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무실이 처음에는 한적했다. 전관예우도, 비빌 연고도 없이 새파란 나이에 개업한 변호사였으니...


사무실을 방문한 의뢰인들은 변호사 명패가 놓인 책상에 앉아 있는 내게 변호사님 어디 가셨냐, 고 물었다. 제가 변호사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차갑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원치 않던 한적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성남공단의 노동사건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원대, 한국외대, 경희대 등에서 구속된 학생들의 변호도 도맡게 되었다. 소위 돈은 안 되고 골치만 아프다는 사건들. 


나는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벌어지는 그런 인권사건, 노동사건, 시국사범 양심수들 대부분을 무료변론해야했다. 경기동부지역에서 무료변론을 맡을 이가 나밖에 없어 돈은 안되지만 일은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많았다.


수사재판기록 복사비 등 필수비용으로 10~20만원을 받기로 했지만 대부분 그마저도 제대로 내지 않아 개인비용으로 충당했다. 인권단체를 통해 오는 사건은 50만원 정도가 지원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반사건 상담도 당연히 무료로 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114로 변호사 무료상담 번호안내를 요청하면 안내원들이 내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상담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성실히 임했다. 가능하면 비용이 드는 소송을 피해 해결할 방법을 찾아주었다. 


1987년에는 성남공단에 있던 에프코아코리아라는 일본기업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노조활동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회사는 향후 3년간의 생산물량을 확보해 놓았지만 물량을 빼돌리고는 소위 ‘위장폐업’을 했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2백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내게 도움을 청해왔다. 모두 내 여동생 또래의 여공들이었다. 이럴 때 소용 있으라고 내가 변호사가 된 게 아니겠는가. 나는 이 사건에 반년 넘게 매달렸다. 열심히 했다. 


힘들었던 점은 그들을 변론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이 달아오르고 목이 메었다는 것. 그들의 삶이 내 지나온 삶과 너무 닮아 거리두기가 되지 않았다.   


오랜 싸움 끝에 결국 노동자들은 작은 승리를 했다. 눈물겨웠다. 어느 날 민주당 모 국회의원이 말했다. 자신의 아내가 그때 내게 도움받은 에프코아코리아의 노동자였다고...


외국인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필리핀에서 온 에리엘 씨 갈락이란 노동자는 1992년 성남공장에서 일하다 오른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불법체류자였던 까닭에 산재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강제출국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교 보내기 위해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그는 한 팔을 잃어버린 채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갈락의 산업재해 요양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노동부, 공단,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입장은 완강했다.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온갖 자료와 증거, 법리, 세계노동기구 권고조항까지 동원해 달려들었다. 


1년여의 기나긴 재심 절차가 이어졌고 결국 요양인정을 받아냈다. 이미 갈락은 필리핀으로 돌아가 요양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산재보상금은 받게 된 것이다. 


갈락에게 보상금을 송금한 저녁, 사무실 식구들과 파티 아닌 파티를 열었다. 갈락에게 그 돈이 사과가, 위로가 될까 싶었다. 기쁘기보다 그날따라 내 굽은 팔은 더 많이 아팠고, 술은 더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변호사로서 나름 열심히 했다고 여긴다. 민변 활동도 했고 이천노동상담소, 광주노동상담소 소장으로도 일하면서 지원했다. 그 시절 나를 거쳐 간 사건들을 적어본다.    


독도 시위 체포 대학생들, 용산참사 시위자, 분당 파크뷰 분양 특혜 폭로,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추징 운동, 이명박 독도 망언 소송단 대표, 이해학 목사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경희대생 강제연행·가혹행위, 김태년 국회의원 안기부 조작사건, 농협 부정대출 비리사건 폭로 기자 변론, 경기교통 불법매각 집단 손해배상, 성남 지하상가 비리 폭로, 연애인 골프캐디 폭행사건 피해 구제, 복정동 일용건설노동자 노조설립 지원, 하대원 철거민 강제철거 변론, 외국인노동자 활동가 구속사건, 노점상 구속자...  


수많은 구속 노동자와 학생들, 구속된 평화운동가들, 해고된 노동자들의 무효소송...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중에는 한 때 격렬하게 싸웠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동생도 있었으니...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성남에서도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성남의 ‘우리 변호사’가 된 나의 역할도 자연스레 시민사회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성남시민모임’ 참여로 이어졌다. 


성남시민모임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나는 ‘파크뷰 특혜사건’에 달려들었다. ‘파크뷰 특혜사건’은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상업·업무용 토지를 주거용으로 용도변경하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권력형 비리였다. 


토지를 용도변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건설업자에게 엄청난 차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1999년 말부터 용도변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는 용도변경했고,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가 되었다.


사건을 파헤쳐 나갈수록 배후에 토건업자와 정관계,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고리가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변호사 한 명과 시민단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주변에서 다친다며 물러서라는 권유가 잇달았다. 무모하다고 했다.      

나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부정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결심은 그러했지만 실제의 상대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토건세력은 처음엔 회유책으로 나를 포섭하려 했다. 내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언론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20억을 투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20억. 천만 원도 없어 사무실 개업비용을 빌렸던 내게 20억이라... 나는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양심을 팔려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돈으로 사람도,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한 5천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성남시민모임과 같은 단체를 전국적으로 2~3백 개쯤 만들어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웃었다. 웃픈 농담.         


그들은 이날의 농담을 소문냈다. 이재명이 20억이 적다며 5천억을 요구했다고... 덕분에 내 양심의 공시지가는 20억에서 5천억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협박이었다. 나를 향한 협박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에는 나도 힘들었다.


그들은 사무실은 물론 집으로도 전화를 해댔다. 새벽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반까지 대면서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나중에 보니 경찰서 간부도 한패였다.


결국 나는 허가를 받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했다. 양복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다녔다. 

상대는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의 방향을 결정할 커다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협박을 당하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하고... 아이들에 대한 협박까지 들은 아내는 무척 힘들어했다.  

 

상대는 막강한 자본과 권력으로 무장한 기득권세력이었다. 나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였을 뿐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백척간두. 백 자 높이의 허공, 선 자리는 장대 끝, 바람 불면 휘청거리는 위태로운 자리. 


이 싸움이 후에 얼마나 험한 가시밭길을 펼쳐놓을지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포기하면 아무도 싸우지 않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부정과 싸우지 않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위태로운 허공,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진일보.  


아파트 특혜분양은 곁가지였다. 몸통은 땅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한 용도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발생하는 지점. 나는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KBS ‘추적 60분’ 팀의 취재와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인터뷰 도중, 내 사무실에 오기 전 수차례 검찰을 사칭해 시장 비서진과 통화하며 시장과의 연결을 요청한 KBS 피디에게 시장으로부터 통화하자는 음성메시지가 왔다. 용도변경의 최종 인허가권자였던 성남시장에게 전화한 피디는 자신이 파크뷰 사건 담당검사라며 솔직하게 전모를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당시 성남시장은 내막을 털어놓았고 기자는 통화를 녹취했다.


며칠 후 녹취가 ‘추적 60분’ 방송으로 나갔지만 반향이 없다. 나는 피디에게 통사정해 녹취파일을 받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마침 지방선거와 맞물려 세상이 뒤집혔다. 당황한 성남시장은 피디의 검사사칭 배후로 나를 지목했고, 검찰은 나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억울해서 대법원까지 가며 싸웠지만 결국 유죄로 벌금 150만원을 받았다. 사칭한 PD는 선고유예였다.


‘파크뷰 특혜사건’ 싸움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됐다. 무려 499세대를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의 유력자들에게 특혜분양한 사실이 드러났고, 도움을 주고 돈을 받은 경기도지사 부인, 성남시장, 경찰간부, 언론인,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건은 나와 부동산마피아, 음험한 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내가 ‘부동산 패권주의 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동산투기 세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그들은 전방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값 상승을 부추기고, 서로 결탁해 범법하며 천문학적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기기 어려운 거악이자 우리 사회의 숨은 실력자들이었다. 






토건마피아와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대장동 개발사업 또한 다르지 않다. 대장동 건은 이미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때도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사건이다. 검찰은 개발이익금 5,503억원을 시민 몫으로 환수했다는 내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기소했다. 결론은? 

‘무죄’였다. 


검경은 이미 그때 현미경을 들이대듯 대장동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내게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이미 그때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원래 LH의 공공개발로 추진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을 민간개발로 바꿔놓은 건 국민의힘 세력이다. 하지만 나는 성남시장이 되면서 민간개발을 막고 성남시 공공개발을 추진했다. 공공개발로 시민 모두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국민의힘 세력의 저지로 공공개발이 막히자 공공민간 합동개발이라도 해서 최대한 공익환수를 하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한다. 국민의힘 세력이 장악한 시의회의 반대로 지방채 발행이 막혀 성남시 예산만으로는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민간투자를 받아야 했다. 이에 나는 원칙을 세웠다. 


자본은 민간이 댄다. 손해와 위험은 민간이 진다. 성남시는 사업이 어떻게 되든 고정이익을 취한다.


오히려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꺼릴만큼 성남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업방식이었다. 


25억을 투자한 성남시는 당초 예상이익의 70%인 4,400억 가량을 환수했고 1조 3천억을 투자한 그들의 몫은 30%인 1,800억이었다. 나중에 지가 상승으로 그들의 이익이 2천억 가량 늘었지만 성남시가 업자들에게 1,400억원을 더 부담시켜 전체이익의 60% 가량을 환수해 시민들에게 돌린 결과가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5,800억도 그들 업자와 정치인, 전직 검사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세력은 나의 기습에 또다시 당한 셈이다. 토건마피아가 지금까지도 결사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배경이다.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벼락거지로 만든다. 공동체 전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손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피눈물이다. 이 적폐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공정과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주거권을 보장할 때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집중완화, 대규모 주택 공급, 기본주택 등의 영민한 정책집행이 필요하다. 하기로 작정하고, 용기 있게 결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집 걱정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부정과 불의를 끝내겠다는 백만, 천만 국민의 뜻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