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무렵 대구MBC에서는 이육사 순국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는데

제작진이 의문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육사 선생님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유해와 유품들을 정리했던 '이병희' 라는 인물.

"이병희... 남성분인가?" 

"여성분이라던데?"

'이병희' 라는 인물은 베일에 싸여있는 의문의 인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이병희'란 인물을 수소문하던 제작진은 마침내 그 인물을 찾아내게 되는데...


"선생님이 이병희 여사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게 취재가 시작되고 어마어마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는데...



<독립운동가 이경식 님의 공훈록>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이경식의 영향을 받아 항일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 사진이 낯설지 않은분들도 있을텐데 바로 오이갤에 가끔 올라오는 10대 독립운동가 관련 게시물의 그분 맞습니다)

10대 후반 당조카뻘이었던 동지 이효정과 함께 서울의 종연방적에서 노동항일운동을 벌이다 일제에게 체포.

일제에게 수십가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며 이후에도 여러 회사를 돌며 노동항일운동 전개.

감옥을 수차례 드나들었으며


<이육사-본명 이원록, 독립운동가,시인>

출소 이후 아버지가 계시던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같은 문중 10촌 할아버지뻘의 이육사를 만나

이육사의 제안을 받고 의열단에 가입, 독립운동가 들의 연락책과 수금책으로 활동.

1943년 9월 이육사와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는데 이병희 여사는 그 긴박한 와중에도 옷을 갈아입고 가겠다 라는

핑계를 대고 중요 문서들을 씹어삼켜 파기해버리고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에 

"여기서 개죽음당하느니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좋겠다." 라며 이육사 선생이 기지를 발휘하였는데



" 이 친구는 정혼자가 있는 곧 결혼할 몸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잘못도 없으니 부디 선처하여 풀어주시오."

일제가 이를 받아들여 이병희 여사를 석방하고 닷새 후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베이징감옥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일제는 이육사 선생님이 순국하자 이병희 여사를 불러 유해와 유품을 챙기게 합니다.


" 아무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고 어루만져주니까 그때서야 눈을 감으면서 피고름이 달라붙더라고...비참했죠..."

"열번을 죽였다가 살리고 죽였다고 살리고 그래가면서 고문을 했어, 그러면서도 웃고 동지들 보고 고맙다고..."

<이병희 여사의 당시 회고>

이병희 여사가 수습했던 유해와 유고는 잘 전달이 되었고 자칫 잘못하면 세상 빛을 영영 못볼 뻔했던

이육사 시인의 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줬던 분.


"선생님, 왜 그 동안 이런 사실들을 숨기신겁니까?"


<이병희 여사의 동지이자 친척이었던 이효정 애국지사의 수형카드>

그 동안 독립운동 사실을 꽁꽁 감춰왔던 이유는 이병희 여사가 사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석방이후 결혼하여 타국을 떠돌다 신의주에 정착했으나 북한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고 월남하여 살았는데

사촌이자 동지였던 이병기는 '확실히'전향했음에도 보도연맹학살에 휘말려 살해.

당조카, 동지였던 애국지사 이효정 역시 사실상 전향했음에도 좌익예비사범으로 낙인찍혀 고문까지 당했고 

월북해버린 남편때문에 빨갱이 꼬리표가 몇십년동안 붙어다녔으니...

주변 사람들이 전부 불행한 삶을 사는것을 본 이병희 여사 역시 자식들에게까지 철저하게 독립운동 사실을 

몇십년동안 숨기고 살아왔던것.


한 방송국의 취재로 시작하여 찾아낸 숨겨진 독립운동가는 

결국 1996년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공로를 인정받게 됩니다.

2012년 95세를 일기로 별세.


여담


이병희 여사의 동지였던 이효정 여사도 2006년 독립운동공로를 인정받아 94세에 건국포장을 수여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