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terop
2024-11-04 03:56
조회: 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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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감상...(긴글)저는 딱히 T1의 팬은 아닙니다. 롤도 접은 지 7년이 다 되어가니 이젠 롤 유저도 아니죠.
월드컵이 열리면 거리응원을 나가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사람들처럼, 그저 때 되니 보고 감탄하고 지나가는 얄팍한 시즌제 부외자에 불과합니다. 이젠 유행하는 전략전술도, 밴픽 구도도, 아이템도 잘 모르다보니 킬이 나면 이기나보다, 타워가 깨지면 장악력 떨어지겠구나, 글골이 비슷하면 아직 할만할지도 몰라 정도의 판단으로 볼 뿐이죠. 그럼에도 페이커-이상혁 선수의 다섯 번째 우승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입장에서 아직도 완벽히 형언하지 못하는 지금의 이 감상을 조금이나마 정리해두고 싶어 잠시 자판을 두드려봅니다. 이번 우승이 개인에게, 팀에게, 롤판에, 나아가 E-sports계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업적인지는 온갖 커뮤니티를 도배한 리플레이 영상과 미사여구들이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기에 저까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13년 데뷔전의 첫 킬부터 올해의 마지막 한타까지 봐온 기억들을 돌이켜 보면서 나 자신에게 이번 다섯 번째 우승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 4강 티저에서 페이커 선수는 말했습니다. "T1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혹자는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최고일 거라는 포부"라고 해석했고, 혹자는 T1을 상대하는 자들에게 있어 "계기이자 적수이자 목표"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해석의 타당성과 별개로 제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습니다. 페이커와 T1의 상승과 하강은 다른 어느 팀의 그것보다도 강하게 상반된 두 가지 감상을 동시에 갖게 합니다. 새로운 일인자의 등장을 보는 고양감과, 더 이상 무적함대일 수만은 없는 용장의 뒷모습을 보는 씁쓸함 말이죠. 팬이 아님에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 또한 페이커와 T1이 가진 강력한 매력 중 하나일 겁니다. 마지막 월즈 우승으로부터 7년, 마지막 LCK 우승으로부터 1년 반.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을지라도 요원하다고도 생각지는 않았을 그 업적의 공백기 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을까요. 2016년 월즈 결승을 이틀 앞두고 올린 기고문을 정독해 보면 어쩌면 제 상상보다 그는 초연했을 듯도 합니다만, 추운 날씨일수록 사람은 남은 불씨에 과하게 가깝게 들러붙어 제 살을 지지게 마련이듯 페이커 선수도 어쩌면 자기 열정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물 때문에 스스로의 정신이 타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준우승도 힘든 팀들과 선수들에겐 기만적이라는 반박은 잠시 제쳐두고요.) 하지만 모든 아쉬움, 외로움, 괴로움이 발 밑에 깔린 그 순간에도 머리 위로 조용히 시간은 흘렀습니다. 모든 게 과거가 되고, 현재에 과제를 부여하며, 미래를 예상하게 만들었겠죠. 그리고 그 과거, 현재, 미래를 어떤 사람이 짊어졌느냐에 따라 각자 부여된 결과를 돌려받았을 겁니다. "T1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라는 대사를 듣는 제게 다가온 것은, 마냥 나쁘지만도 좋을 수만도 없었을 전적과 업적과 행적을 모두 포함한 그들과 팀 그 자체가 다른 선수와 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온 시간을 뒤덮는 기억 그 자체이길 원한다는 거대한 의지였습니다. 성패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만 말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때문일까요. 결승전 티저에서의 "다섯 번째 우승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란 대사는 영광을 돌리는 대사보단 하나의 본보기로 들렸습니다. 우연히도 2013년은, 제가 첫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에 진입한 해이기도 합니다. 11년 남짓한, 공백기를 제외하면 10년 5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여러 번의 이직과 직종 변경을 거쳐 시덥잖은 고민과 평범한 고생을 겨우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간 배우고 성장하고 이뤄낸 것들, 실수하고 실패하고 잃은 것들을 합산해보자면 스스로에게 결코 높은 평점을 매길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우승을 보면서 저는 조금 더 나의 실패를 사랑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타성에 젖어 있는 나의 열정을 다시금 불태워보기로 했습니다. 비명과 구분할 수 없는 함성을 내내 참을 수 없었던 마법 같은 가을은 이렇게 그 어떤 작가의 작품보다도 극적이며 아름다운 형태로 완성되었지만, 내일 동이 트면 결국 저는 다시 일어나 시덥잖은 고민과 평범한 고생을 향해 걸어나가야겠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의 과거, 현재 미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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