 고스트'입니다. 멀티 플레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출시 전이기에 정확히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론 상 프로게이머들의 고스트와도 대전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두들겨 맞겠지만, 사람에게 직접 맞는 것보단 나으니 큰 굴욕감 없이 연습을 이어갈 수 있겠죠. 슈퍼 고스트 모드의 가장 큰 존재 이유입니다. 굳이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도 실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 모르면 맞아야 하고 굴욕감을 그대로 감수해야만 했던 이전과 달리 부담 없이 실전을 겪을 수 있습니다.
대전 격투에서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가 가능한가?
철권8이 대전 격투 게임이라는 장르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첫 번째 방법으로 혼자서도 즐길 많은 콘텐츠를 넣어 두었다면, 이제는 두 번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 때입니다. 초심자가 처음 격투 게임을 플레이할 때 공격과 방어 양쪽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방어는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몰라서 어렵다면, 공격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공격이 될 지를 몰라서 어렵죠.
지난 수년 간, 격투 게임 업계는 중 '공격'을 어떻게 하면 쉽게 만들어내느냐에 주목했습니다. 철권7의 어시스트 모드나 스트리트 파이터6의 모던 컨트롤 등이 이에 대한 참오 끝에 만들어진 모드죠. 철권8또한, 원활한 공격을 위한 '스페셜 스타일'이 존재합니다. 원버튼으로 켜고 끌 수 있으며, 적용 시 단일 버튼 연타만으로 공중 콤보나 주력기를 쏟아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렇게 직접적으로 조작을 대행해주는 시스템은 캐릭터를 전혀 모르는 극초기에나 사용하고, 이후 바로 끌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연구해도 파훼되는데다 몇몇 기술이 패턴화되어 있는 시스템인 만큼 고점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때문에, 철권8은 여기에 한 가지 변화를 더 주었습니다. 바로, 기존 커맨드 중 입력이 빡빡하거나, 어렵다 여겨지는 기술 대부분의 커맨드를 굉장히 간소화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7편에서 저를 포함한 수많은 유저들이 로우를 포기하게 만든 이른바 '스이슈날(rk lk 46 n 6 rk)'은 입력이 굉장히 빡빡해 저거만 할 줄 알아도 숙련된 로우 유저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8편에선 커맨드가 간소화(rk lk 6rk)되어 보자마자 연습도 없이 썼습니다. 너무 쉽게 되서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철권7에서 데빌진이 콤보 도중 연계기로 많이 끼워넣는 '마두2타(66 lk rp)'도 그냥 'lk rp'로 간소화되었으며, 짧은 시간에 커맨드를 우겨넣어야 하는 킹과 니나 윌리엄스의 연속 잡기도 그냥 원버튼으로 이어집니다. 그 외에도 히트 상태에서는 느긋하게 입력한 풍신권도 초풍신권이 된다거나, 요시미츠의 '외법섬(6n23 lp)'이 '3lprk'로 나간다거나 하는 등 조금이라도 '어렵다'라고 느껴질만한 기술들은 대부분 커맨드가 간소화되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쉬워진 기술들을 이전의 커맨드, 이른바 '정커맨드'로 입력 시 간소화 커맨드로 사용할 때완 달리 위력이 조금 더 늘어난다거나, 프레임 상 이득을 본다던가 하는 형태가 되면서 기존 커맨드도 충분한 활용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기술에 따라서 격차가 커지기도 하죠. 킹의 연속잡기의 경우 자이언트 스윙 기준으로 정커맨드가 1.5배 정도 강한 수준입니다. 같은 콤보도 이전보다 훨씬 쉬운 난이도로 구사할 수 있지만, 정커맨드로 구사하면 더 강해지는 간단한 셈법입니다.
때문에, 초보자는 초보자대로, 또 숙련자는 숙련자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숙련자들의 콤보를 쓰고, 숙련자들은 그 콤보를 더 강한 위력으로 쓸 수 있으니 말이죠. 대전 격투 게임의 실력 상승은 마치 계단을 오르듯 이어집니다. 하나의 벽을 깰 때마다 계단을 한 단계 올라가는 셈인데, 이전엔 가끔 너무 높은 계단이 놓여 있어 충분한 재능이 있는 이들만 이를 넘어서곤 했죠. 본작의 변화는 이 계단의 높이를 최대한 비슷한 높이로 맞춰둔 느낌입니다. 시간만 투자하면, 계속해서 실력이 오를 수 있도록 말이죠.
한 가지 더 게임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아케이드 퀘스트'의 존재입니다. 아케이드 퀘스트는 아바타를 만들어 오락실을 차례차례 도장깨기 하는 느낌으로 등반하는 일종의 긴 튜토리얼 모드인데,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개념을 하나씩 배우게 됩니다. 히트 시스템, 레이지 아츠, 공중 콤보, 확정 반격(딜레이 캐치) 등등 철권의 기본이 되는 개념을 천천히 배우며 익숙해지게 돕죠.
철권을 오래 플레이한 분들에겐 다소 심심한 모드이지만, 배워야 할 게 많음에도 곧장 실전으로 넘어가는 대전 격투 게임의 특성 상 갖추기 어려웠던 느긋한 교육 커리큘럼이 생겼다 보면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슈퍼 고스트 배틀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심화 연습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다만, 게임이 전체적으로 '쉬워졌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난이도 곡선이 완만해졌을 뿐, 전체적인 고점은 오히려 전보다 높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의 정석이죠. 기술에 다양한 부가 효과가 붙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상대의 회복 가능 체력바를 삭제하거나, 소모된 히트 게이지를 다시 채우는 기술, 체력을 회복하거나 반대로 내 체력을 깎으면서 큰 피해를 주는 기술들이 생겨 더 복잡하고 깊어진 면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심화 단계에 해당하지만, 기존의 숙련자들도 더 파고들 구석이 생겼다는 거죠.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적어도 이번엔 말이지
앞서, 초보자는 공격과 방어 모두에서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격이야 각종 보조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든 만들 수 있고, 본작에서는 상당한 양의 커맨드 간소화를 통해 더욱 쉽게 만들어 두었지만, 방어는 숙련되기까지 정말 오래 걸립니다. 제대로 방어하려면 상대의 공격을 읽어야 하는데, 경험밖에 답이 없거든요.
숙련자가 초보자를 이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게임이 방어적으로 흐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발악해도 뚫리지 않는 상대 앞에서 확정 반격을 얻어맞다 보면 말 그대로 '벽'을 느끼는 상황에 이르고, 이는 수많은 유저들의 책상 폭행과 게임 삭제로 이어졌습니다. 조금씩 실력이 늘어나는 재미를 보다가 어느 순간 도무지 이길 수 없겠다 싶은 상대가 나타났을 때, 정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소년 만화에서나 등장할 뿐 실제로 그리 많지 않거든요.
다만, 이번 작은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철권8은 철권7보다 훨씬 공격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게임입니다. 괜히 개발진이 게임을 소개할 때 '어그레시브'한 게임이라 표현한 것이 아닐 정도로요. 그리고 이 '공격성'의 대부분은 게임의 새로운 기능인 '히트 모드'가 만들어냅니다.
단순히 말하면, 히트 모드는 특정 기술을 통해 발동되어 일정 시간 동안 강력한 상태가 되거나, 일시에 소모해 일격기를 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이지가 하나만 존재하고, 한 라운드에 한 번만 쓸 수 있는 기능이죠.
기본적으로 히트 모드가 활성화되면, 지속적으로 게이지가 줄어듭니다. 강력한 특정 기술을 사용하면 더 빨리 줄어들 수도 있고, 혹은 일시에 전부 소모하게 될 수도 있죠. 다만, 공격을 이어가는 도중엔 게이지 소모가 멈추기 때문에 히트 게이지가 남아있는 동안 더 많은 공격을 쏟아붓는 것이 이득입니다. 게다가 히트 상태에서는 모든 공격이 상대의 방어를 뚫고 적게나마 피해를 주는 '가드 데미지'를 주게 되죠.
결과적으로, 히트 모드는 발동되는 순간부터 굉장히 공격적인 플레이를 요구합니다. 공격을 이어갈 때의 이득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할 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공격을 멈출수록 손해를 보게 되죠. 당연히, 상대 입장에서는 히트 모드를 낭비시키고 가드 데미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방어를 굳히기보단 역습을 노리게 됩니다.
때문에, 실력 차가 큰 상태에서 상대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일방적으로 이기는 건 여전히 문제가 없지만, 비슷한 실력을 가정하면 히트가 켜짐과 동시에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게 됩니다. 히트 상태에서 쓰는 기술들은 상대가 막아도 프레임 손해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 확정 반격도 별로 없죠.
여기에, 백스탭만으로 전투를 회피할 수 있는 '무한맵'도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전투 과정에 따라 벽이 부서지거나 바닥이 무너지는 기믹이야 여전하지만, 그 중간에 벽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체력적 우위를 점한 후 도망다니거나, 특정 기술을 쓰면서 상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플레이는 이제 봉인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가드 데미지'를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실제 함께 철권을 즐겨온 이들도 가드 데미지의 존재에는 호불호를 보였죠. 하지만, 이 가드 데미지가 철권이라는 시리즈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적 시스템임을 가정하면 이해 못 할 부분도 아닙니다. 어쩌면, 상대의 레이지아츠를 막고 바로 레이지아츠를 지르는 이른바 '레막레'가 사라진 거도 방어적 플레이의 유리점을 줄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철권 시리즈의 인트로에서, 카자마 진과 카즈야는 서로의 안면을 향해 풀파워 펀치를 꽂습니다. 누구도 가드를 올리지 않고 서로를 부수기 위해 달려들죠. 아마 그 장면이, 현재 철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승부를 피하지 않고 더 확실한 공격을 가하는 이에게 승리를 주는 형태 말이죠.
명확한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부족함이 없는 후속작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철권8은 훌륭한 스토리 모드와 풍족한 캐릭터 에피소드, 그리고 한계가 없는 고스트 배틀을 통해 멀티 플레이 없이도 충분히 즐기며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복잡한 기술을 원버튼으로 바꿔주는 스페셜 스타일과 함께 대부분의 어려운 커맨드를 간소화해 초보자들의 기술 활용도를 크게 높였고, 정커맨드 입력에 대한 혜택을 주면서 숙련자들의 만족도도 함께 챙겼죠. 히트 시스템의 도입과 무한맵의 삭제로 전반적인 게임 흐름이 공격적인 형태가 되었으며, 개발진 또한 이 방향이 철권 시리즈가 나아가려는 방향임을 공고히 밝혔습니다.
사실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들은 많습니다. 언리얼 엔진5를 활용하면서 확연히 바뀐 그래픽 퀄리티와 질감, 전보다 더 현실적으로 변한 땀 효과와 피격 모션,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카자마 진의 이야기. 여전한 개그센스로 풀어낸 각 캐릭터 에피소드까지 말하고자 하면 계속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멀티 플레이를 원활히 할 수 없었음에도, 그만큼 만족스러웠습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사랑받는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이라는, 꽤 가볍지 않은 무게를 얹을 만한 충분한 어깨 힘을 지닌 타이틀이란 점이 새삼 느껴졌죠.
'철권8이 최고의 철권이냐?'라는 물음에는 아직 답하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유저들의 대전이 이뤄지는 게임인 만큼, 사후 관리가 얼마나 잘 이뤄지는지, 그리고 새롭게 등장할 캐릭터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따라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갈릴 수 있겠죠.
하지만, 최고가 될 만한 잠재력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철권8은 그간의 어떤 철권과 비교해도 화려하고, 답답함이 없으며, 시작하기 쉬우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게임입니다. 그만큼 훌륭한 경험이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즐기게 될 것 같습니다. 명백하게 생각나는 단점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제 주력 캐릭터인 레이우롱이 아직 없다는 거죠.
9.0
- 혼자 해도 충분히 오래 즐길 다양할 콘텐츠
- 커맨드 개편을 통한 초보자, 숙련자 배려
- 공격적 플레이를 유도하는 확실한 개발노선
- 역대 최고의 그래픽과 훌륭한 최적화
- 여전히 모자라는 서사 개연성
- 호불호 갈리는 가드 데미지 시스템
리뷰 플랫폼: PC (리뷰용 사전 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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