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전선'의 시작이자 가장 나중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이 지난 3월 22일 출시됐습니다. '소녀전선'으로부터 30년 이후의 이야기이자 선본 네트워크 테크놀로지가 동인팀인 시절 내놓은 첫작품 '빵집소녀'의 리메이크로, 어찌 보면 지금의 '소녀전선'을 있게 만든 게임이죠.

지난 2017년 국내 출시 이후 지금까지도 서브컬쳐계에 큰 영향을 끼친 '소녀전선'과 연관된 작품인 만큼, 리메이크 발표 당시부터 덕후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출시가 연기되고, 출시하자마자 스팀 평가가 갑작스럽게 '복합적'으로 찍히는 등 악재에 부딪혔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은 복합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호불호는 확실히 갈릴 구성이라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작품이죠. 대체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고, 또 어떤 게임인지 조금 더 자세히 훑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게임명: 역붕괴: 베이커리 작전
장르명: SRPG
출시일: 2024.3.22
리뷰판: 1.0.1.3
개발사: 선본 네트워크 테크놀로지
서비스: XD
플랫폼: PC
플레이: PC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와닿지는 않는 잠입 위주에 주도적이지 못한 전투


'역붕괴'는 소녀전선으로부터 30년 뒤, 카프카스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소녀전선 팬이라면 익히 들어보았을 루크사트주의 연맹 즉 '루련'과 남극에서 태동한 신생 세력인 '남극 연합'의 갈등, 여기에 붕괴액과 완전면역체 그리고 '유적'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죠.

그 소재들을 SRPG라는 방식으로 그려냈다는 것이 '역붕괴'를 처음 접한 유저들의 인식이겠지만, 예전에 공개됐던 데모 버전을 했던 유저라면 아마 알 겁니다. SRPG라는 키워드 앞에 '잠입'이라는 단서가 하나 더 붙어야 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는 것을 말이죠.

▲ 각종 도구와 스킬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난관을 극복하는 전투 파트는 확실하지만

▲ 그걸 체감하기 전에 잠입 미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 맥락 자체는 이미 데모 버전에서부터 어필이 된 상황이긴 합니다. 일단 역붕괴의 간단한 맥락을 설명하자면 남극 연합의 특수요원 '멘도'가 '베이커리'라는 코드명으로 불리고 있는 실험체 소녀 '제퓨티'와 함께 무사히 남극으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죠. 매복해있던 루련군의 공격으로 멘도의 동료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멘도도 거의 죽을 뻔하지만 어쨌든 겨우 살아남아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부대원 다수가 죽은 데다가 적들은 탱크에 각종 병기까지 끌고 오는 상황인 만큼, 멘도와 제퓨티 그리고 동료들은 전면전보다는 잠입해서 교전을 최대한 피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죠.

이렇게 이야기로 잠입 미션의 당위성을 더하는 한편, 그 특유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묘미 자체도 확실하게 살렸습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포복해서 이동하는 '스텔스' 모드로 적의 순찰 루트 사이의 빈틈을 하나하나 찾아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장면은 SD로 그려냈어도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그 긴장감이 전해졌거든요.

▲ 서치라이트에 탱크까지 포진한 삼엄한 감시망

▲ 그걸 강행돌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잠입이 답이긴 한데...

이는 단순히 시야에 의존해서 조심스럽게 가는 단순한 구도가 아닌, 여러 탐지 자산으로 적의 시야 범위나 감지 범위 등등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해서 접근하는 현대 잠입 액션의 '묘미'를 SRPG식으로 잘 담아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러 기믹 같은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장비를 현장에서 얻고, 그것을 개조하는 작업에 드는 행동력과 사거리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풀어나가는 퍼즐식 플레이도 잘 짜여있었습니다.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적이 서치라이트 경로에서 벗어난 구역으로 갈 때 몰래 다가가서 최면침으로 기절시키거나, 감염체들이 소리에 민감하다는 걸 이용해 저주파 발신기나 고음 수류탄으로 적군쪽으로 유도하고 우회로를 개척하는 등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들은 확실했기 때문이죠.

▲ 소리에 민감한 감염체의 특성을 활용, 유도 장치들을 차근차근 준비해두고

▲ 몰이해온 적을 화공으로 다 태워버렸을 때의 쾌감이란


▲ 감염체를 유도하기 위한 도구와 적의 기믹을 활용

▲ 까다로운 슈라이크 분열 소체를 감염체가 알아서 처리하는 전략도 있다

문제는 그 비중이 너무 높은 나머지 자신이 그간 키워둔 캐릭터의 능력이 빛이 나는 구간이 굉장히 늦게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타 SRPG를 봐도 주변 요소들이나 환경을 적극 활용하고 적의 시야를 피해 이동하면서 전투를 최소화하는 식으로 플레이하는 스테이지들이 있기는 합니다. 전투와는 다른 전략적인 수를 두는 맛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니까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육성한 캐릭터들을 잘 운용해서 다수의 적 혹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SRPG에서 기대하는 핵심 재미입니다.

SRPG라는 장르의 흐름을 살펴보면 맵의 기믹이나 적의 배치뿐만 아니라 자신이 육성한 캐릭터의 스킬이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난관을 풀어가는 비중이 상당히 높습니다. 물론 게임마다 세부 시스템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그 캐릭터의 특성을 어떻게든 써먹기 위해서 육성도 하고 그걸 이리저리 시험해보면서 전략적인 수를 강구하는 맛이 있죠. 그런데 역붕괴의 초반에 나오는 잠입 임무나 여러 전투 임무들은 그런 요소가 부각되기 어렵습니다. 캐릭터의 성장이나 스킬의 이해보다는 안 들키고 이동하기 위한 한 수 그리고 장비 업그레이드가 더 중요하죠.

▲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요소도 있고

▲ 그 결과물과 각종 장비를 적극 활용해 전투로 활로를 뚫는 미션도 있지만

▲ 그걸 미처 다 활용해보기도 전에 또 잠입 미션 돌입이다

그렇다고 '역붕괴'가 전투가 재미없다거나, 깊이 없이 그냥 적을 피해다니는 게임은 아닙니다. 전투 자체도 '감나빗'의 검증된 재미가 있는 엑스컴식의 엄폐물과 지형지물에 따라 확률이 적용되는 방식이죠. 여기에 각종 까다로운 적의 기믹을 캐릭터의 스킬 연계나 여러 도구들 그리고 특정 지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배치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풀어나가야만 하는 재미는 확실합니다.

일례로 일부 스테이지에서 등장하는 '슈라이크'들은 혈탄을 쏘거나, 방사능을 먹은 우담화를 불태워서 특수 효과를 지우기 전까지는 일반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는 개체들입니다. 그래서 혈탄이 보급되기 전에는 그들이 자신들과 연관이 있는 제퓨티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점을 이용해야 하죠. 보통 제퓨티를 우담화 인근으로 이동한 뒤, 위험 감지 스킬에 멘도의 간이 엄폐물까지 더해 피해는 최소화하고 바리케이트까지 주변에 설치하는 등 확실하게 그 지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수를 강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유도한 뒤 연소탄으로 우담화를 불태우고 각종 스킬과 수류탄 그리고 미리 깔아둔 RCWS까지 총동원해서 확정킬을 하기까지 머리가 상당히 복잡하긴 하지만, 그걸 성공적으로 달성했을 때 그간 캐릭터를 잘 빌드업하고 장비 업그레이드까지 착실하게 해둔 보람은 느껴지죠.

▲ 그냥 쏴봤자 감나빗 밖에 안 나오니 혈탄이 없을 땐 정말 골치아프지만

▲ 그간 올린 스킬과 획득해둔 장비를 총동원해 머리를 굴려 진을 갖추고

▲ 어찌저찌 맹공을 버틴 뒤 타이밍을 잡아서 집중 사격으로 처치하는 전략성도 확실한데 초반에 그 비중이...

혹은 다수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이를 버티는 미션들도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그때는 멘도가 불굴 특성과 RCWS의 화력 강화 특성을 활용하며 농성하는 동안 제퓨티가 저격으로 킬을 올리면서 버티는 등, 각 캐릭터의 스킬 활용 및 역할 분담으로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맛도 있죠. 그리고 가면 갈수록 그런 전투의 비중이 훨씬 높아집니다. 그런데 그 비중이 초반에 상당히 낮은 편이고, 잠입 미션의 비중이나 길이가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서 초반 전투 경험은 인상에 잘 안 남는 게 문제죠.

더군다나 전투에 오랜만에 돌입해도, ELID 감염체처럼 유저가 정말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적들이 나오는 비중도 좀 있습니다. 이를 우회하거나 혹은 적에게 유도하는 식으로 풀어가는 것도 전략적인 묘미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미 캐릭터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적을 처리하거나 상대할 수 없는 갑갑한 상황을 오래 겪었다가 기껏 능동적으로 전투를 펼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수동적인 방향을 계속 고민해야 하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겠죠. 여러 스킬트리, 특성 및 각 캐릭터 스킬 연계의 효율을 연구해서 자신만의 공략법을 방안을 능동적으로 강구하는 것도 SRPG의 재미인데, 그보다는 개발진이 미리 생각해둔 최선의 한 수만을 강요하는 그런 상황이니까요.


소녀전선을 알면 더 좋지만, 몰라도 파고들 수 있게 잘 짜인 게임플레이와 스토리의 연계


어찌 보면 정말 갑갑하기만 한 구성이겠지만, 이를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게임플레이 자체가 역붕괴가 그 절망적인 상황을 반복하면서 최선의 미래를 찾아가는 '루프물'이라는 걸 각인시키기 위한 기재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제퓨티는 작중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하고, 그때마다 다른 시간선의 제퓨티에게 기억을 전달해서 궁극적으로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갈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포위망도 못 뚫고 결국 자폭을 선택하지만, 여러 번 트라이하면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동료들과 함께 사건의 중심에 접근해나가게 되죠.


▲ 여러 차례 실패와 루프를 반복하면서 최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 스토리뿐만 아니라 게임플레이로도 착실하게 담아냈다. S등급의 미래를 위해선 리트는 필수

최근 중국 서브컬쳐 게임들이 원체 자기만 아는 고유명사 남발에, 그마저도 맥락 없이 그냥 툭툭 던지거나 이상하게 돌려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스토리 부분이 좀 불안할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전작이 있던 게임이면, 전작의 맥락까지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으니까요. 다만 '소녀전선'을 해본 유저라면 그 고유명사들이 알면 좋고 몰라도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걸 알 겁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고유명사와 설정들이 '소녀전선'에서도 언급되지만 그것을 설명하고 풀어내기에 급급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구도와 주인공 세력이 처한 어려움을 직접 실감할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조합으로 풀어내면서 몰입감을 주는 것에 더 집중해왔습니다.

이 기조는 '역붕괴'에서도 동일합니다. 초반부터 유적이니 삼여신계획이니 여러 고유 명사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 일행이 주요 인물을 탈출시키는 특수 작전을 진행 중이라는 알기 쉬운 구도를 바로 제시하면서 이야기의 맥이 흐트러지는 걸 방지했죠. 그 다음부터 이야기를 중언부언 끌기보다는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는 구도를 스테이지로 바로바로 풀어내면서 주인공이 처한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 소녀전선을 해봤어도 그냥 겉핥기식으로만 아는 용어들이 초반에 나오긴 하지만


▲ 그런 게 있다 치고 핵심 요인들을 특수 부대원들이 빼오는 작전을 펼친다고 넘어가도 무방하다

▲ 뭔가 복잡한 용어들이 종종 해설도 없이 등장해도

▲ 게임 시스템에 설득력을 불어넣기 위한 장치로 넘어가도 문제가 없게끔 구성을 짰다

물론 그 처절할 정도로 전력이 비대칭 상황인 걸 묘사하는 것에 힘을 쏟은 나머지, SRPG에서 기대하는 전투가 많이 밀린 역효과가 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스토리나 상황을 바로 직관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보면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클리셰적인 보이 미츠 걸 구도에 그들이 겪는 처절한 난관과 이를 돌파하기 위한 실패의 연속, 이것을 유저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구도를 짰으니까요.


그리고 그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건, 평범하면서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처음에는 이런저런 수단을 다 쥐어짜내면서 비범한 히로인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장면이죠. 그런 구도를 실제 플레이에서 체험할 수 있게끔 스테이지를 디자인한 것이 '역붕괴'의 숨은 디테일입니다. RCWS, 부비트랩, 수류탄 등 각종 도구를 동원하고 특수부대원으로 쌓아온 체력을 자산 삼아서 멘도가 적을 저지하는 사이 제퓨티가 적을 제압하는 구도가 플레이로 연출되기 때문이죠.

인게임 연출도 SD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소녀전선' 시절부터 쌓아둔 노하우로 빚은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각종 연출, 그리고 일러스트 컷신을 중간중간 동원해서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했습니다. 아주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적어도 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황을 제시한다는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소녀전선을 몰랐다가 그 시절의 일이나 여러 용어들을 알고자 하는 유저들을 위해 주요 단어의 해설을 바로 도감에서 볼 수 있게끔 하는 등, 스토리를 읽어가는 흐름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끔 신경을 쓴 디테일들이 눈에 띕니다.



▲ SD 캐릭터로도 긴박한 장면들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냈다

이렇게 소녀전선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짜여있는 판에 '소녀전선'과 연관된 설정들을 살살 풀어내면서 팬들의 입맛을 돋우는 것이 '역붕괴'의 방식입니다. 당장에 소녀전선 팬들에게 IDW다냐로 친숙한 베티 등 전술인형들도 등장하고, 소녀전선 만악의 근원인 '윌리엄'이 암약하는 것까지 초반의 그 고비들을 넘기면 바로 훅 들어오기 때문이죠. 아직 국내에서는 소녀전선2가 출시되진 않았지만, 중국에서 출시된 '소녀전선2'를 해본 입장에서 대체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한 상황들도 많았고요.

역붕괴의 스팀 평가 때문에 주저해서 아직 못한 소녀전선 팬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윌리엄은 아직도 정정하게 잘 살아있고, 온갖 악행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 이번에도 처절하게 구르다 보면 소녀전선, 그리고 소녀전선2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이를 아득바득 갈았던 기억들이 생생할 정도죠. 그 고행의 보상(?)인지 몰라도 전술인형에게 팔 한 쪽을 날려먹은 윌리엄이 이번에는 인과응보를 당할 수 있을지, 그 결과는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 "~다냐"체로 번역을 안 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베티를 보니 좀 마음이 놓인다

▲ 공공의 적 '윌리엄'이 30년 뒤에 멀쩡히 살아있다니 ㅂㄷㅂㄷ 남은 팔...아니 그때 못 처치한 걸 마무리하러 간다


반복 도전으로 최선의 미래를 찾기 위한 여정, '역붕괴'


'역붕괴'는 어찌 보면 미카팀 시절부터 이어진 선본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의 '철학'을 담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소녀전선'도 처음 들어올 때 '총기모에화'로 소개되긴 했지만, 가면 갈수록 통곡의 장벽을 컨트롤과 시스템의 한계까지 최대한 활용하는 각종 변칙적인 플레이로 뚫고 지나가는 하드코어함이 더 강조된 작품이었으니까요. 거지런, 빨봉런, 천국런, 퇴각컨과 와리가리 등등 그간 기억을 훑어보면 소녀전선 이전에 처절하게 싸우는 스토리를 SD 캐릭터를 이렇게까지 굴려대면서 인게임플레이로 묘사한 모바일 게임이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뒤로 30년이 지난 시기를 다룬 작품이자, 미카팀의 첫 작품을 새롭게 리메이크한 '역붕괴'도 그 뼈대는 동일합니다. 각종 불합리한 기믹과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에 엑스컴식 확률이 더해진 상황에서 가용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 생존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처절한 게임플레이로 표현했기 때문이죠. 여기에 타임루프식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실제로 유저들이 실패를 반복하면서 어찌저찌 꾸역꾸역 클리어하는 플레이 양상과 매칭이 되다 보니, 소녀전선을 몰라도 그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죠.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SRPG에서 기대하는 게임플레이에 집중하는 순간 그 재미가 반감되는 게 '역붕괴'의 현 상황입니다. 캐릭터를 육성하고 각종 장비를 만드는 요소는 있지만, 그 육성된 캐릭터를 제대로 써먹는 구간보다는 개발진이 낸 퍼즐을 푸는 식으로 짜여있는 구간이 너무 길거든요. 그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식으로 계속 고민하다 보면 캐릭터의 매력과 능력은 뒷전이 되어버릴 우려도 있고, 그래서 스토리를 계속 보게 될 의욕도 떨어지는 연쇄작용이 발발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를 개발진도 인지한 듯 지속적으로 스텔스 관문이라 불리는 구간을 들켜도 전투로 풀어나갈 수 있게 완화하거나 패스트트랙을 만드는 식으로 보완은 하고 있긴 합니다. 그렇게 바꿔도 초반에는 성장이 크게 체감이 안 되는 레벨 디자인이라 어찌저찌 그간 올려둔 스킬과 장비로 적극적으로 유격전을 펼쳐서 돌파하는 구도는 쉽게 나오진 않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들키자마자 '미션 실패' 문구가 떠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그래도 거미줄이라도 내려줘서 희망고문, 아니 만에 하나라도 성공할 수 있도록 실낱 같은 가능성은 줬다고 할까요?

그나마 후반에 어느 정도 육성이 된 순간부터는 사거리와 도구 그리고 스킬 범위까지 고려해서 신중하게 차근차근 적들을 박살내는 클래식한 SRPG의 구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위안이긴 합니다. 그래서 그 구간에 있던 잠입 미션들은 그나마 전투로 풀어갈 여지들이 보이니까요.

▲ 이전에는 들킨 순간에 바로 실패였지만, 지금은 잠입 미션 대부분이 정면돌파가 가능은 해졌다

그런데 이런 것들 때문에 정작 '역붕괴'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들이 뒷전으로 밀리는 것 자체가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닐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실수는 '역붕괴'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니죠. '소녀전선', 그리고 '소녀전선2'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요. 유저에게 주인공 일행이 겪을 고난을 직접 게임플레이로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게 너무 과해서 이탈하거나 혹은 탈주하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되살리는 구성이 이번에도 반복된 셈입니다.

그런 트라우마를 자극해버린 데다가, 장르 자체에서 기대하는 재미를 너무 늦게 보여주니 '역붕괴'의 스팀 평가는 자연히 좋기는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소녀전선' IP의 시작이자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이니 팬덤의 평가가 꽤 큰 영향을 미칠 텐데, 그간 '소녀전선' 시리즈를 하면서 과하다 싶었던 부분을 싱글 패키지 게임이라지만 그냥 쏟아부어버린 우를 범했으니까요. 그것도 단순히 '어렵다'의 문제가 아니라, 유저가 능동적으로 플레이하기보다 그냥 개발진의 의도대로만 움직이게끔 경직된 구조가 대다수라 감칠맛이 빠진 매운맛이 되어버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거기다가 한국어 버전은 번역 문제까지 겹쳐서 스토리 몰입감도 비교적 떨어지고, 심지어 일부 미션 조건까지도 잘못 번역해서 그 매운맛조차 온전히 즐길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죠.

▲ 분명 한국어로 설정했는데 가끔 일본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도대체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긴 이후의 '역붕괴'는 확연히 다릅니다. 각종 기믹과 스킬, 캐릭터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적과 처절하게 싸우는 SRPG의 재미가 확실히 잡혀있거든요. '소녀전선'을 몰라도 그 자체로도 즐길 수 있는 완성도는 확실하고, '소녀전선'을 안다면 어느 시점을 넘어간 순간부터는 결말을 보기 위해서 어떻게든 달려가게 만들 동력도 충분하죠. 그 시점을 조금 앞당기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은 있지만, 어쨌거나 '역붕괴'는 하드코어한 SRPG로서 디테일과 코어를 갖춘 작품임은 확실합니다. 다만 실패를 반복하며 최선의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한 판 한 판이 꽤 길기도 하고 피로도도 높으니, 소녀전선의 신작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하기보다는 마음을 다잡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번역이나 여러 이슈가 아직 완전히 개선된 게 아니니, 조금 기다렸다가 더 개선된 이후에 접하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