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S 장르는 팀 게임으로 불리지만, 실제로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경기마다 눈에 띄게 활약하는 선수가 다르기에 '누가 캐리했는가'를 가장 중요한 요소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교전에서 어떤 선수가 가장 인상 깊은 플레이를 선보였고 5명의 팀원 중 누가 가장 잘했는지 여부가 승부의 핵심 포인트처럼 비치기도 했다. 팀 게임이지만, 팀 플레이적 요소가 주목받지 못하는 경기가 더 많았다.

그런데 히어로즈 섬머 글로벌 챔피언십 2016(이하 섬머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템페스트의 경기를 보면 '팀플레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드러났다. 템페스트는 팀원 모두가 각자 포지션에서 최강으로 평가받던 MVP 블랙을 넘어섰다. MVP 블랙의 팀워크 역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템페스트가 이들을 뛰어넘는 팀플레이를 했기에 두 번의 결승전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MVP 블랙의 시대'를 끝낸 템페스트. 단 한 시즌 만에 팀플레이를 완성한 그들은 이번 시즌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1티어 픽을 뛰어넘는 조합. 자신을 더 빛나게 하는 템페스트의 배려


히어로즈 슈퍼리그 시즌2 초반만 하더라도 템페스트는 팀원들 역할 선정에 골머리를 앓았다. 다수의 전사를 활용하던 시절은 끝났지만, 템페스트에는 전사 출신인 '덕덕' 김경덕과 '홍코노' 이대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은 전사 역할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슈퍼리그 첫 경기부터 포지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홍코노'의 실바나스를 비롯해 팀원 대부분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색한 플레이로 TNL에게 0:3 완패를 당해버렸다.

불안했던 템페스트는 과감하게 포지션을 바꿨다. 무라딘 장인이었던 '덕덕' 김경덕이 전사를 대신해 실바나스-태사다르 등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락다운' 진재훈이 오랫동안 맡아왔던 근접 딜러 포지션 '다미' 박주닮에게 맡겼다. 김경덕과 진재훈 모두 이전까지 맡은 포지션에서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했지만, 팀을 위해 기존 명성을 내려놓고 새롭게 출발했다. 한동안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면서 겪는 위험과 비판을 감당하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 MVP 블랙의 저격픽 예상한 '다미'의 히든 카드

포지션 변경과 함께 템페스트는 최대한 팀원을 배려해주는 밴픽을 했다. 원거리 암살자를 해오던 '다미' 박주닮이 포지션 변경 직후 영웅 폭이 넓지 않았을 때, 템페스트는 1티어 영웅으로 떠오른 소냐를 최대한 선픽으로 가져왔다. 박주닮 역시 팀원들의 배려에 답하며 빠르게 영웅 폭을 늘려갔다. 미칠 듯이 날뛰는 그레이메인과 불지옥 신단에 특화된 케리건까지. MVP 블랙이 결승전에서 '다미' 저격 밴픽을 했음에도 아눕아락이라는 히든카드로 슈퍼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박주닮이 자리를 잡은 후에는 '홍코노' 이대형이 잘 다룰 수 있는 무라딘을 최대한 선픽으로 돌리며 팀원 모두가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갔다.

상위 라운드부터 박주닮과 진재훈은 뛰어난 캐리력이 있음에도 1티어 딜러 영웅 선택에 집착하지 않았다. 템페스트가 무라딘-태사다르를 위주로 선택하면서 1티어 영웅을 빼앗기고 남은 2티어 이하로 평가받는 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두 선수는 저평가 받는 영웅으로 주어진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내며 1티어 그 이상의 활약을 선보였다. 특히, 진재훈은 운영 능력은 뛰어나지만 메인 딜러로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폴스트타로 가장 많은 딜을 넣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게다가, 하향 패치로 최근에 잘 등장하지 않던 리밍까지 결승전에서 꺼내 재조명했다. 영웅에 대한 편견과 티어 구분을 홀로 무색하게 만들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 무라딘 못지 않은 '홍코노' 이대형 티리엘 활약

상황에 맞게 변화해온 템페스트는 밴픽의 약점을 점점 줄여나갔다. 섬머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이대형은 자신의 주요 픽인 무라딘을 빼앗겼다. 정예 타우렌 족장을 선택했을 때, 아쉬운 플레이로 끊기며 MVP 블랙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승전 마지막 5세트에서 이대형은 티리엘 카드를 꺼내며 극적인 승리를 일궈냈다. 티리엘을 잡은 이대형은 과감히 뛰어들어 '축성'으로 스랄의 '세계의 분리'를 칼 같이 막아내는 기막힌 장면을 연출했다. 무라딘을 빼앗긴 템페스트는 반대로 박주닮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그동안 팀을 위한 픽을 했던 박주닮이 그레이메인으로 킬각을 노리는 맹수의 모습을 제대로 선보였다. 팀원 모두가 서로를 보완해주며 템페스트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템페스트의 조합을 보고 '노딜 조합'이라고 말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빛나래-폴스타트를 활용해 발 빠른 합류와 운영 싸움으로 상대의 막강한 화력을 넘어섰다. 개인의 캐리력과 1티어 영웅. 템페스트는 섬머 챔피언십을 통해 모두가 집착해온 것들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많은 히어로즈 팬들에게 알렸다.



■ 1%의 희망을 승리로 만드는 힘. 위기에 돋보이는 템페스트의 근성


MVP 블랙이 엄청난 연승을 기록하던 시절. 많은 팀들이 MVP 블랙만 만나면 위축된 플레이로 아쉽게 승리를 놓쳤다. MVP 블랙을 상대로 유리한 상황도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달랐다. 모두가 MVP 블랙의 히어로즈 슈퍼리그 시즌2 우승을 예측할 때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템페스트의 자신감은 플레이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MVP 블랙을 상대로 먼저 과감히 교전을 열어 슈퍼리그 결승전에서 4:0이라는 완벽한 스코어를 만들어 냈다.

섬머 챔피언십에서는 위기 상황마다 포기하지 않는 무서운 근성까지 더 해졌다. 섬머 챔피언십 4강전. 중국의 e스타는 특유의 공격성으로 템페스트를 위협했다. 초반부터 킬 스노우볼을 굴리던 e스타의 무난한 승리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끈질기게 버티고 또 버티면서 기회를 노렸다. 템페스트의 근성에 지친 것일까. e스타는 자멸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e스타의 단점이 패배의 원인 같았지만, 템페스트의 끈질긴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템페스트의 근성은 결승전에서도 발휘됐다. MVP 블랙이 2:1로 앞서가는 상황. 레벨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용기사는 교전에서 대승을 이어간 MVP 블랙의 것이었다. 템페스트는 중반까지 '사인' 윤지훈 정예 타우렌 족장의 '광란의 도가니' 위에서 춤추기 바빴다. 해설진과 팬들 대부분 교전마다 완패한 템페스트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 좌절을 선사한 '사인' 윤지훈 ETC의 '광란의 도가니'


▲ 기회는 단 한 번! 모든 게 걸린 4세트 한타

그렇지만 템페스트는 위기 상황에서 매서운 집중력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MVP 블랙이 용기사를 탄 타이밍에 상대를 하나씩 끊어내며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 것이다. 본진 안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고 돌격병이 몰려오는 상황. 남은 희망은 마지막 한타 뿐이었다. 우승과 준우승이 나뉠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템페스트는 과감했다. 그토록 선픽으로 고집했던 이대형의 무라딘과 김경덕의 태사다르가 먼저 뛰어들어 상대를 교란했고, 합류한 팀원들이 핵심 딜러를 정확히 끊어내며 대승을 거뒀다. 슈퍼리그 시즌2 4강과 8강 인터뷰에서 박주닮과 이대형 모두 "과감히 들어가더라도 팀원들이 제대로 뒷받침해주기에 문제없다"고 말할 정도로 팀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템페스트가 끈질기게 버티자 무결점의 MVP 블랙도 e스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5세트에서 템페스트 5명의 영웅이 점령한 지역으로 한 명씩 들어가 각개격파 당했고, 교전에 앞서 한 명씩 먼저 끊기는 장면이 나왔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싸워오며 두 팀 모두 지친 상태였지만, 템페스트는 우승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다른 팀보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섬머 챔피언십 결승전 4세트는 모두가 인정한 최고의 역전 경기였다. 팀원 중 한 명이라도 '아 망했다'와 같은 부정적인 말과 함께 좌절했으면 팀 전체가 흔들리며 준우승에 그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템페스트는 위기 순간마다 팀원을 믿었기에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끈기와 강력함이 나왔다.


템페스트의 팀원들은 히어로즈 프로게이머로서 힘든 시기를 겪어왔다. 박주닮과 이대형은 팀과 종목을 바꾸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스타2 유럽 WCS 챔피언 출신인 김경덕은 누구보다 연습량이 많기로 유명했지만, 4강-8강 문턱에서 좌절하며 히어로즈 우승은 힘들 것 같았다. '하이드' 진경환은 MVP 스카이 시절에 MVP 블랙의 연습 상대, '메리데이' 이태준에게 전략을 알려주는 팀원 정도로 활동했다. MVP 블랙의 뒤에 가려진 채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진재훈은 형과 함께 팀을 꾸리기 위해 당대 최고의 팀이었던 MVP 블랙을 떠났다.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불확실한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지나온 그들은 이제 두려울 게 없는 한팀이 됐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믿을 수 있는 팀원이 있기 때문이다. 밴픽부터 플레이까지 내가 돋보이기보단 팀원들이 빛나는 팀이 바로 템페스트인 것이다. 약점을 덮어주고 강점을 키워주는 팀. 템페스트가 마지막 블리즈컨까지 그들만의 팀워크로 2016년 최고의 팀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