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phonse Maria Mucha (1860 ~ 1939)


세기말의 보헤미안.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화가.




파리로 가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리며 생활했는데, 1894년 우연히 유명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인 지스몽다(Gismonda)의 광고용 포스터를 만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당시 인쇄술의 한계는 1m 였는데 저 포스터 길이는 2m로 이어붙이기 한것이라 함.)


1895년 발표된 이 <지스몽다> 포스터 하나로 당대 최고의 스타와 6년 계약을 맺는다.

참고로 지스몽다 상연 당시 사라 베르나르는 50대 초반이었으나, 무하는 일부러 그녀의 신비함과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젊은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사라 베르나르는 지스몽다 포스터를 4천장 추가 주문했으며, 의상과 무대 디자인까지 무하에게 일임하게 된다.

알폰스 무하는 하루 아침에 무명의 신예에서 파리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상업 화가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하 작품 상당수가 이 지스몽다 작업 직후부터 1900년 사이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녀를 모델로 삼아 그려진 알폰스 무하의 작품




이후 각종 포스터와 사계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난 이후로는 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서,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 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무하의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의욕이 왕성했음에도 도저히 밀려드는 주문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근래의 작품인줄 알고 지나쳐 간다는 무하의 청동상 1900년작.)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프라하의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좌측면에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그의 독특한 화풍 덕에 보통 스테인드 글라스와는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9~20세기를 거쳐간 유명 화가 중 굉장히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말년에 민족 예술가로 활동하다 나치에 찍힌 시기를 빼면 풍족한 삶을 영위했으며, 20세기 유럽 남성 수명을 한참 넘긴

79세에 사망했다.


무하는 사교적인 성향이라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고 친구가 많았다.

또한 성격이 무른 편이어서 누가 돈 빌려달라고 찾아오면 호구처럼 다 내줄 때가 잦았다고 한다.

좋아하는 예술가에겐 지원도 아낌 없이 해주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한 친구는 그보다 12살 많은 폴 고갱이었다.

둘 다 돈 없고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절 파리에서 만났으며, 고갱이 무하의 아틀리에에서 장기간 숙식한 적도 있다.

(참고로 이 아틀리에가 위치한 건물에 모딜리아니도 살았다고(....) 화가란 화가는 죄다 파리로 가던 시절)

요약하면 재능이 탁월하며 금전운이 따르고, 인간 관계도 원만했으며,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았던 화가. 상업 예술과 민족 예술이라는 두 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현대 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에 현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로 여겨진다.



다른 화가처럼 사후 인정받은것이 아닌 생전에 부와명예를 가진 몇 안되는 화가.

인싸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