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재수넘기
2019-07-2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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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vs. 민주정아돌프 히틀러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당수 “11월(1918년), 수병(水兵)들이 트럭을 타고 몰려와 우리에게 폭동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 소위 ‘우리 조국의 자유와 아름다움, 그리고 존엄성’을 위한 이 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한 주동자들은 유대인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전선에 나가 싸웠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독일혁명을 교사하고 배후에서 끈을 잡아당기는 자들은 다름아닌 국제유대인이다... 혁명은 안정과 질서를 원하는 세력이 아닌, 폭동과 강도, 분탕질을 꿈꾸는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나는 차차 사민주의 계열의 언론사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만드는 신문들 중에 진정 민족주의적이라 할 만한 신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사민주의 팜플렛들을 모아 저자들의 이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대중의 무지함과 우리 지도층의 안일함 탓으로 사람들은 유대인의 거짓말 공세에 쉽사리 농락당한다... 나는 1919년에 이르러 유대인 칼 맑스의 이론과 그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되서야 나는 그의 ‘자본론’과 함께 사민주의가 어떻게 국가의 경제를 파괴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불러올 토양을 마련하는데 있다... 실제로 국가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노동조합을 이용해 유대인들은 비유대인 국가의 경제를 파괴한다... 러시아를 손아귀에 넣은 국제유대인은 독일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독일은 러시아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될 포식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서방의 소위 민주주의란 것은 맑시즘의 바로 전 단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없이 맑시즘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 맑시즘이란 신흥종교의 도움으로 유대인이 만약 세상의 만국을 정복한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무덤 앞에 바쳐지는 조화가 될 것이다...” (Mein Kampf)
국제자본과 맑시즘이라는 이름의 Judaic serpent 공화정 vs. 민주정 제 6장, 기록 #1 하톤 1994년 9월 8일 목요일, 9:46 A.M. 8년 023일
1994년 9월 8일 목요일
다르마여, 이건 당신을 위한 지시사항입니다만, 우리는 독자들을 위해 우리의 교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얼마간의 정보를 공유할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유용한 정보--진실만을 담고 있습니다.--를 건네는 일 이외의 일을 한다고는 결코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미 당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이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정보들을 다시 거론하는 것일까요?--왜냐하면 당신들은, 그러한 정보들 만큼, 혹은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진실을 쓰고, 진실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르마 당신에게 부탁하건대, 약 3년 전에 L.F. 박사가 당신에게 보낸 물품 상자를 한 번 열어보기 바랍니다. 그녀는 지난 여름 유명을 달리했는데, 우리는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이것을 우리에게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지혜롭고 주의깊게 핵심적인 정보들을 선별했으며, 이제 이 정보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치있는 정보가 되었습니다.--당신이 이를 그렇게 활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화정과 민주정[Republics and Democracies]에 관한 소책자를 한 번 꺼내 보십시오. 이 글은 로버트 웰치[Robert Welch]에 의해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혹은 그의 연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자를 다룰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르마 :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약 3분 전에 나는 이 책자를 발견했습니다.--나는 이 책자를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자 자체는 열려 있었지만, 그 내용물에는 손도 댄 적이 없었고,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마루 바닥 밑에 기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여기 그 책자가 있습니다.(사실, 일종의 팜플릿 같은 것입니다.--아주 작은 책자로 제본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우선 이 책자부터 소개하자면, 로버트 웰치가 쓴 공화정과 민주정[REPUBLICS AND DEMOCRACIES]이라는 책자로, 1961년 9월 17일, 시카고 시민들이 주최한 제헌절 오찬 행사장에서 처음 발표된 연설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증판본은 1961년 10월 메사추세츠주 벨몬트[belmont]시 02178, 아메리칸 오피니언[AMERICAN OPINION]사가 간행한 것입니다.
지난 주 법정에서 증언을 요청받았을 때, 나는 어떻게 내가 저널에 쓰인 내용들을 아는 것인지 또는 어디서 이를 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단지 구술을 받게 될 뿐이며, 이를 설명할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코 우리가 헌법 아래 제대로 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것은 훌륭하면서도 정확한 정보입니다. 이 내용을 디스크에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 이 글의 저자(웰치)에 대해서도, 그리고 “완전히” 정확한 문서의 전체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그렇지만, 제대로 된 인식과 분별력을 위해서는, 이 정보의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내용을 론 잭슨[Ronn Jackson]이 볼 수 있도록 그에게 즉시 전송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 정보는 ‘공화정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누구에 의해 가장 잘 수행될 수 있는지에 관한 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나는 또한 론[Ronn]에게 존 맬로니[John Malony]와 접촉하고 유대 관계를 맺는 일을 상기해 볼 것을 요청합니다. 존은 지금 이 시대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통제된 언론을 우회하는 일을 잘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화정과 민주정[REPUBLICS AND DEMOCRACIES] by 로버트 웰치[Robert Welch] (1961년 9월 17일 연설)
I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새로운 어떤 것을 언급한다면, 그게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오늘 언급하는 모든 것들은 오래된 경구들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될 뿐일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며, 새로운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치가들, 역사학자들, 철학자들은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서 생각하고, 언급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 주제도 그 중 하나로, 거의 3천년 동안, 어쩌면 더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알아온 내용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류 역사에는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왜냐하면 아주 단순한 이유 중의 하나로, 역사학자 자신들은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꽤나 나중에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방대한 분야를 연구하고 또 여러 가지 형태의 결론들을 내려온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빈정거리듯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도나투스[Donatus](4세기 초 활동했던 기독교 성직자로 분리교의 주교--역주)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 “페레안트 키 안테 노스 노스트라 딕세룬트[Pereant qui ante nos nostra dixerunt]”(지금 우리가 다루는 것들에 대해 우리보다 앞서 이야기했던 자들은 이미 다 죽고 없어졌다.) 설령 저만의 독창적인 사고라는 것이 있어서 제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손 치더라도, 이 모두는 사실상 여태껏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온 모든 관찰과 생각, 기록으로 남겨진 의견들에 대한 감사함에 의해 압도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러한 것들의 운 좋은 상속자일 뿐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보더라도,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숙고를 제외한다면, 인간이 ‘정부’에 관한 문제 보다 더 많고 깊은 고민을 했던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일반적인 주제 안에서도, 사람들의 압도적인 관심을 끌었던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적절한 형태는 무엇이며, 정부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이며,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자, 그럼, 꽤나 적절한 일이 되겠지만, 이 문제에 관한 역사적 발전 과정,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시도들,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한 영원한 논쟁들을 잠깐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봅시다. 지금 여기, 제 의견을 펼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활동에 관한 모든 다른 분야에서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과거를 살펴보지 않고 현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II
이 드라마의 막이 올려졌던 첫 번째 장면은 B.C. 6세기 그리스였습니다. 아테네에서는 다양한 계급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많은 불화와 소요가 있었기에, 이 도시의 현자들은 단지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보다 영속적인 성격의 어떤 것이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그건 바로 안정성, 내적 평화, 그리고 번영으로서,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진작부터 기대해 왔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가 달린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기 위해, 당대에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동료 시민으로, 솔론[Solon](B.C. 638-558년경, 아테네의 정치가, 입법자--역주)이라 불리는 자를 선택했던 것은, 역사 속의 아주 운 좋은 사건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사례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례 자체가 전혀 없었던 일이기도 했기에 우리를 더 놀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솔론은 정부에 관한,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의 경제적 삶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솔론은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이 특별한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단지 당대에서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노력했던 것으로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결국 “솔론의 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법은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성문법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심할 나위도 없이 솔론이 내린 결정들, 그리고 그가 만든 법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이론과 관습들의 투영이자 종합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가 아테네의 집정관[Archon]으로 선출된 B.C. 594년은 ‘통치’(또는 ‘정부’)[government]라고 불리는 인간들의 영원한 문제에 대한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접근이 이루어진 때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되다.
솔론이 만든 법률과 원칙들은, 우리 자신의 공화국을 포함한, 나중에 생겨난 모든 공화국들에 대한 전조가 되고 또 이를 준비하는 성격의 것들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명령에 따른 통치”가 아니라 “글로 쓰여지고 영속적인 법률에 따른 통치”(윌 듀런트[Will Durant])(1885-1981,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역주)[하톤: 론[Ronn], 당신 주변에 이 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원칙을 도입했으며, 진보를 향한 인간의 노력 속에, 이를 ‘눈에 보이는 기록’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론 자신은 전 시대에 걸쳐 가장 완전무결한 격언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국민들이 통치자들에게 복종하고, 통치자들이 법률에 복종할 때” 국가는 제대로 통치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왕이나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준수해야 하는 법률이 있다는 이러한 개념은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서구 세계”에 한정할 때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기본 개념은 아시아에는 항상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서구 문명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명백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이 개념이 솔론의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솔론 사후 2천 년이 지난 때인, 동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으로부터도 한참 이후까지 아시아인들의 마음과 그들의 제국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남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중단된 것
솔론의 법률들이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약 5세기에 걸쳐 아테네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 불행히도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도 두 가지의 이유로 인해 공화정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솔론은 공화 정부를 위한 영속적인 법적 기초를 도입했지만, 그 설립과 지속을 위한 뼈대를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솔론의 법률들’의 집행, 준수, 그리고 그 지속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의 자동적으로, 전제 군주의 손에 넘어 갔으며, 이 전제 군주들은 길면서도 불안정한 기간 동안, 각각의 정부마다 다른 형태, 다른 행정 절차를 통해 아테네를 통치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아테네인들이 솔론에서 시작된 일을 완성시키고, 변하지 않는 헌법 아래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구속시키기에는, 그리스인들의 기질이 너무나 가변적이었고, 자치 정부의 원칙들도 너무 다이나믹했습니다--비록 각 정부가 무력으로 전복되어야만 하는 독재자들이 세운 정부라고 하더라도. 솔론의 법률들이 갖는 권위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나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와 같이 계속되는 전제 군주정이 설립되어야만 했고,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솔론의 법률들은 한낱 잠깐의 미몽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문법에 따른 통치가 이상이라고 한다면, 이 법률들이 때때로, 그리고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존중되고 지켜지고 했던 것이 실제였다고는 하나, 이는 진정한 공화정으로 나아가는--그 전제조건이 되는--하나의 중요한 단계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단계는, 실질적인 정부의 뼈대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정되고 영속적인 기본 법률들의 존재로, 이의 달성은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다른 그리스의 후계자들에게 남겨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아테네는--아테네를 흉내 낸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이었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민주정이 궁극적으로 최악의 정부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그렇지만, 그리스의 민주정이 솔론의 법률에 의해 얼마간 조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직접적인 정신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의 진정한 공화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군주정을 대신하게 된 초창기의 로마로 그 시기는 대략 B.C. 509년에서 B.C. 49년까지였습니다. 이 시기의 로마는 처음에는 왕들을 제거했지만, 나중에는 그 권력이 다시 시저(카이사르)[Caesars]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기에 정말로 중요했던 해는 B.C. 454년으로, 이 때 로마 원로원[the Roman Senate]은 하나의 위원회를 만들고, 그 소속 위원들을 그리스로 보내 솔론의 법률들에 대해 연구하고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3명으로 구성되었던 이 위원회는 임무를 잘 수행해 냈습니다.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로마 원로원은 열 명을 선발하여--이후 이들은 10인 위원회[Decemviri]로 불렸습니다.--이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새로운 로마의 법규를 제정하도록 했습니다. B.C. 454년, 그들이 만들고 로마 원로원이 채택한 법률은 12표법[the Twelve Tables]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전은 솔론의 법률에 기초를 둔 것으로 로마 공화국의 성문 헌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출발점을 계승한 로마
12표법은 “개정되고, 또 끝없이 추가되었지만--입법 절차에 따라, 집정관의 포고령[praetorial edicts]에 따라, 원로원의 결정[senates consulta]에 따라, 그리고 황제의 칙령[imperial decrees]에 따라--약 9백 년 동안 로마의 기본법으로 남았습니다.”(듀런트[Durant]). 심지어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세우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 시대부터 인정되었던 로마 제국 시기에 조차, 최소한 이론적으로, 그리고 일정 범위에 있어서는 실제적으로 항상 로마의 기본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심지어 12표법이 채택되기 이전에도 이미 로마는, 공직자들이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시스템 속에서 공화국의 근간을 세웠으며, 그러한 체제 하에서 이 법률들은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이우스[Gaius](다른 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음--저자)라는 이름의 로마인은 A.D. 160년, “모든 법률은,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자산에 적용되며, 절차에도 적용된다.”라고 썼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만족할만한 정부는, 이러한 법률의 집행, 또 그 법률을 집행하는 정부의 기관과 대리인들, 그리고 명령과 정의의 기초를 형성하는 이러한 법률들에 내재해 있는 정치적 골격 전체, 나아가 법전 원문에 나와 있는 법률 그 자체에 대해 관심과 우려를 갖는 정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실제로 이러한 법률 실현의 정치적 골격을 고안하고--비록 인간들의 야망과 급하고 불안해 하는 성품 때문에 예외나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약 500년 동안 이를 실제로 적용해 가면서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로마인 자신들은 그들의 정부가 “혼재된 헌법”을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정체에는 일부 민주정의 요소들, 일부 과두정의 요소들, 일부 독재정의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로마의 정부 체제는 단지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고려하지는 않고, 로마 사회의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모두 고려했다고 여겼습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미 하나의 계층에 의해 형성되고, 하나의 계층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정부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특히 아테네에서와 같은 “민주정”은 당시로서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에서와 같은 “과두정”은 귀족들의 이익에만 편향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로마인들은, 본능과 경험을 통해, 진정한 공화정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화정의 창설
요컨대 로마인들은 어떤 형태의 전제정에도 반대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원했던 정부의 형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되는, 잘 고안된 시스템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공화정을 도입한 초기에, 그들은 새로운 관직을 만들 때마다, 단순히 권력의 분산만을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자들의 권력을 관리하고 감시함으로써, 공직을 맡고 있는 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잠재적 전제 군주가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B.C. 350년경 호민관[The Tribunes] 제도가 만들어 졌을 때, 호민관들의 명백한 목적과 의무는 그들 자신들의 정부로부터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을 만든 것과 정확히 같은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정부 내의 다른 변화들도 유사한 목적들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로마의 문명과 로마의 정부는, 당대의 카르타고를 물리칠 수도 있었으며, 19세기가 될 때까지 ‘세상의 경이’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19세기 무렵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로마의 영광이 차츰 흐려지기 시작한 이유는, 새롭게 떠오르는 공화국, 바로 미국이 그들의 영광을 능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미국인들이 미소를 짓고 있기 보다 아주 심각하게 되새겨 봐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전 시대를 관통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던 나라 로마가 그 초기 공화정 시대에 가졌던 사상은 과연 무엇이었던 것인지를 깨닫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놀라운 재발견이 되겠지만, 로마의 위대함의 원천에 관한 논의, 곧 오늘날 미국을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논의가 B.C. 1세기와 A.D. 1세기 무렵, 로마에서도 제기되었다는 것입니다. 키케로[Cicero](B.C. 106-43, 로마의 정치가--역주)는 로마가 “최고의 정부 형태”를 가진 배경으로 “혼재된 성격의 헌법”을 거론했습니다. B.C. 2세기경 폴리비우스[Polybius](B.C. 208-125, 그리스 역사학자--역주)도 정확히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도 로마의 위대함과 승리의 원인을 정부 형태에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았던 리비[Livy](B.C. 59-A.D.17, 로마 역사학자--역주)는 자신이 살던 시기 악의 제국에 도달했던 로마가 과거에 위대했던 이유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질병도 없지만, 그 치료법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그는 “가족적 삶의 화합과 신성함, 아이들의 피에타스[pietas](또는 공경하는 태도--저자주), 모든 단계에 있어서 신들과 인간들 간의 신성한 관계, 경건하게 선언한 말들에 대한 존엄성, 금욕적 자기-통제, 그리고 그라비타스[gravitas](또는 무거운 책임감--저자주)”를 그 원인으로 들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익숙하게 들리십니까? [하톤: 마치 당신들의 삶의 방식은 이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정확히 오늘날 우리가 미국의 위대함에 대해 논의하는 것처럼, 많은 로마인들도 자신들의 성품과 자신들의 초기 환경, 그리고 자신들이 설립한 초기 정부의 성격과 우월성이 위대한 로마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에 대해 널리 논의하고, 이를 분명히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논의하는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세네카[Seneca](B.C. 4-A.D.65, 로마 제국시대 정치인, 네로 황제의 스승--역주)는 “견제와 균형이 없는” “민주주의”는 “전쟁이나 전제 군주보다도 더 잔인하다”라고 썼습니다. 윌 듀런트 박사[Dr. Will Durant]는 키케로의 언급들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했습니다. : “군주정은 전제정이 되고, 귀족정은 과두정이 되며, 민주정은 폭도의 통치[mob rule]이자 무질서(카오스)[chaos]이며 독재[dictatorship]가 된다.” 그리고 그는 대개 난폭한 군중에 의해 통치자로 뽑힌 자에 대해, 키케로[Cicero]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대담하면서도 비양심적인 자... 다른 사람들의 자산을 빼앗아 군중에게 나눠주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는 자” (강조는 추가된 것임--편집자주)
만약 이것이 뉴딜[New Deal](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정책--역주), 페어딜[Fair Deal](트루먼 대통령의 슬로건--역주), 뉴 프론티어[New Frontier](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역주)를 주장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면, 나는 여러분들이 어디서 그러한 자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키케로가 한탄했던 것은 바로 공화국의 파손, 어쩌면 우리가 경험해 오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확대시킨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선동가들로부터 공화정을 보호하지 못하는 점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미 공화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압력으로 인해 야기되는 파괴 행위인 것입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의 미국에 비해 로마 시대에는 이러한 압력이 음모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윌 듀란트에 따르자면, 버질[Virgil](B.C. 70-19, 베르길리우스, 로마의 시인--역주)을 포함한 많은 위대한 로마인들은 “시저[Caesar]가 로마의 공화정을 죽인 게 아니라, 계급 전쟁[class war]이 로마의 공화정을 죽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B.C. 50년경, 예를 들어, 살루스트[Sallust](B.C. 86-35, 역사가로 공화정 말기 내란 시기에 시저파에 속했던 인물--역주)는 인권보다 재산권을 우선시 했던 로마 원로원[Roman Senate]에 그 책임을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만약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살루스트에 대해 알았고, 그의 연설문들을 읽어 봤더라면, 그는 아마도 누군가를 시켜 살루스트를 고용하고, 자신의 유령 작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썼을 것입니다.
IV
약 30년 전 해리 앳우드[Harry Atwood](1870-1930, 미국 작가--역주)라는 사람은, 선동가들에 의해 우리의 정부 형태에 가해지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갖는 비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정확히 식별해 내고, ‘공화국으로의 복귀[Back To The Republic]’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훌륭한 책이었습니다. 앳우드씨는 아주 단호하게, 수 차례에 걸쳐, 미국의 정부 형태는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첫 번째 공화국’을 우리에게 건넸고, 바로 여기에 미국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앳우드씨는 이 ‘첫 번째 공화국’을 “표준 정부” 또는 좌파를 지향하든 우파를 지향하든 모든 다른 정부들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결국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중도 정부”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제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이는 단지 로마라는 명칭을 미국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한 것, 즉 이름만 바꾼 것일 뿐으로, 로마의 공화정이 민주정으로 전환되는 것에 관한 한, 앳우드가 쓴 책과 똑같은 책을 버질(베르길리우스)[Virgil]이나 세네카[Seneca]도 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끔찍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기꺼이 배우려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앳우드씨는 이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을 잘 활용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경험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헌법이 만들어지던 무렵, “공화정[republic]”과 “민주정[democracy]”의 의미는 잘 설정되어 있었고, 또 제대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받아들여졌던 의미는 로마와 그리스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는, 여러분들도 짐작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그리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겠지만--, 그 어원상으로도, 역사상으로도, 의미상으로도 유사하지 않습니다. 민주정(물론 사회적 의미가 아닌 정치적 의미에 있어서)이라는 단어는 항상 군주정, 독재정, 과두정과는 구별되는 정부의 형태 또는 그 원칙을 가리켜 왔습니다. 공화정이라는 단어는, 1789년 이전에는, 정부의 구조보다는 정부의 질과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타키투스[Tacitus](56-117, 로마의 역사가--역주)가 “공화정 형태의 정부는 박수받기는 쉬워도 이해되기는 어렵다”라고 불평했을 때, 그는 시저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 시대를 살고 있었고, 제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법률이 준수되지 않고, 헌법이 보호되지 않는 나라, 다시 말해 더 이상 공화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에 대해 한탄해 했습니다. ; 황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한탄한 게 아니었습니다.
‘민주정(민주주의)[democracy]’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국민에 의한 정부[government by the people]’라는 뜻입니다. 한편, “공화정(공화국)[republic]”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공공의 일[the public affairs]”이라는 뜻입니다. “연방[commonwealth]”이라는 단어는 한 때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며, 여전히 내가 살고 있는 주, “메사추세츠 연방[the Commonwealth of Massachusetts]”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가 갖는 원래의 의미의 거의 정확한 번역이자 그 연속이기도 합니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인은 오직 이러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공화정”으로 번역되었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상상 속의 “연방[commonwealth]”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 때 그는 분명히 이러한 유토피아가 어떤 종류의 정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가 자신이 설정한 제목에 의해 잘 전달되지도, 잘 드러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공화정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듀란트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자신이 법에 따라 통치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 이전의 “공화정”이라는 단어가 갖는 일반적인 의미에, 구체적으로 국민과 통치자가 모두 법에 구속되는 정부 시스템이라는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그 이후 역사 전체에 걸쳐 인정되고 적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부적절한 방식이나, 낙관적인 자기 기만 속에서, “베네치아 공화국[Republic of Venice]”이나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이라는 표현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1775년 초 존 아담스[John Adams]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그리스의 사고를 대표), 리비[Livy](로마의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택), 그리고 해링턴[Harington](영국의 정치인)과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화정을 사람이 아닌 법에 의해 통치되는 정부로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완전한 이해 속에 우리의 헌법 입안자들은 정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 구조에 따라, 국민과 통치자 모두가 기본적인 법률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법률들은 정부가 갖는 구조 속에서의 힘들고 신중한 개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하톤: 여기 이 문장에서 강조체는 내가 직접 넣은 것입니다!!!]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희망 속에 “공화정”을 수립했을 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1706-1790, 미국 초대 정치인--역주)은 우리는 이러한 정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각 주에게 보장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표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한에 따라 정부의 형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표현들이 가능한 한 영구적으로 적용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민주정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시대에 ‘민주주의의 해악[the evils of a democracy]’이 등장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으며,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 해악이 나타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지지하고 또 분명히 하기 위해 그들이 언급한 것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787년 5월 31일, 에드문드 랜돌프[Edmund Randolph]는 제헌 의회[Constitutional Convention]의 동료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대표들이 가져야 할 목표는 “미국이 겪어온 해악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악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모든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겠지만, 바로 민주주의의 시도와 그로 인한 소란에 그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것들
제헌 의회의 대표들은 이 진술에 분명히 동의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또 다른 대표였던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해악들은 민주주의의 과잉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국민들은 고결함[virtue]을 원치 않습니다.(말하자면 그들은 고결함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일 뿐인 것입니다.” 1788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자신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순수한 민주정은 만약 이를 실행에 옮길 수만 있다면 가장 완벽한 정부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경험에 따르자면, 이보다 더 틀린 진술은 없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직접 심의에 참여했던 고대의 민주정들은 좋은 정부의 특징이라고는 결코 단 한 가지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부가 가졌던 성격은 바로 전제정 그 자체였습니다. : 그들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해밀턴은 다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 “우리는 공화 정부를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전제정에서나 극단적인 민주정에서는 결코 보장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 “기억하십시오. 민주정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민주정은 이내 낭비하고 소진하며, 결국 자살합니다!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았던’ 민주정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헌 의회 의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민주정들은 항상 소요와 다툼으로 점철되는 장관들을 펼쳐 왔다. 민주정은 개인의 안전이나 사유 재산의 보장과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주정은 일반적으로 그 생존 기간이 짧았고, 죽음의 순간에는 늘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하톤: 당신들은 이러한 관찰을 아주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공화정을 그만 둔지는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는 민주정으로 돌아섰던 것입니다.--인류에게 알려진 최악의 상황들 속에서--당신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과마저도 컴퓨터로 뜯어 고쳐, 거짓과 조작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공화정을 수립할 것인가?
메디슨, 해밀턴, 제이[Jay]와 제헌 의회의 의원들이 준비하고 채택했던 헌법 속에는 민주정(민주주의)이라는 단어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정부 형태를 잘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은 너무 잘 알아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독립 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도 나와 있지 않으며, 50개 주의 주 헌법들 가운데 단 한 군데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이러한 헌법들은 주로 공화정을 수립했던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고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모두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주정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이를 원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그 근거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견제와 균형의 모든 정교한 시스템들을 살펴 보십시오. ; 주의깊게 만들어 둔 헌법 그 자체의 보호 조항들을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특히 ‘권리 장전[Bill of Rights]’으로 알려져 있는 첫 10개 조항을 검토해 보십시오. ; 이는 제퍼슨이 취한 노력의 일환으로, 헌법의 속박에 따른 폐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치가 아닌 법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가 갖는 최악의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차단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하톤 : 자, 그럼, 손가락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잠깐 휴식을 갖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제 7장, 기록 #2 하톤 1994년 9월 8일 목요일, 2:10 P.M. 8년 023일
1994년 9월 8일 목요일
계속 :
공화정과 민주정[REPUBLICS AND DEMOCRACIES] by 로버트 웰치[Robert Welch]
V
그리하여 우리의 공화정은 그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00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우리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은 이것이 바로 민주정이 아닌 공화정임을 알게 되었고, 이와 같은 정부 형태를 만들 당시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몇 가지 증거들을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합시다.
워싱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화정 형태의 정부 모델을... 보존하는 데에” 헌신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mas Jefferson]은 민주당을 창당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취임사에서 공화국 또는 공화정 형태의 정부 모델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단 한 번도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801년부터 1805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냈던 존 마샬[John Marsha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균형잡힌 공화정과 민주정 사이의 차이는 질서와 카오스의 차이나 마찬가지이다.”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아주 초반에 이르기까지, 공화국으로서의 미국은 점점 위대해졌으며,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나라 안과 밖의 많은 현자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던 공화정의 장점들을 가리키며, 우리가 어쩌면 빠져들지도 모를 민주정의 공포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19세기 중반 무렵, 위대한 영국 철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 영국 철학자, 사회학자--역주)는 ‘미국인들’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공화정은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정부 형태이다.--이와 같은 정부 형태는 현재 다른 어떤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 당시 우리가 가졌던 공화정을 계속 보존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높지는 않았으며, 이는 스펜서가 정확히 예언한대로였습니다.
그리고 민주정의 위험들
토마스 바빙턴 맥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1800-1859, 영국 역사학자, 정치가--역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나는 오랫동안 확신해 왔지만, 순수하게 민주적인 제도들은 머지않은 시점에, 자유 또는 문명 혹은 두 가지 모두를 반드시 파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그의 무서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합니다. 맥콜리의 주장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었고, 당대 사상계에 그 지적 뿌리와 근거를 두지 않고 한 언급도 아니었습니다. 약 2세기 전 드라이든[Dryden](존 드라이든, 1631-1700, 영국의 작가, 비평가--역주)은 이미 다음과 같이 한탄했습니다. : “역사상 그 어떤 정부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가로막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던 적이 없다.” 결국 그는 “민주주의라는 하찮은 제도에 이끌리게 되는” 국가들에 대해 언급했던 것입니다. 1795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민주정은 필연적으로 전제적이다.”
1850년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 영국 정치가, 작가로 총리 역임--역주)는 허버트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이미 영국에 드리워져 있던 일을 걱정하며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 “만약 여러분들이 민주정을 수립한다면, 적절한 시점에 민주주의의 열매들을 거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국가 예산이 엄청나게 증대될 것입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이성이 아닌 열정에 따라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불명예스럽게 획득하고 불명예스럽게 추구해온 평화에 굴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이며, 어쩌면 국가의 독립도 위태롭게 만들 것입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여러분들이 가진 자산의 가치가 절하될 것이며, 여러분들의 자유도 불완전해질 것입니다.” 만약 디즈레일리가 이러한 연설을 1835년 미 양원 합동 의회 앞에서 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보다 적절한 연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870년에 이미 그는 오늘날의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놀랄만한 진실’에 해당하는 풍자를 제시해 보였던 것입니다. [하톤: 기억하십시오. 이 연설은 1961년 가을에 있었던 것으로, 이미 33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디즈레일리의 시대에 대서양 건너 편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예언적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1819-1891, 미 정치가, 비평가--역주)이 무제한적인 다수결의 원칙이 갖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압제자가 될 권리를 준다.”
W.H. 슈어드[W.H. Seward](1801-1872, 미 정치가, 국무장관 역임--역주)는 “민주정은 전쟁에 뛰어드는 경향이 있으며, 전쟁은 민주정을 파괴시킨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관찰은 분명코 지난 50년간의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정확히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민주정으로 변모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던 것입니다. 민주정과 전쟁은 각각이 다른 것에 대한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03-1882, 미국의 시인, 사상가--역주)은 다음과 같은 예언적 경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 “민주정은 언론에 의해 분노가 억제된 악당들의 정부가 된다.” 만약 에머슨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서, 오늘날처럼 언론인 자신들이 바로 악당들의 일부이자, 악당들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아마 더 큰 불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톤: 그가 만약 오늘의 현실을 보게 된다면 아마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1880년대 뉴욕주 주지사였던 세이무어[Seymour](1810-1886--역주)는 우리 헌법의 장점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억제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대서양 건너편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 아일랜드 극작가--역주)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 “민주주의란 단순히, 국민의, 국민에 의해, 그리고 국민을 위해,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 우리 정부는 이미 퇴행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통찰력있는 관찰자이기도 했던 H.L. 멘켄[H.L. Mencken](1880-1956, 미국의 작가, 비평가--역주)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민주정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은 가장 민주적인 인물이 아니라 가장 전제적인 인물이다. 일반 국민들은 그러한 인물의 강요에 기뻐한다. 그들은 그러한 인물이 자신들의 보스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하에서 일반적으로 무릎을 곧게 펴고, 행진 대형으로 걷길 선호한다.” 루드비히 루이슨[Ludwig Lewisohn](1882-1955, 독일 태생의 미국 문학 비평가--역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민주주의는 시작할 때는 인간을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지만, 다수의 폭정을 통해, 그리고 다수의 견해라는 끔찍한 권력을 통해, 인간들을 노예화시키는 위험한 성향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하톤: 당신들이 내게,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돕거나 아니면 전쟁이라도 치러야 된다고 말했을 때, 왜 내가 불만을 표하거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던 것인지를 어쩌면 이제 당신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여지껏 민주정이 공화정과 동일한 것이라고 믿도록 세뇌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그저 엘리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을 성취해 나가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파시스트/사회주의/독재주의 체제의 신 세계 정부[New World Government], 바로 신 세계 질서[New World ORDER] 아래, 각계 각층에서의 민주주의를 돕고 증진시킴을 통해, 실은 인간성과 법을 조롱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이해했다면
우리의 공화정을 민주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노력 배후에 있던 기본적인 논리를 간파하고 지적했던 사람은 위대한 영국인이었던 G.K. 셸터링[G.K. Sheltering]이었습니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결코 민주정을 수립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정을 가져야만 한다.” [하톤: 모두 지금 주의깊게 읽고 있습니까?]
1931년 노섬버랜드 공작[the Duke of Northumberland]은 ‘세계 혁명의 역사[The History of World Revolution]’라는 자신의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모든 유럽 국가들이 정부 형태로 민주정을 채택한 것은 좋은 정부를 위해, 자유를 위해, 법과 질서를 위해, 권위에 대한 존중을 위해, 종교를 위해, 치명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민주정은 궁극적으로 카오스 상태를 야기할 것이며, 이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세계적인 전제정이 도래할 것이다.” 한편, 보다 최근의 분석가였던, 아치볼드 E. 스티븐슨[Archibald E. Stevenson](1884-1961, 미국 변호사--역주)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 “토크빌[De Tocqueville]은 한 때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 적이 있다. 만약 미국의 자유로운 체제가 파괴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일은 ‘다수의 무제한적인 폭정’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화국의 자유’라고 하는 미국의 이상에 매달리고, 민주정을 요구하는 유혹의 목소리에 넘어가지 않는 한, 다수가 그러한 ‘무제한적인 폭정’을 휘두르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실 정부 형태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정부 형태는 헌법 개정을 통해 항상 변경될 수 있다. 이것은 실은 우리가 보유한 체제의 기본적인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철학은 개인에게 새로운 존엄성을 부여해 주고, 소수에게 더 높은 수준의 안전을 제공해 주며, 정부는 보다 공정한 행정 시스템을 갖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민주정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커다란 실수가 될 것이며, 우리의 눈부신 유산을 잃어버린 채 심각한 위험에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민주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VI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유산의 점진적인 파괴를 허락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언제부터 그러한 일이 시작되었던 것일까요? 이 두 가지 의문은 밀접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민주정뿐만 아니라, 분명코 모든 공화정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씨앗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건강하게 형성되고 견고하게 유지되는 공화정의 경우에는 그러한 씨앗이 발아하여 자라나기가 훨씬 더 어렵고 더 오랜 시일이 소요되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공화정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 로마가 몰락한 것과 동일한 코스를 향해 나아갔고,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진짜 불만의 원인은, 그러한 재앙을 향해 나아가는 선동적인 길로, 음모자들의 손에 의해 우리가 지금 떠밀려 내려오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음모자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적인 정치적 진화의 결과로 인해 나아가게 되는 것보다 더 빠르고 더 신속하게 그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톤: !!!!!!!]
페이비언 음모자들[The Fabian Conspirators]의 도래
이 음모자들의 손이 이 땅에 처음으로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은 20세기 초반이었습니다. 페이비언(점진적 사회주의 사상--역주) 철학과 전략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넘어온 것이며, 그 이전에는 독일로부터 영국으로 건네진 것이었습니다. ‘대학간 사회주의 단체[the Intercollegiate Socialist Society]’ 구성원들 중 일부는 1905년 자리를 잡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산업 민주주의 동맹[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확대되었던 단체 구성원들 중 일부는 이미, 미국을 ‘단일 세계 공산주의 국가[ONE WORLD COMMUNIST STATE]’(신 세계 질서![NEW WORLD ORDER!])의 하나로 만들려는 국제 공산주의 음모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미국을 단순히 별도의 사회주의 유토피아 국가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고 보다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고 또 동의하고 있었던 점은 두 가지 중 어느 쪽으로 미국을 끌고 가든지 간에, 미국을 공화정으로 만드는 헌법상의 안전 장치들과 이에 내재한 철학은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처음부터 공화정을 민주정으로 전환시키려는 커다란 동력이 형성되었고, 또 이를 위한 두 가지 전략이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는 국민들로 하여금 우리가 한 때 민주정을 가졌던 것으로 믿고 추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은밀하게 공화정을 민주정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하톤: 이 전략은 먹혀 들어갔습니다!]
이 두 가지 방향성에 있어서 첫 번째의 뚜렷하고 유효한 진전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당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윌슨에 대해서는 타키투스[Tacitus] (56-117, 로마의 역사가--역주)가 자신의 로마 시대의 경쟁자에게 했던 말과 동일한 언급이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통치를 해 본 적도 없는 자이지만, 공동의 동의에 따라 통치를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윌슨이 두 번의 임기에 걸쳐 미국의 대통령직을 맡게 된 이래 발생했던 비극적 재앙들이, 공산주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윌슨 자신의 의식적인 지지에 따른 것인지, 혹은 그는 단지 허수아비로 에드워드 멘델 하우스 대령[Colonel Edward Mandell House](1858-1938, 정치인, 윌슨 대통령 참모--역주)의 도구였기 때문인 것인지를 정확히 분간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의 비중이 어떠했던 간에, 윌슨의 재임기,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의 권력이 공산주의의 계획들을 지지하고, 나아가 다른 나라들의 공산주의의 계획들도--특히 멕시코를 예로 들 수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서 그러했습니다.-- 함께 지지하는 데에 사용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진 소득세[progressive income tax]와 같은 막시스트 프로그램의 첫 번째 커다란 제도들이 미국의 시스템 속에 편입된 것은 물론 윌슨 재임기였습니다. 만약 로마인들이 보았다면 “혼합형 헌법”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지만, 공화정을 지향하는 우리 헌법을 파괴하기 위한 첫 번째 입법적 조치가 취해졌던 것도 윌슨 재임기였습니다. 윌슨은 상원 의원 선출에 있어 직접 선거제를 도입함으로써 우리 헌법을 동질적이면서도 물렁한 민주정에 맞도록 변환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엄청난 선전용 슬로건을 만들고 곳곳에 내걸어서,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도록 유도하고, 우리가 공화정을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도록 만든 것도 윌슨 재임기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슬로건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것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한 세계를 만들자[To make the world safe for democracy]”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 때 당시 충분히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아마도 어떻게 민주주의로부터[FROM democracy] 세계를 안전하게 지킬 것인지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대한 속임수와 거대한 음모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윌슨 시대에 이어 루즈벨트 시대에
음모자들은 천천히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자신들의 동료들과 어리석은 국민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가 있었던 초창기에 미국인들은 충분한 경고와 주의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움직임에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멀리 휩쓸려가지는 않았습니다. 역사를 되짚어 보자면, 제 1차 세계 대전의 흥분이 가라앉고 난 후에, 미국인들은 하딩[Harding] 대통령이 “정상 상태[narmalcy]”라고 불렀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시대에 형성되었던 선동의 향연과 미치광이들의 이상주의에 대한 반감, 달리 말하자면 우리를 궁극적인 재앙의 길로 내몰았던 이러한 초기의 밀어 부침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1920년대부터 소위 말하는 대공황이 있기까지의 시기에 페이비언 음모자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확장되고, 증폭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옴모자들이 심어둔 파괴의 씨앗들이 단순히 발아하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권력을 잡게 된 1933년, 공산주의자들이 조장하고 관리해 온 동력은, 궁극적으로 단일-세계 공산주의 전제정 앞에 미국이 굴복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프로그램들을 가동시켜 나가게 되었습니다.(‘하자르계 유태인들의 미 정부 침투사’ 참조--역주) 이 프로그램들을 위한 가시적이고, 실제적이며, 공세적인 절차들이 다시금 마련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톤: 멋진 소비에트 러시아의 탱크, 무기, 군인, 경찰, 군대 물자와 병력이 왜 미국에 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의아해하고 있습니까? 미국이여, 당신은 하나의 국가로서 이미 파산했습니다.--1933년 이래 공산주의 하자르계 시오니스트 (볼셰비키) 은행가들에게 팔린 것입니다! “무력” 장비들이 여기 들어와 있는 이유는 담보권 행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어쩌면 그들은 엄청난 유혈 사태도 선호할 것입니다!] 오늘날(1961년) 대부분의 보수주의 미국인들은 이러한 많은 절차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 의미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의 계획 속에는 미국의 공화정을 민주정으로 바꾸고, 또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공화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 채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두 가지 움직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1933년 이래로, 이러한 움직임과 변화는 기어를 올려 계속 내달려 왔던 것입니다. [하톤: 실제로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로서 왜 모든 도덕적 기준들을 뒤엎는 일이 필요했던 것인지를 이제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완전한 분열이 잘 조정된 채 전개되어 나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히피족들은 어쩌면 하나님만 알고 있을만한 행동들을 하면서, 젊은이들의 도덕적 태도와 가치관을 심각하게 무너뜨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이러한 작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항상 먹혀 들어 가는 것입니다!]
초창기에 있었던 성공적인 사례로서, 이러한 동력이 작동되었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두 가지 중요한 증거들을 잠깐 살펴보도록 합시다.
제복을 입은 모든 군인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1928년 미 육군 훈련 교본[the U.S. Army Training Manual]에 보면, 민주정에 대한 꽤나 정확한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 “대중의 정부. 대중의 모임 또는 ‘직접적인’ 의사 표현으로부터 권위를 얻게 되는 정부. 우민 정치의 결과. 자산에 대한 태도가 공산주의적임--사유 재산권의 부정. 법률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열정, 편견, 충동에 따른 심의와 통제를 거치며, 결과에 대한 제한이나 고려없이, 다수의 의지가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선동, 방종, 동요, 불만, 무질서의 결과”
이것은 1928년의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 제대로 된 정의가 삭제되고, 어떠한 중간 과정을 거쳐서 의미가 변경된 것인지에 대해, 내가 연구할만한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928년의 진술을, 같은 곳에서 같은 용도로 만든 1952년도의 진술에 나와 있는 것과 한 번 비교해 봅시다. 육군 야전 교본 부서[Department of the Army Field Manual]에서 1952년 6월 발간한 ‘군인 안내서[The Soldiers Guide]’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민주정의 정의 :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정부가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될 것인지는 국민 다수가 결정한다.--여기에는 육, 해, 공군도 포함된다. 국민은 대표를 선출함으로써 이를 이행하게 되고, 대표로 선출된 남자와 여자들은 국민의 뜻을 수행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대중 교리화의 매체를 통해, 명백히 기초적인 진실이 표면적인 선동으로 바뀐 사례로, 연방 정부가 공공 교육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후에 가능했던 일이며,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구상의 일부였을 뿐이며, 그 전체적인 구상은 1933년 이래로, 그 범위에 있어서 광범위하며, 그 실행에 있어서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보다 덜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깜짝 놀랄만한 묘사 한 가지를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전 뉴욕주 주지사였던 레먼[Lehman](허버트 헨리 레먼, 1878-1963, 미국 정치인, 1933-1942년간 뉴욕주 주지사를 4차례 연임--역주)은 1933년 자신의 첫 취임사에서 단 한 차례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사고의 기반 속으로 아직은 독이 흘러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935년 취임사에서 그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습니다. 마침내 독은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취임사에서는 “민주주의” 또는 이로부터 파생된 단어를 무려 25번이나 사용했던 것입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0년 1월 3일, 뉴욕주 의회에서 실시한 신년 연설에서 그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총 35차례 사용했습니다. 이제 이 독은 자신의 정치 철학 전반에 깊숙이 파고 들었던 것입니다.
[하톤: 그런데 당신들은 바로 이 “민주주의”를 통해 엘리트 은행가들이 정부와 국가를 완전히 통제하도록 허락했다는 사실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민주적인 투표를 시행하고 있지도 않습니다.--왜냐하면 당신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선출된다고 “믿는” 직위들에 정작 누가 뽑힐 지는 엘리트들에 의해 항상 미리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라구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고의 점진적 변화
오늘날에 이르러 이 똑같은 독은 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고 전체에 걸쳐 효과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주요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고 항상 민주주의 체제를 가져 왔다고 강조했습니다. 팜플렛, 책자, 연설을 통해, 학교와 설교단과 공중파 방송을 통해,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정치적 추종자들은 항상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며, 우리는 늘 그들의 고함에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또 너무나 오랫동안 반복되어 점점 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 이 ‘커다란 거짓말’의 분명한 사례를 살펴 보도록 합시다. 이 같은 커다란 거짓말은 정부전복적인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퍼뜨리지 않고서는 결코 그렇게 퍼져 나가지 않습니다. 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이 나라를 공화정으로 만드는 보호수단들, 전통, 그리고 정치 체제들을 파괴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 때문에, 그리고 이 기만의 선동들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외쳐온 것들이 서서히 서서히 진실로 탈바꿈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워렌[Mr. Warren](얼 워렌, 1891-1974, 미 연방 대법원장(1953-69) 역임--역주)[하톤: 그렇습니다. 그 동일한 늙고 부패한 워렌으로, 이 자는 16인 위원회[the Committee of 16]의 위원으로 A-1번입니다!]과 그의 대법원, 그리고 그들의 모든 동료들과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상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까지는 민주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하톤: 자 그렇지만, 만약 당신들이 지금 당장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를 영원히 땅에 파묻어 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방을 막는 손가락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 점점 덜 효과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화정을 지켜온 수많은 튼튼한 기둥들 가운데 이미 상당수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톤: 내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1961년의 연설입니다.--당신들은 항상 “민주주의”의 과정들을 거쳐 왔고, 이미 신 세계--단일 세계 질서[NEW WORLD-ONE WORLD ORDER]라는 덫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1912년 이래로 누진 소득세를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대로, 상원 의원들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방 준비 시스템이 설립되는 것을 지켜 봤으며, 이것은 우리의 중앙 정부가 신용, 이자율, 통화량, 통화 가치 등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갖도록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연방 준비 이사회는 사립 기관. ‘화폐, 세금 그리고 정부 부채’, ‘고리대업의 역사’ 참조--역주) 우리는 연방 정부가 이러한 수단과 권력을 이용해 검소한 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갈취해 가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돈을 전혀 검소하지 않은 자들의 손에 넘기고, 관료제를 확대시키고, 엄청난 빚과 국가 부채만을 늘리고, 사회주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한 모든 종류의 제도와 조치를 증진시키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우리는 연방 정부가 수 천만 에이커에 달할 정도의 토지 소유를 계속 늘려 나가고, 사업을 벌이고, 사기업들을 대체하거나 그들과 경쟁을 벌여, 여러 분야에 있어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최대 규모의 기업들을 보유하게 되는 과정들을 지켜봐 왔습니다.--모든 경우에 있어서 가장 비능률적인 기업들입니다. 우리는 농업 분야에서도 사회주의적인 통제로 인해, 독립 자영농을 꿈꾸던 농부들이 자신들의 꿈을 잃어버리는 과정들도 지켜봐 왔습니다. 우리는 중앙 정부가 공공 교육, 통신, 교통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구체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통제력을 행사해 나가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하톤: 이 글은 명백히 196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글입니다! 세계 시민들이여, 걱정하십시오.--이건 당신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알람 시계는 이미 울렸으며, ‘자유의 모래’는 다 빠져 나갔습니다.--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자유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남아 있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화정 그 자체
우리는 중앙 정부가 노조 위원장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 대가로 정부는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지만, 이로 인해 정부는 하나의 계층의 정부이자, 하나의 계층을 위한 정부가 되며, 전적으로 너무 과도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히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피하려고 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4번의 연임을 통해 계속 대통령으로 머물렀던 기간, 전체 공직자들이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현상이 끔찍하게 약화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은 어쩌면 우리 공화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그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최고위직 관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지위를 유지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가 공화정을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생겨났었습니다. 마리우스[Marius](B.C. 157-86, 로마 공화정 시기 정치가, 7차례 집정관에 당선--역주), 술라[Sulla](B.C. 138-78, 로마 정치가이자 장군,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 역임--역주), 폼페이[Pompey](B.C. 106-48, 로마 정치가, 장군, 크라수스, 시저와 함께 삼두 정치체제를 운영--역주)가 통치하던 시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율리우스 시저가 전 생애에 걸쳐 통치하게 되었을 때, 로마는 비록 공화정의 형태는 유지했을지언정, 실질적으로 자신들의 공화정을 파괴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 휘하의 수많은 자유주의자 허수아비들이 루즈벨트의 3연임, 4연임을 원했던 것은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미국의 공화정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행정부와 대법원이, 헌법에 의해 주의깊게 규정되어 있고, 또 헌법에 의해 분명히 보호되는, 주와 주 정부, 시 정부, 그리고 수많은 자치 단체들의 권리를 유린하고 파괴해 버리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예를 들어 연방 정부가 뉴욕주 뉴버그[Newburgh]시를 상대로, ‘뉴버그시는 복지 지원금의 무책임한 운영에 따른 예산 남용에 대해 어떠한 통제권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만약 제임스 메디슨이 듣는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 지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 내 임명직 공직자들과 관료 기구들이 전적으로 믿기지 않는 수준으로 증가해 온 것으로 지켜봐 왔습니다.--그러한 현상은 우리 헌법에 상세히 규정되고, 구체화되어 있는, 정부의 개념 그 자체에 완전히 반대되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부 내 한 기관이 다른 기관에 대해 효과적인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갖는 일이 거의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지켜봐 왔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지금 민주정으로 변모해 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톤: 이것은 이날 연설의 가장 억제된 표현이었습니다!]
민주정에서는 단순 다수에 따라 정부의 권력이 중앙집권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공화정의 적들이 우리에게 강제하려고 드는 정부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해리 앳우드[harry Atwood]가 1933년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시스템으로 “떠밀려”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속임수에 의해, 뇌물에 의해, 강압에 의해, 공포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음모적으로, 배반적으로, 모든 문명화된 세상이 가장 부러워하는 모델이기도 한 우리의 공화정을 파괴하고 있는 중입니다.
VII
끝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에 걸쳐 가장 독특한 제도인, 우리의 공화정과 또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의 우리의 삶이 갖는 두 세 가지 특징들을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우리의 공화정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수준으로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기회와 격려를 제공하는 제도입니다. 그리스인들이 법률에 대한 복종이 자신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미국인들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서 ‘사회 민주주의’가 가장 잘 꽃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전한 이유에 따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공화정에 의해 제공되는, 각 개인과 그들이 보유한 자산에 대한 보호는 모든 수준의 삶과 노동에 있어서 안정적 기반[the stable framework]을 제공합니다. 그 결과로 각 개인은 하나의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끝없이 이동하게 되어, 카스트와 같은 신분제는 불가능해지며, 그저 농담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회 민주주의’ 지키기
어쩌면 매우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미국의 공화정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췄던 시절에, 이 땅에는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다양한 측면에 있어서 동일한 조건에 있었고, 서로 간에 최소한의 적대감도 없었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번스[Burns](로버트 번스, 1759-1796, 스코틀랜드 시인--역주)의 유명한 시구인 “모든 것들을 뛰어 넘는 남자 중의 남자[a man’s man for a’(all) that]”(정직, 선, 인품, 훌륭한 사고력을 갖춘 자는 어떠한 높은 직함을 가진 자보다 낫다는 의미--역주)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으로 접어 들면서 등장한 지적 속물들과 권력에 취한 관료들이 입법과 강요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평등’을 강제하기 (자기 자신들은 제외하고) 이전, 미국이 멋진 시대를 구가했을 때에는, 이러한 표현이 의문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졌으며, 너무나도 진실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나는 아마도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유태인과 젠타일, 백인과 유색인,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학자와 노동자, 이들 모두가 진실되게, 그리고 모두가 서로서로를 상대로 두루 친절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증대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의해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되는 가짜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어리석은 조치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은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위대했던 공화정을 복구함에 있어서 커다란 진보를 만들어 내었음을 확신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면, 미국의 공화정의 원칙들 안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정부에 관한 모든 철학과 비교해 봐도 제게 정말로 새로워 보이는 것 한 가지를 살펴봤으면 합니다. 인류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특히 아시아 문명에 있어서, 모든 권위는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왕 또는 정복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왕의 신민들은 왕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절대적으로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문명권에서 발달된 법률이나 헌법적 조항들은 왕으로부터, 혹은 왕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애를 써서 얻어낸 양보들이었습니다. 보다 근대의 유럽 국가들의 경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 그렇게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통치자의 궁극적인 권위는 왕이 갖는 신권으로부터, 또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신성을 대표하는 교황에 의해 통치자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리스에서 시작된 진정한 서구 문명에 기반한 사고의 흐름은, 다시 발현되고,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중단되는 듯 보이다가도 이내 힘을 되찾곤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한 국가의 국민이 자신들이 직접 세운 정부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러한 정부는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동의로부터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각각 어떤 권리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국민들 모두가 함께 세운 정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그 궁극적인 권리들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정치 체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 정부와의 빅딜에 달린 문제였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정부의 권력과 권위와 권리는 국민 전체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각 개인이 갖는 권리들은 정부로부터 유도되는 것으로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UNALIENABLE RIGHTS]”
동양과 서양, 양쪽 모두의 이 기본적인 정부 이론들 안에는, 미국 독립 선언문에 공표된 어떤 원칙들에 따르자면, 실제로 결코 수정될 수 없는 원칙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칙들이야말로 우리 공화정의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정부로부터 유래되지 않은, 어떤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인간의 자연권’, 또는 ‘각 개인이 갖는 신성한 권리’에 따라, 주권을 가진 정복자뿐만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권력이나 권위를 사용함에 있어 제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도할 수 없는[Unalienable][하톤 : 오늘날 사용되는 ‘양도할 수 없는[IN-ALIENABLE]’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unalienable과 inalienable간의 의미상의 차이는 없으나, unalienable은 1830년 이전에 미국에서 보다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특히 미국 독립선언문에 직접 등장하는 표현으로, 원전이 갖는 의미라는 점이 보다 강조된 표현--역주) 권리이자, 신성한 권리들은 정복자의 칙령은 물론이거니와, 다수결에 따른 투표에 의해서도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국민 투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만장일치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옳은 것, 또는 공정한 것을 만들어 내거나 창조하거나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하는 말이면 다 옳거나 공정하다고 여기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초기의 그리스인들이 자기 자신들이 만든 법률을, 통치자들도 자기 자신들도 따르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배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람들도, 주권을 가진 국왕도, 주권을 가진 국민들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양쪽 모두가 준수해야만 하는, 보다 영구적이고 영속적인 법률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배워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법률들을 지키는 정부는 오직, 인간을 만든 창조주 혹은 이 우주로부터 전해지는 신성한 계율과 자연의 법칙들에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는 정부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그 원칙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존재해 온 모든 정부 이론들에 추가되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이것이야말로 미국 공화정을 만드는 초석이자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최소한 묵시적으로라도 인정되어온 원칙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론 국민의 권력 안에 변경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고는 민주주의의 이론에 있어서는 대단히 낯선 것이며, 실제로 민주주의를 적용함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기조차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은 궁극적으로 공화정과 민주정간의 많은 차이점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원칙이 없다고 한다면,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정부냐에 따라서, 노예제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 하에서는 노예제를 수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공화정은 이러한 원칙이 작동했던 최초의 위대한 사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화정을 지켜야만 합니다.
요약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하고 또 언급했다시피, 민주주의란 선동과 끝없는 사기를 위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입헌 공화정이야말로 지금까지 인간이 고안해 낸 최상의 정부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가장 현명했던 로마인들도 이미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이 가장 멋진 모임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미국인들이 이 모임에 참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어디에서나 이야기하고, 여러분들 모두에게,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답은 공화정입니다. 민주정이 아닙니다. 다 같이 우리의 공화정을 지켜냅시다!
[하톤: 너무 늦었습니다.--지금에 와서 당신들이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아가려 한다면, 아마 당신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를 버텨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합니까?]
***
하톤: 당신이 당신의 머리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까지, 당신 자신과 당신의 나라는 파멸의 경사면을 따라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미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또 메신저들을 보내십니다.--당신들이 스스로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이들 메신저들을 살해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법 아래 구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과거 ‘공화정’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을 통해, 특히 국민과 그들의 통치자들이 공히 법에 구속되는 정부 시스템에 대해 ‘공화정’이라 명칭을 붙여 이러한 정신을 구현했다.”
“우리 헌법의 입안자들은 이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부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러한 정부의 뼈대를 구성함에 있어서, 국민과 그들의 통치자들이 분명하고 기본적인 법률들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그리고 그 법률들은, 아주 많은 공을 들이고 심사 숙고의 과정을 거쳐 그 정부의 뼈대를 변경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법률들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위로 되돌아 가서 이 문단을 읽고 또 읽어서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다음을 잘 기억하십시오. : “우리는(미국은) 공화정 국가이다. 진정한 자유는 전제정에서도, 극단적인 민주정에서도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기억하라. 민주정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민주정은 이내 낭비되고, 고갈되고, 스스로 자살하게 된다! 역사상 “자살하지 않았던 민주정”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09권 (미간행 저널), 제 6-7장, pp.43-60.
http://www.fourwinds10.com/unpublished_phoenix_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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