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야 (前夜)

리스본에서 교역품으로 샀었던 아몬드와 서양서적은 모건이 1.5배의 가격으로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비워진 창고에는 모건의 배에 실려있던 40상자의 무기들이 실려졌다. 포탄과 총,
대포등의 종류로 구비되어진 교역품은 큰 충격을 받아 터지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창고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의 일은 금지되었다.
모건은 본인 대신 바르셀로나로 배달을 한다는 사실을
배달을 부탁했던 부호에게 알리고 앙리에트에게 허가증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앙리에트 선장님."

"자네도 수고 많았네. 이제 좀 어깨의 짐이 덜겠군."

"선장님 덕택이지요.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가는 길에 기항지이고, 어차피 지나치게 될 거니까. 그 김에 해주는 것 뿐이니
너무 감사해 할 필요는 없어. 감사라면 급한 계획 변경에 고생한 일항사와 선원들에게 해야겠지."

"그 분들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대신 감사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가 보겠네."


항구에서 손을 흔드는 모건을 뒤로하고 앙리에트가 퍼플 세이렌에 올랐다.
길레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더이상 그녀의 결정에
뭐라 대꾸하는 일은 없었다. 출항 선언을 하고서 멀어지는 세비야를 뒤로했다.
말없이 갑판 상태를 점검하는 길레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나즉히 한숨을 내쉬었다.


"삐친건가?"

"누가 삐쳤다고 하는겁니까?"

"자네 말야, 자네. 사내가 돼서 그렇게 꽁하게만 있으면 쓰나.
어차피 결정된 사항이고 주사위는 이미 굴려졌으니 이제 그만 순순히 받아들이는게 어때?"

"그런게 아닙니다."

"그럼, 후회하나? 이 배를 탄것을?"


무덤덤한 앙리에트의 말에 길레스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앙리에트는 자신이 말이 심했음을 깨닫고 아차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식으로 왈가부가 하실 거면 다음 기항지에서 내리겠습니다."


그리곤 몸을 휙 돌려 갑판을 떠났다. 앙리에트는 머리가 아파지는것을 느꼈다.
상대방이 심통을 부리는게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 그를 시험하는듯한 발언을 해선
안되는 거였다. 선장은 누구보다도 일항사를 믿어야만 했다.


일항사는 어찌보면 선장보다도 더 중요한 배의 구심이었다.
일종의 부부와 같은 관계인 것이다. 일항사가 배에 오르기로 했다면,
선장은 배의 전반적인 사항을 책임지는 일항사에게 신뢰를 보여야 했다.


그것이 많은 일을 하며 선장이 일일히 돌아보지 못하는 곳 까지 챙겨봐야하는
수고를 감내하는 일항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였다.


"뭐야, 싸우기라도 한거야?"
"에밀리오."


선내에서 어슬렁 걸어나온 한 남자가 길레스가 향한 방향과 앙리에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에스파니아 출신의 의사로, 지금은 퍼플 세이렌의 선의인 에밀리오였다.


선의라곤 하지만 늘 한손에는 술병을 쥐고 술 마시는것을 낙으로 삼는지라
선원들의 의심을 사곤 했지만 어찌됐건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 역시 여급시절부터 알고 지낸 남자였다. 에밀리오는 갑판으로 나오려다 햇살에 눌려 비틀거렸다.


"우왓, 햇살 봐라. 어지럽구만."

"주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계속 배에 처박혀 있기만 한건가?"

"귀찮게스리. 어차피 술이야 애들이 가져다 주니까 상관없어.
옷에 곰팡내 날까봐 나온거야. 그래서 우리의 일항사님은 상처받고 삐치신건가?"

"말을 좀 심하게 한 것도 있어."

"뭐, 부부가 싸우지 않고만 지낸다면 그게 어디 부부겠나. 그럴 때도 있는 법이야.
그냥 보통 뱃사람보다 생각이 많고 섬세하고 젊을 뿐이니 너무 걱정 마라. 어디 아픈덴 없지?"

"괜찮아."


에밀리오가 비척비척 앙리에트의 곁으로 다가와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 항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니 건강 관리를 잘하도록- 아이구 허리야......"


그리곤 다시 비척거리며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경을 써준 것이다.
너저분한 붉은 머리를 벅벅 긁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선장님, 갈매기가 꼬이는데요. 낚싯줄이라도 드리우는게 어떻습니까?"


한 선원의 말에 마스트 위로 고개를 올리자 어느새 갈메기떼가 끼룩거리며
배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갈매기가 주변을 맴돈다는 것은 배의 근해에
한참 어류가 많다는 의미였다. 이런 때에 낚싯줄을 드리우면 많지는 않지만
고기가 잘 낚인다. 앙리에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원을 시켜 창고에서 낚시도구를 꺼내오라 일렀다.


배는 천천히 지브롤터 해역의 내해로 들어가는 좁은 물길을 거슬러가기 시작했다.
바람도 어느순간부터 역풍으로 바뀌어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선원들이 정어리를 잡았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즐거워 하는 모습을 선상에서 내려다보며 해가 저물어가는 저편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시간이 끝나고, 잠드는 시간이 도래한다. 낚시에 열중인 선원들을 물리고 브랜디 한병을 땄다.


"다음 기항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길레스는 아까보다 차분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생각 정리라도 하고 온건지, 속으로 삼킨건지는 모르지만
낮처럼 불만에 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글쎄. 이대로 가면 말라가가 보일테지?"

"말라가를 지나면 발레아레스 제도입니다."

"팔마쯤에 기항하는게 좋겠군. 기항하기 전에 덤벼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바르셀로나 근해는 아닐겁니다. 말라가와 팔마 사이쯤이겠지요.
지브롤터에서 발레아레스 로 넘어가는 즈음에는 적들이 매복하기 좋은 장소일테니까요."

"머리는 좀 식혔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을 뿐입니다."


잠시간 적막이 오갔다. 앙리에트는 미소지으며 잔에 브렌디를 따라 건네주었다.
술은 잘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던 길레스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앙리에트가 어떤 의미로 건넨 술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거절하는건 도리가 아니다. 잘 정제된 브렌디의 향이 코를 찔렀다.


"날 따라오게."

"약속을 한 건 저였습니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두고보지."

"제가 할 소리를 하시는군요."


한마디도 지려하지 않는 남자다. 그녀가 웃으며 브렌디 병을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어둠이 깔리고 고요한 바다를 헤쳐가는 물결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혔다.
지중해의 바다는 별을 물결의 표면위에 아로새긴다. 리스본 북으로 가
북동 대서양을 조금만 벗어나도 바다는 어두운 심해가 되어 별을 그 속으로 빨아들인다.
바다는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다르게 비추어낸다.


"매일 매일 바다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바다가 지겹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되네."

"그럴리가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바다를 벗어나지 못하는걸 보면 부질없는 투정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어찌 떠날 수 있겠나......"


나즈막히 중얼거리며 상념에 잠기는 앙리에트의 곁에서 길레스 역시
늘 보던 바와 같은, 그러나 다른 바다를 응시했다. 낮에 앙리에트의 말에
화가 났었지만 뒤돌아서야 그녀가 본의로 그런 말을 했을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앞으로의 항로에 불안을 느낀 자신의 과한 불안의 문제임을 직시했다.
보통 배 같았으면 당장에 때려치라는 소리를 들어도 무관했을 것이다. 여급 출신이라 무던한건지,
그저 초짜 선장으로 아직 권위가 박히지 않은것인지는 모르지만 길레스에게서는 이 상황 자체가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상황이었다. 복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길 때 쯤 앙리에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좋은 일항사니까."


핫, 하고 놀라 정신을 차리자 앙리에트는 길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선내로 향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어졌다.


상대가 고단수임을 잠시나마 망각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길레스는 억울한 마음과
후련한 마음으로 웃었다.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갤리온급 상선의 일항사였던
구질구질한 예전을 크게 심호흡하며 쓸어내린 후 그녀의 뒤를 따라 선내로 들어섰다.


할 일은 많았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기습에 대비해 경계를 철저히 해야했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도 해야했다.
그리고 발레아레스 해적이 들이닥친 것은 길레스가 예측한대로
말라가를 지나 팔마를 향하는 도중에 일어났다.



#3. 기습


댕댕댕-
기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듯 앙리에트가 선장실에서 나와
갑판으로 향했다. 일출 전, 하늘빛이 어스름하게 밝아질 무렵이었다. 아침녘의 물안개가
고즈넉히 깔려있는 이 시간대가 습격하기 좋은 시간대임은 이미 예측해 두고 있었다.
갑판위로 올라가자 먼저 나와 지시를 겸하고 있던 길레스가 앙리에트에게 망원경을 넘겨주었다.


"우측 4시 방향입니다."

"몰래 뒤를 밟은건가. 요령도 좋군. 함대는?"

"안개에 쌓여 확인은 안되었습니다만 소형 캐러벨 두대일 겁니다.
허나 돛조종이나 운행이 조잡하니 이쪽의 속도와 선회는 따라오지 못할걸로 예상됩니다."

"좋아. 포실로 들어가라! 돛을 조종해! 우측 1시 방향까지 돌린 뒤
포격 사정리에 들여라! 일항사. 포실을 부탁하지."

"예."


선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물길을 따라 운행되던 배가
조금 큰 요동과 함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머지않아 안개속으로
두 대의 작은 캐러벨이 초록색 무늬의 돛을 매달고 나타났다.
육안으로 확인될 거리가 될 때 이미 포실은 포격 준비를 모두 갖춰두고 있었다.


"저쪽은 아직 이쪽이 기습에 대비했다고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선회를 중지!
적이 선회하기 전까지는 이 방향으로 진행한다. 우측 발레아레스 해적 일함, 포격!"


힘있고 낭랑한 앙리에트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자, 배에 요란한 진동을 남기며
우측 8문의 대포가 발사되었다. 화약의 잔흔을 남기고 날아간 여덟발의 대포는
그대로 발레아레스 해적의 선수를 직격했다.


큰 요동이 생기며 상대편의 함선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선수를 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선수를 맞게 된 해적들은 당황하는듯
하다가 서서히 배를 선회시키기 시작했다.


"선장님! 적 일함이 좌측 7시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그 뒷편으로 이함이
포격 사정거리 밖에서 반대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쌍방에서 칠 생각일 모양이군, 그렇다고 꽁무니나 앞을 내 줄수는 없지않나.
3시 방향까지 선회해! 좌측으로 들어오는 공격은 장갑으로 잠시간 버틴다!"

"대포 장전 완료됐습니다!"

"적이 완전히 선회하기 전에 격멸시켜야한다, 쏴라!"


큰 타격을 입은 일함의 선회 속도는 퍼플 세이렌의 선회속도에 미치지 못했다.
빠르게 방향이 틀어져 발사된 두 발째의 포격은 적 일함의 우측 선미에 가까운 정수리에 박혔다.
선발만큼의 타격은 주지 못했으나 배는 거진 파괴 직전으로 선회를 멈추고 자리에서 멈춰섰다.


최후 세 발째의 장전을 기다리는 동안 퍼플 세이렌의 선체가 요동쳤다.
반대편으로 선회했던 이함이자 기함이 틈을 노리고 포를 발사한 것이었다.
중심을 잃어 넘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돛의 기둥을 잡아 안정시키고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피해상황은?!"

"포실 상단의 선체가 파손되었습니다만 운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포탄의 요동에 조심해! 저들의 포탄은 우리 배의 장갑을 뚫을 위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해라, 포실 준비됐나!"

"장전 완료됐습니다!"

"일함을 향해 포격!"


세 발째의 포격이 물 위에 잔상을 남기고 일함의 선체 정 중앙을 부쉈다.
일함의 배는 더는 항해할 수 없을만큼 너덜너덜해져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반대편 포문으로의 이동은 이함의 포격 이후로 한다!
11시 방향으로 급선회! 갑판위의 선원들은 중심을 잃지 말도록!"


지시를 함과 동시에 다시 적의 포탄이 배를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포격은 붉은 소나무 재질의 선체 장갑의 일부 파손했을 뿐
퍼플 세이렌 자체에 큰 타격은 주지 못했다.


포실에서는 선원들이 반대편으로 달려들어 장전을 준비했다. 급격한 선회로
파도와 바람의 마찰이 심해 선원들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런 전투에는
숙련된 이들인지라 당황하지 않고 돛을 바꿔 펼쳐 반발력을 최소화 시키도록 움직였다.
선원들의 빠른 대응으로 퍼플 세이렌은 큰 어려움 없이 이함과 평행을 그리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연거푸 반복되는 포격은 퍼플 세이렌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선측포 8문은 상대방의 포문수와 비슷했지만 관통력과 범위는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대포는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또 군인은 각 포가 가지고 있는 효율적인 사정거리를 대포의 각도와 위치,
적의 위치등을 계산하여 조금 더 늘릴 수 있는 탄도학을 기본 과정으로 익힌다.
기함이 갑자기 퍼플 세이렌의 측면쪽으로 선수를 돌려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최후의 선택이었다.


"선장님! 적이 곧바로 선회해서 다가옵니다!"

"포술로 안되니 백병전이라도 걸 생각인가보지. 순순히 안될걸,
좌측 발레아레스 기함, 선수 정면을 향해 포격!"


물의 흐름이 퍼플 세이렌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적함은 머지않아
퍼플 세이렌의 선체에 몸을 비빌 것 같았다. 앙리에트는 최후의 포격 지시를 내렸다.
좌측의 8문이 불길을 뿜고 자살행위처럼 달려드는 해적의 선수와 그 주위를 함몰시켰다.


"적 기함 침수 발생!"

"와 주신다는데 거절하는건 도리가 아니지. 포실 최소 인원만 남고
갑판으로! 바보같은 해적들에게 맛을 보여줘라!"


사기가 만전으로 올라있는 선원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상대방의 배에 올라탈 조교를 준비하고
장비를 갖추었다. 침수가 일어난 기함은 침수를 어찌 수습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퍼플 세이렌의
선수에 힘선의 선수를 부딪쳤다. 조교가 놓여지고 선원들이 함대를 향해 돌격해갔다.


앙리에트도 매어두었던 검집에서 에스터크를 뽑아든 후 조교를 대번에 밟고 들어가
덤벼드는 해적의 조잡한 검법에 응수했다. 선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은 반면
해적들의 사기는 금세 도망치지 않은게 장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용감히 싸우려는 의지보다 얼른 도망치거나 항복하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다.
이럴 경우 비슷한 인원이 맞부딪쳤을 때의 결과는 이미 나온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길, 도망치지마! 싸워!"


혼란의 중간에서 몸집이 우락부락한 한 사내가 갈팡질팡하는 선원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가 선장이자 두목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앙리에트가 달려들어 그의 틈을 비집고
에스터크를 찔러 들어갔다. 위협의 순간 기지를 발휘했는지 해적 두목이 가까스로 어깨를 돌려 피했다.


"자네가 두목이로군. 결과가 이미 명백한데 항복하는게 어떤가."

"누가 항복 따위 한대!"


커틀러스를 휘두르는 두목의 솜씨는 조잡하긴 했지만 풋내기는 아니었다.
에스터크로 미끌어지듯 상대의 검을 흘려보내며 갑판을 가로지른다.
앙리에트가 주변 상황을 읽은 후 멀찌감치 떨어졌다.


"주변을 돌아보시지. 이래도 항복하지 않을건가?"


이미 두목인 그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해적 선원들이 죽거나 잡혀있었다.
일부는 스스로 항복하고 무기를 던진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이를 악물고는 커틀러스를 떨궜다. 항복의 의사였다. 선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앙리에트가 한숨을 내 쉬며 선원들에게 지시하려 몸을 돌렸다.
저편에서 길레스가 조교를 타고 건너오고 있었다. 그에게 웃으며 대꾸하려 한 순간,
길레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선장님!!"


커틀러스를 떨궜던 해적의 두목이 등 뒤에서 단검을 꺼내들고 앙리에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해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선원들이 서둘러
그를 잡으려 했지만 두목이 사력을 다하여 휘두른 단검은 그녀의 얼굴 반신을 스쳐 지나갔다.


피가 솟구치고 두목은 달려든 선원들에 의해 완전히 포박당했다.
앙리에트의 얼굴의 왼쪽 반절이 피로 물들었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것을 달려온 길레스가 부축했다.


"선장님!"
"방심했어, 괜찮아. 마지막에 경계를 놓아버렸던 부실함에 대한 응당한 처사야.
두목을 포박해, 항복한 이들도 묶은 뒤에 퍼플 세이렌으로 옮기도록.
팔마에 들러서 이들을 넘긴다."


왼쪽 얼굴을 손으로 가린채 다시 의연하게 서서 지시를 마무리한 앙리에트가 조교를 건너
배로 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으로 선의인 에밀리오가 비척대며 갑판으로 나왔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앙리에트가 가린 손을 치워 그녀의 상처를 들여다 보더니 길레스를 돌아보았다.


"나한테 맡기고 자넨 얼른 뒷정리나 해. 일항사잖아."

"허나-"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니 걱정말고. 선원들이 동요하면 못써."


뭐라 대꾸하려는 길레스를 저편으로 가라는 손동작으로 밀어버린다.
앙리에트가 남은 오른눈으로 고개를 끄덕하여 수긍의 뜻을 비추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조교로 넘어가 선원들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까지 지켜본 에밀리오가 갑자기 돌변하여
그녀의 손을 이끌고 선의실로 그녀를 거칠게 끌고가 의자에 앉혔다.


"그렇게 큰 상처가 아니라니, 나중에 거짓말인거 알면 길길이 날뛸거 같은데."


앙리에트가 웃으며 상처의 피를 닦아내는 에밀리오에게 말했다.
에밀리오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반대쪽 볼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쳤다.


"웃을 일이 아니잖아. 눈은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하마터면 애꾸가 될 뻔했다."

"애꾸눈의 여선장이라니, 나름 멋지겠는걸."

"말은 잘 한다. 상처 봉합해야하니 이 악물고 참아. 흉터가 제법 크게 남을텐데 시집은 다 갔구만?"

"배에 탔을 때부터 그런건 이미 포기했어."

"말은 잘한다."


앙리에트의 손에 상처를 누르는 거즈를 쥐어준 후 에밀리오는 상처 봉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선의실 창 바깥으로 선원들의 들뜬 목소리가 새어들어왔다.
큰 동요가 없어 보이는것은 길레스가 잘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의 배에서 건져낸 물건들을 보고 즐거워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기분좋게 귓가에 어른거렸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쳐와 상처의 아픔도 잊게 만들고 있었다.


"이겼군."

"고작 졸개 해적들이었지만 말이지."

"너무하는데. 나는 그래도 굉장히 긴장했어.
저 정도 급의 배와는 이제까지 맞붙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런 배는 오합지졸에 불과해. 바다를 여행할수록 더 엄청난
중, 대형선들이 득실댈텐데 이런데서 벌써 긴장하면 쓰나."

"그런가......"

"뭐 그런 바다로 나갈때 쯤이면 너도 더 큰 배를 타고 있지 않겠나.
결국 더하기 빼기 0 이라는 소리지. 그래도 너무 긴장 풀지마.
오늘 같은 일이 몇번씩이나 있으면 곤란하다고.

하여간 선장이라는 사람은 여러가지 의미로 강하고 고독하고 믿음직스러워야 하는 족속들이니까.
더욱이 군인이라면 더 그렇겠지. 지금은 아직 인원이 적어서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나중에 인원이 몇십명, 백여명 이런식으로 늘어나게 되면 오늘 같은 실수는 수습하기가 어려울거야.

좀 더 자각해."

"......"

"그래도 다른 선원들이 어디 다친데가 없는게 다행이로군. 그건 칭찬해주지. ......듣고있냐?"


대꾸가 없기에 뒤를 돌아보자 앙리에트가 벽에 몸을 기대고 쓰러져 있었다.
놀라서 얼른 달려가보니 과도한 긴장과 상처와 한번에 많은 피를 흘린 여파로
기절한 것 같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끌어 침대에 뉘였다.


정신이 멀쩡할 때 아프게 봉합하는 수고를 덜었다는 마음으로 어깨를 으쓱 하고선
앙리에트의 흉물스럽게 찢어진 얼굴의 상처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그 전투는 퍼플 세이렌과 앙리에트 선장의 공식적인 첫 전투의 승리로 항해일지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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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편 연달아서~ ^^;
지금 생각하면 이젠 강습도 안걸어오는(...) 쪼렙 몹들인데 당시에는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군인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라 전투들이 더 재미있었고 즐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

- 앙리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