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세계 게임업계는 '오토체스'로 시작한 '오토배틀러' 장르의 시즌이었다. 라이엇 게임즈가 재빠르게 TFT를 발표했고, 붐의 시작인 오토체스는 플랫폼인 '도타2'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게임을 제작하겠다고 알렸다. 그리고, 이에 맞춰 그저 '플랫폼'에 지나지 않았던 도타2의 개발사 '밸브'도 독자적인 오토배틀러인 '언더로드'를 발표했다.
하지만, 유행이 생각처럼 길지는 않았다. 여전히 플레이하는 이들은 많지만, 동시접속자 수십만을 넘어서며 트렌드를 만들어내던 1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오토배틀러의 위치는 다소 초라해 보인다. 라이엇 게임즈의 TFT는 즐기는 이들의 콘텐츠가 되었고, 원본 오토체스는 비교적 덜 대중적인 에픽에 입점하며 어느 순간 관심을 잃었다. 언더로드라고 다를까. 첫 달, 20만이 넘는 피크 동시접속수를 기록한 언더로드는 지난 1월, 최대 동시접속 15,000명 밑으로 내려가며 최저점을 찍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2월 말, '언더로드'가 시즌 시작과 함께 정식 출시되었다. 이와 함께 지표도 호전되었고, 근 몇 달만에 최대 동시 접속 3만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이정도 지표는 소위 '오픈빨'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정도. 크게 바뀐건 없겠지 싶어 게임에 접속해보니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언더로드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꽤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수평적' 콘텐츠 확보한 언더로드
업데이트가 되고, 라이브 서비스가 길어질수록 게임이 발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임은 영구적이지 않지만, 관리에 따라 수명을 늘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하지만, 그 발전의 방향은 대부분 '장점의 강화'로 귀결된다. 게임의 단점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흥행에 걸림돌이 된다면 당연히 우선적으로 고쳐지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큰 문제가 없다면 대부분 장점을 강화해간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꾸준히 새로운 레이드를 만들어내고, 리그오브레전드가 새로운 챔피언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주력 콘텐츠에 힘을 주는 맥락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기물 중 원하는 것들을 고르고, 자원을 관리하며 최적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기물들로 상대를 고꾸라트리는게 이 장르의 기본 법칙이다.
당연히, 주력 콘텐츠에 힘을 준다면 더 많은 기물과 더 많은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 것이다. 그러나 언더로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기물과 시너지도 물론 마련했다. 하지만, 게임을 해칠 정도로 과하지는 않다. 오히려 '감옥' 시스템을 통해 적정 수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당연히 해야 할' 업데이트다. 여기에 덧붙여 언더로드는 '도시 탐구(City Crawl)'이라는 대규모 싱글 플레이 콘텐츠를 추가했다. 미션을 깨며 도시를 탐험하고, 경험치를 얻어 BM인 '배틀패스'의 진척도를 높이는 방식의 콘텐츠다.
그런데 이 싱글플레이 콘텐츠 구성이 생각보다 더 괜찮다. 묘수풀이형 퍼즐 콘텐츠부터,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가 여러 시너지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템포가 빠른 실격전 위주의 클리어형 콘텐츠까지. 플레이 타임도 무료 게임의 싱글 플레이 콘텐츠 치고는 넉넉하게 나오는 편이다. 어디까지나, 사이드 콘텐츠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PVP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척도 경험치도 최고 난이도의 AI와의 대전에서 습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랭크'를 제외한 모든 콘텐츠를 다른 사람과의 접점 없이 혼자 즐길 수 있다. 심지어, 2인조 모드도 봇 팀원을 끼고 플레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언더로드는 기존의 게임 핵심인 '멀티플레이 대전'을 보다 복잡하고 심도있게 만들기보다는, 처음 하는 게이머가 편하게 게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럼에도 멀티플레이에 피로를 느끼는 이들이 아무 부담 없이 게임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두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반 게임 모드에서 훨씬 빠른 템포의 실격전, 친구와 경쟁이 아닌 협동을 할 수 있는 2인조 모드를 추가해 기본이 되는 멀티플레이 모드의 유연성도 높였다. 그리고, 이런 업데이트 콘텐츠들이 기존의 '언더로드'라는 기본 게임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 하나의 게임에서 다양한 재미를 만들어냈지만, 어느 하나 동떨어진듯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동시에 게임의 '핵심'을 잡다
전체적으로, 언더로드는 수직적 발전이 아닌, 수평적 팽창을 꾀했다. 형제라 할 수 있는 '도타2'가 고급 테크닉과 복잡한 스킬 시스템으로 높디높은 허들을 쌓은 것과 반대로, 언더로드는 어떻게든 허들을 낮추고, 최대한 많은 게이머를 포용하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방향이 옳았던 건 아니다. 다양한 콘텐츠를 도입함으로서 바운더리를 넓히고, 타겟 유저층의 폭을 늘리려는 시도는 게임업계에서 언제나 이뤄져왔다. 하지만, 많은 게임들이 이 과정에서 게임의 기본과 동떨어지거나, 의미없이 가짓수만 많은 콘텐츠를 채워넣는 실수를 범해왔다. 게임 좀 했다 하는 게이머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콘텐츠를 억지로 추가하다 결국은 뭐가 중심인지도 모를 뷔페처럼 변하는 게임들을 숱하게 보아왔을 것이다.
언더로드가 다양한 콘텐츠를 추가하면서도 크게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모든 콘텐츠가 결국은 오토배틀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실격전, 2인조, 싱글 플레이 콘텐츠, 퍼즐에 이르기까지, 언더로드의 모든 콘텐츠는 결국 기물을 조합하고 배치하는 기본 공식을 따른다. 뜬금없이 막강한 3성 기물로 RPG를 해야 한다거나, 슬롯머신을 돌리는 등의 자질구레한 가짓수 늘리기 없이 깔끔하게 장르적 허용 범위 안에서만 콘텐츠를 추가했다.
물론 언더로드가 처음은 아니다. '하스스톤'이 대표적인 예다. 모험 모드나 투기장 등 하스스톤을 구성하는 다양한 콘텐츠는 전부 다 하스스톤의 기본 공식을 따라간다. 약간의 변형은 가해졌을지언정, 모두 다 하스스톤이라는 게임의 기본 재미요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백종원 선생님이 쪽박집을 찾아다니며 메뉴를 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괜한게 아니다. 무분별하게 늘어진 메뉴는 도리어 잘하는 음식의 맛마저 가려버린다. 중국집에서 파는 소내장탕을 괜히 미심쩍게 쳐다보듯 말이다. 하지만, 진짜 잘 하는 주력 메뉴를 기반으로 메뉴를 넓혀간다면 굳이 백 선생님도 트집을 잡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여러모로, 언더로드의 업데이트는 '콘텐츠 확보의 정석'이다. 가짓수를 넓히고, 최대한 많은 게이머를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게임의 핵심 재미를 잃지 않았다. '오토배틀러'라는 장르에 1도 관심이 없는 유저층을 굳이 끌어오겠다고 발버둥치는 대신,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입문할 수 있는 오토배틀러로서 입지를 다졌다. 굳이 오토배틀러 장르를 잘할 필요 없이, 머리 쓰는 게임을 좋아한다면 도전해봄직하게 말이다.
게임에서 올바른 콘텐츠 추가란 아마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아직도 완벽한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트리 고착화나 밸런스, 모바일 최적화 등 멀티플레이 기반 게임이 가진 고질적 문제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첫 발이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앞으로의 걸음도 충분히 기대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