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나는 흑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alfred d. suj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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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

"누구시죠..?"


두 달 동안을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다.

그리고 만랩을 찍고, 아이템 파밍도 어느정도 끝났다.


"지난번 잊혀진 땅에서의 승부... 기억하시나요..?"

".........아......."


자신의 캐릭터 삭제를 걸고 겨뤘던 승부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만랩찍는데 생각보다 오래걸렸네요....

조건은 그때와 같습니다. 이번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죠."

"............."


접종을 하고 나오려는 내게 귓말이 온다.


"...그렇게 힘들게 키워서 다시 올만큼.. 제가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아뇨."


이곳은 전쟁썹.

서로 죽고 죽이는 운명을 타고난 대륙.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고통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익숙해지는 것일뿐.

나는 영원이를 보낸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짜파게티를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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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많이 밝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을 잊지말라는 영원이의 유언처럼

나는 나의 메신저며 인터넷상의 모든 이름을 '영원의나라'로 이어 나갔다.



"샤미형.... 미안해요. 저 이만 길드를 탈퇴해야 할 것 같아요..."

"헉.. 왜 그래. 무슨일 있어?"


만랩을 찍고 아이템 파밍을 어느정도 끝낸 어느날..

나의 갑작스런 이야기에 몇명 되지도 않는 길드원들이 많이들 놀란 모양이다.


"음... 앞으론 게임도 많이 못할것같고... 이런저런 이유때문에요. ^^;;"

"헉, 나라형님.. 가지 마세요. ㅠㅠ"


묘견이가 많이 놀란 모양이다.


영원이의 바램대로... 나는 길드도 들었고 사람들과 많이 친해졌다.

아직 정모며 벙개등에 참석을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길드생활에 충실했었다.


"얼라형님도 안계신데... 인사라도 드리고 나가지....."

"죄송해요. 하지만.. 형이 주말은 되야 접속하시는데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이번 주말이면 어쩌면 나는 또 하나의 캐릭을 지워야 한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묘견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


"다들 인사 못하고 가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네오님도 많이 섭섭해 할텐데....."


혼자서 좌충우돌로 법사를 키우던 한 사람.

새로운 길드 서명을 받기위해서 권유했다가

길드 탈퇴 하는 법을 몰라서 자연스럽게 우리 길드가 된 사람.


"어제... 인사했어요. 그럼 이만 나가볼께요."


며칠전 40랩을 찍기 바로전 나는 남아있는 아이템을 정리하면서

그녀에게 100골드를 건넸다.


"헉... 이게 왠 돈이에요?"

"선물이에요. 그거면 말 사실수 있을꺼에요. ^^; "

"아... 이거 받아도 되는건지..;;;"

"제가 워낙 돈이 많아서... 다른사람들에겐 끝까지 비밀지켜주세요.ㅎㅎ"


어차피 나에게 골드란 더이상 의미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뛰어다녔던 한 아이를 대신한...

다른이에게 베풀수 있는 나를 위한 작은 위안이었다.



'/길드탈퇴'

채팅창에 내가 길드를 탈퇴했음이 나오는 메세지가 뜬다.

지나간 추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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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onix'길드에 맨처음 가입을 했었다.


"나라님, 길드 바꾸기로 했어요."

"왜요....?"

"...스펠링이 틀렸더라구요. -_-"


길마와 길원들 사이에 있던 불협화음도 한몫 했었나보다.


"....엥, 그 스펠링이 틀린거였어요?"

".....o하고 e가 순서가 바뀌었어요. -_-;;"


그리고 새롭게 가입한 'Endorphin'...


"나라야. 길마랑 운영진이 고등학생들이라... 시간대가 너무 않맞아서 고민이다."


밤 열시가 넘으면 운영진이 사라져야만 했던

슬픈 운명을 지녔던..... 내가 몸 담았던 두번 째 길드.


"엥, 마음과마음??? 무슨 길드명이 이래요??"

"........샤미형 작품이에요. -_-;"


멋지고 느낌있는 길드명을 기대한 묘견이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녀석은 'Gundam'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원했었다.


그것이 내가 몸담았던 마지막 길드.


좋았던 사람들....

진작에 나에게 길드라는 것이 있었다면

가시덤블에서 그렇게 영원이를 보내진 않았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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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의 야영지로 날아가는 그리폰위에서

다시한번 숨을 가다듬어 본다.


어쩌면.. 이번에도 나는 나의 캐릭과 이별해야한다.

캐릭터 정보창을 본다.


이번에도 공포어깨는 얻지 못했다.

그리도 스칼로맨스를 많이 다녔음에도

구울방을 거치기란 타클래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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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이 너 와우 할 줄 알아??"

"음... 조금."


2년만에 만난 친구가 와우를 화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 휴먼 사제 24짜리 있는데.. 이번에 나엘 도적으로 새로 해보려구. 같이 할래?"

"그럼, 난 노움 사제나 키워볼까...ㅎㅎ"

"바보........ 노움이 사제가 어딨냐. -_-"

"...응? 그게 왜 없어?"


당황해하는 내게 친구는 답답해 한다.


"원래 없어. 나이트엘프 마법사 본 적 있냐....?"

".........!!!"


집으로 들어와서 급하게 접속을 해본다.

그리고 캐릭터 선택창을 본다.


'랩 1 영원의나라 흑마법사'..


순간 멍해진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왜 나는 그동안 당연히 사제라고 생각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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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XXXX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합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

일방적인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준 그에게

미안한 마음마져 생긴다.


'당신은 XXXX에게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처럼 그가 은신을 하고 사라져간다.



직관력을 켠다.

그리고 마우스 우클릭을 하여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다.


'1,2,3......'


15초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 안에 발견하기만을 바랄뿐이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뿌옇게 다가서는 그가 보인다.

재빨리 부패를 넣었다.

나의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공격적으로 설정해 놓은 임프가

1초간격으로 불화살을 날려댄다.

이 날을 위해 나는 임프에게 특성을 5포인트나 투자했었다.


나의 캐스팅 포즈가 이뤄짐과 동시에

그가 필사적으로 거리를 좁히려 하는 것이 느껴진다.

연속으로 '어둠의연소'를 넣었다.


"쾅!!"


1000에 가까운 크리데미지가 뜬다.

곧바로 고통의저주를 넣는다.

이제 제물만 들어가면된다.


"아...!!"


어느샌가 나를 빙빙돌면서 앞으로 뒤로 왔다갔다하며


캐스팅을 방해하는 도적...


'실패'

'실패'


마음이 조급해진다.

연속되는 공격으로 나의 피도 벌써 절반가까이 빠져간다.


왼손으로 죽음의고리 단축키인 F4버튼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마우스로 생명석을 쉼없이 클릭해 본다.


한번의 기회가 있기를.... 제발 이게 끝이 아니기를.


"쿠오오오~~~~"


죽음의고리가 들어갔다.

나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도적의 모습.


실수가 없도록 마우스로 생명석을 빨고

천천히 방향을 잡고 제물을 시전한다.


"푸확!!"


제물이 들어갔다.

그리고 공포가 풀린 그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남은 피는 30%정도...

'점화'를 넣는다. 1300짜리 크리가 터진다.


'어둠의 연소'칸으로 시선을 보낸다.

어느새 쿨타임이 돌아와 있다.


'...이겼다.'


다시 한번 터진 어둠의 연소와 함께

그가 쓰러지듯 자리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나의 긴 여정도 이제야 끝났다.

이제 더 이상 가위에 눌리는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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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졌습니다."

"........."


9월 중순무렵이었을 것이다.

블리자드에서는 1.8패치때 '죽음의고리'를 상향시켰고

해제 불가능한 공포3초의 기능을 흑마의 스킬에 추가시켰다.


"이번에도... 버프따윈 받지않고 온 모양이네요."

".........."

"만약... 죽고가 패치 않됐으면 어쩔뻔 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누울수도 있었겠죠."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했던가.

우연같은 흑마스킬 패치로 나는 언데도적을 잡을 수 있었다.


"쩝... 어쨋든.. 약속은 약속이니 이번엔 내가 지울 차례군."

"아니요.."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로 캐삭하시면 안됩니다....."

".......?"


나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언데드 도적.


"당신에게 하고 싶은말이 있었습니다."

"........?"


내가 정말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


"첫째... 우연히 필드에서 회색의 얼라이언스를 1:1로 만났을 경우엔 그냥 보내주십시오..."

"둘째... 불가피하게 죽였을경우에는 2번이상 시체 지키기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져간다.


"그리고 셋째.... 그렇게 죽인 저랩의 시체는 절대 먹지 말아주십시오.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전부입니다. 부디 지켜주시길...."

"..........."


그도 나도 아무 말이 없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그가 묻는다.


"......도대체, 그 말을 하기위해 캐릭터 삭제까지 한 이유가 뭐요....?

"............"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ㅡ

그리고 언젠가는 그를 이기고 말해주어야 했던 이야기....



"나는.... 흑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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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logue


그 날 이후로 그 언데도적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캐삭빵 이후로 더 이상 뭘 해야할지 모르는 내게

호드로 오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하이잘 게시판에서 친해진 사람.

영원이 이후에 유일하게 나를 삼춘이라 부르는 사람.


'흥... 영원님은 수능 수리영역 점수가 몇이나 나왔었어요??'

'...저는 학력고사 세대라...;;;'

'헉.. 삼춘이다. ;ㅂ;'

'...........'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호드가 아니라 다른 서버라도 갔을 것이다.

단지, 삼춘이라는 호칭 하나 때문에 그랬던 나를.. 아마 지금껏 모르고 있었으리라.

나는 '토템의나라'를 만들었었다.



"죄송합니다... 한동안 호드는 접속을 못할 것 같네요..."

"헉.. 왜요?"


나의 전향을 반가와하며... 누구보다도 기뻐하던 호드 길드원들.

친해지기도 전에 작별을 고하는 내가 당황스러웠으리라.


"그냥... 휴먼 흑마가 자꾸 눈에 밟히네요."


토템의나라가 30랩을 찍은후에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필드에서 얼라이언스를 공격할 수 없는

반쪽짜리 호드라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이후엔...

단 한번도 필드에서 호드에게 선공을 한적이 없다.



"가끔... 놀러오세요. 얼라로만 접하시지 말고....."

"네에..."


나는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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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언스로 복귀는 했지만

여전히 내가 할 일은 없다.

잠시 앉아있다가 아라시 전장을 신청해본다.


전당 문이 열리면 언제나 금광은 내 목표가 된다.


깃발을 차지함과 동시에

금광 뒤편 집 지붕 끝으로 올라가

alt+z을 눌러 풀 스크린으로 풍경을 감상하곤 한다.



킬수를 늘리거나 명예를 올리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나는 이 자리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가끔, 이 작은 행복을 뺏으러 오는 이들과 싸움이 붙긴 하지만..

그저 나는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킬 뿐이다.


.
.
.
.
.

"근데!!! 삼춘!!!! 질문 하나 더요!!!"

"응.....?"

"삼춘은 왜 많고 많은 담배중에 Time만 피워요??"


참 호기심도 많았고 궁금한 것도 많았던 녀석...

나는 그때도 영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했었다.



"나는.... 시간을 태우는 거야."



영원이가 웃는다.

그리고.. 나도 웃는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