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라시아 시즌3, 평범한 유저 ‘루엔’의 생존기록




[1주차 - 정체된 시간]


루테란 구시가지, 오늘도 골목은 조용했다.


광장 중앙에선 몇몇 모험가가 보석을 감정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오래된 기계처럼 무표정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일지를 펼쳤다.


페이지 첫 줄엔 이렇게 적었다.


“노력은, 아직도 보상을 의미하는가.”


과거 이 땅은 달랐다.


성장은 느렸지만 ‘노력’은 통했다.


매일 숙제를 하고, 던전을 돌고,


그렇게 모은 자원으로 장비를 재련하고, 또 강화하고.


그 끝엔 최고 난이도 레이드라는 보상이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목표는 같았고, 차이는 속도뿐이었다.




[2주차 - 선언]


어느 날, 아크라시아 정부는 **“시즌3 개막”**을 선언했다.

새로운 보석, 유물 각인서, 팔찌.


이제 모험가들은 새로 설계된 길을 따라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스템은 그 즉시 적용되었고,


가격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유물 각인서 하나가 수십만 골드를 넘었다.


시즌2 시절, 내가 한 주 모아야 겨우 될까 말까 한 골드였다.


레벨이 아닌 ‘재력’으로만 뚫을 수 있는 벽이 생겼다.


나는 ‘성장’이 아니라, ‘진입권’을 잃었다.


한동안은 기존처럼 살아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와 같은 평범한 모험가들은


매일 열심히 레이드를 돌고, 숙제를 하고,


정직하게 골드를 벌며 버텼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골드로는 하나도 살 수 없었다.


모두가 새 시대에 진입하려는 수요에 몰리자, 가격이 폭등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라는 말이 무색하게,


단 한 주의 생산 활동으론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시대가 왔다.




[3주차 - 보조금 경제]


초창기, 모두는 여전히 희망을 가졌다.


레벨을 올리고, 골드를 벌고, 상위권을 꿈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바뀌었다.


사람들은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안 되는 거, 그냥 보호자 신청하자.”


“수수료 조금만 내면, 스펙업 필요 없잖아.”


“고생해서 번 골드와 같아.”


‘보호자 제도’라는 명목 아래,


성장하지 않고도 일정한 보상이 지급되는 시스템이 생겼다.


일명 “보호자 시스템.”


초기엔 극소수만 이용하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곧 평범한 유저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선택이 되었다.


“스펙업 하느니, 보호자나 구하자.”


한때 용맹하던 모험가들은

이젠 보호자에게 의지하며, 성장 하지 않게 되었다.




[4주차 - 붕괴의 전조]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레벨업, 장비 세팅, 에기르, 아브렐슈드.


언제부턴가 내 노력이 ‘성장’이 아니라


‘정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이 되었다.


상위권에 있는 친구 ‘레이나’는 말했다.


“난 유물 각인서 2개 샀는데, 이번 주 보상이랑 거의 차이 안 나더라.”


그녀는 재투자 비용만 60만 골드를 넘겼다.


하지만 그녀와 비슷한 보상을 받는 모험가는


보호자 신청 하나만 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게임을 끄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바보인가.”


처음 든 생각이었다.




[5주차 - 자산의 대이동]


시장에선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골드를 쓰지 않았다.


골드는 점점 쌓여갔고,


골드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다.


한때 아크라시아에 입국했던 부유한 모험가들 —


‘피닉스 서버의 상단주’, ‘룬세나 상단 대표’ 같은 이들 —


그들은 하나둘 씩 자산을 현금화하고 이민을 떠났다.


누군가 말했다.


“이 나라 망하겠는데?”


내 대답은 없었다.


이미 망해가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6주차 후반 - 붉은 광장]


그래서였을까.


그 주 금요일, 루테란 중앙 광장에서 시위가 열렸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 땅을 묵묵히 지탱해온 중산층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이 피켓을 들고 외쳤다.


“우리는 아크라시아의 기둥이었다!”


“왜 아무리 해도 유물 각인서는 살 수 없습니까!”


“실질적 보상 구조를 조정하라!”


그들의 외침은 절박했다.


그러나 광장 바깥에서 이들을 바라보던 초보 모험가들


웃으며 말했다.


"와, 또 선발대 호소인 등장ㅋㅋ"


"쟤넨 아직도 진심으로 게임함?"


"그냥 보호자 받고 즐기면 되지."


그 말에 몇몇 시위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 땅을 떠받쳐온 노력은,


이제 ‘비효율’이 되었고


‘조롱’이 되었다.


그날의 광장은 조용히 흩어졌고


그 후로 다시는 그런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7주차 - 선택의 기로]


오늘, 친구 ‘제르’에게서 편지가 왔다.


“여긴 괜찮아. 너도 와. 아크라시아는 끝났어.”


그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떠난 모험가였다.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바보같이, 아직 이 땅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8주차 - 조용한 거리]


며칠 전부터 뭔가 이상했다.


예전엔 밤마다 돌아가던 레이드 파티 모집 창이


지금은 한 페이지를 채우지 못했다.


친구 목록을 열어보았다.


“최근 접속: 10일 전, 20일 전, 28일 전…”


‘델카’ 형은 늘 숙제를 리드하던 사람이었다.


그 아래층에 살던 ‘에일린’ 누나는 매주 배럭 숙제를 도와줬었다.


둘 다…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 창문엔 불이 꺼졌고,


우리 동네에선 ‘접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뉴스가 말했다.


“이번 주, 보석의 시세는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으며


아크라시아 화폐가치는 급속히 하락 중입니다.


대부호 유저들의 대규모 자산 정리가 확인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해외 대륙으로 이동 중입니다.”


그때서야 알았다.


정말로, 이 대륙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상위권 아이템들이 하나둘씩 시장에 풀렸다.


그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정리,


마지막 환전.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건


낯선 계정, 이름 없는 닉네임 뿐이었다.




[9주차 - 남은 사람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그저 매일 내 숙제를 하고,

쌓아두었던 자잘한 템들을 정리하고,

경매장 시세를 체크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가끔씩,

친구창을 다시 열어본다.

닉네임 하나라도 접속해 있진 않을까 하고.


하지만 변한 건 없다.


내 이웃은 더 줄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교체가 아니라 붕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기억도, 시간도, 사람도


모두 이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0주차 - 조용한 전진]


오늘도 일지를 펼쳤다.

처음과는 조금 다른 글씨체로

나는 이렇게 적었다.


“포기하지 않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작은 외침이, 나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