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화라서 제목에 사족을 좀 달아봤습니다 :6
2. 누가 표지좀
-------------------------------------------------------------------------------
#. 카타리나
다섯 시간 전.
“슈퍼 미니언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하단 쪽에 100여 기, 중단 공격로 쪽에는 더 많아. 상단 공격로까지 가보진 못했지만 그쪽도 비슷비슷하겠지.”
정찰을 다녀온 카타리나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있었다. 가뜩이나 그냥 본진에 쳐들어가도 어떻게 될까말까한데 일이 더 꼬이고 있었다. 성질같아선 주위를 닥치는 대로 베고 싶은 카타리나였지만 꾹 참고 잭스를 바라봤다. 정찰을 다녀오라고 한 것은 그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뭔가 생각이 있을 터였다. 기대 반 근심 반의 심정으로 카타리나는 잭스의 대답을 기다렸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일단 우리의 목적은 넥서스의 파괴지 적의 섬멸이 아니란 점이 중요하네. 미스 쿠토의 말에 따르면 챔피언들은 이미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을 법도 하고 말이야. 미스 쿠토, 혹시 사자들이 어떻게 사냥하는지에 대해 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하냐는 듯 카타리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녹서스에서 나고 자라 전쟁터 이외의 다른 곳엔 가본 적이 없는 카타리나가 저 멀리 쿠뭉구 정글 근처에나 서식하는 사자들을 봤을 리가 만무했다. 물론 그녀도 상식적으로 사자가 무슨 동물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자 따위의 먹이 사냥 방법 따위가 다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잭스는 처음부터 카타리나에게 대답을 기대한건 아니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그쪽 사자들은 재미난 사냥법으로 먹이를 잡지. 우선 초식 동물들의 무리가 보이면 숫사자가 무리 우두머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틈을 노려 공격하네. 그럼 자연스럽게 덩치가 있는 놈들은 우두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숫사자 쪽으로 달려들고, 새끼나 힘없는 암컷들은 뒤로 빠지게 되지. 이때를 노려 뒤에서 대기 중이던 암사자들이 도망치는 놈들을 낚아채는걸세. 그러면 숫사자는 적당히 싸우다가 지는 척 하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지지.”
“그래서 그게 무슨…….” 카타리나는 적당히 좀 하라고 성질을 내려다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잠깐, 그러면…잭스 당신, 설마……?”
“이해가 빠르군.” 잭스가 흡족한 듯이 말했다. “내가 그 숫사자 역을 맡지. 자네와 탈론은 나와 거리를 두고 따라오다가 내가 본진에서 놈들의 시선을 끌면 뒤로 잠입하게. 여기까지 말해주면 더 말 안해도 알아서 하겠지? 잠입에 시설파괴 요인암살쯤이야 암살자인 자네라면 밥먹듯이 해봤을 거 아닌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 카타리나는 빈정거렸지만 잭스의 작전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탈론, 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카타리나의 물음에 탈론이 낮게 말했다. 소나의 치료가 상당히 잘 먹혔는지 그는 ‘적어도’ 움직이고 말할 정도의 기력은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배의 상처가 반쯤 나았다고 해도 그 상처는 여전히 깊었고, 상처가 그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는 중환자거나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런걸 시시콜콜 따질 때가 아니란 것쯤은 잭스도, 탈론 본인도, 그 탈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카타리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타리나는 탈론을 걱정하는 대신 잭스와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래, 그럼 숫사자 잭스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시선을 끌 셈이시지?”
“중단 공격로를 뚫고 본진으로 가겠네.”
순간 침묵이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잭스의 말투가 너무 느긋했기에 카타리나와 탈론은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카타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 머리 돈 거 아냐? 슈퍼 미니언이 줄잡아 100기는 넘어. 게다가 방어 타워들은 시커멓게 물들어있는게 영 심상찮아 보였다고.”
“난 지극히 정상이라네, 미스 쿠토. 그리고 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오기를 부리는 얼간이도 아닐세.”
“아, 그러셔?” 카타리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거기 있는 소나는 어떻게 할건데? 소환사들과의 연결이 끊긴 이상 협곡에서 소환이 해제되려면 자기 진영 제단에 있거나 상대편 넥서스가 터질 때 그 본진 내에 있어야 하잖아? 어쩌려고 그래? 그냥 여기에 버려두고 가게?”
카타리나는 잭스의 무릎을 배개삼아 곤히 자고있는 소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탈론의 치료에 많은 힘을 소비한 듯 소나는 주위가 좀 시끄러워도 미동도 하지 않고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실상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파란색 진영 쪽의 방어 타워도 이 협곡을 점거한 놈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걸 감안하자면 소나가 혼자서 파란색 진영 제단에 도착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렇다고 자신이나 탈론이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작전상 암사자 역의 그녀와 탈론은 잭스가 중단 공격로를 뚫고 보라색 본진에 입성할 때까지 그 근처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은신해 있어야 하는데, 소나는 음악가로서는 최고일지 모르나 신체적인 부분에선 평범한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보다도 더 저질스러운 체력을 가지고 있어서 은신은 꿈도 못꿀 일이었다. 하지만 잭스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미스 부벨르는 나와 같이 숫사자 역할을 맡을걸세.”
“얘가 그 미니언들을 싹 쓸어버릴 비장의 수라도 가지고 있는거야?”
“설마. 이 이상한 악기로 공기의 칼날 비슷한 걸 만들 수는 있는 모양인데 별로 기대하고 있진 않소.”
한마디로 전력으로 써먹으려고 데려간다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도대체 이 자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카타리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당신은, 전력도 안되고 속도도 느리고 한 대라도 맞으면 빈사 아니면 즉사일 여자아이를 데리고 슈퍼 미니언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방어 타워도 모조리 박살내면서 본진 입성을 시도해보시겠다?”
“시도하는게 아니라 할 수 있소. 미스 쿠토, 아까부터 계속 삐딱하게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내가 지킬 대상이 죽으려고 발악하는 멍청한 놈만 아니면 이 대륙 그 어떤 전쟁터에서도 지켜낼 자신이 있소. 난 여기 미스 부벨르에게 사지 멀쩡하게 이 협곡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고 계약을 했소. 당신도 용병 생활을 약간 해봤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겠지? 용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약 내용은 반드시 지키오. 허튼 짓 할 생각도 없고, 무모한 짓 역시 할 생각 없소.”
할 수 있다-그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여 기가 넘는 슈퍼 미니언과 길목마다 세워진 방어 포탑을 상대로, 한 소녀를 보호하면서 전진할 수 있다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차라리 잭스가 시비르만큼이나 유명한 용병이었다면 카타리나도 어느 정도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리그에 들어오기 전 잭스의 행적이라곤 용병 길드에 이름 하나 달랑 올려놓은게 전부였다. 심지어 그 흔한 호위 의뢰 한 번 했다는 기록조차 없는데, 지금 그가 하는 말투는 마치 구를대로 구른 노련한 용병 그 자체였다. 그냥 싸움만 잘하고 가로등이나 휘두르는 괴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머리도 그런대로 돌아가고 리더의 자질도 상당한, 어째 잭스는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용병이었다. 결국 카타리나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잔뜩 짜증난 얼굴로 잭스를 노려봤다.
“으-알겠어, 알겠다고! 어디 큰소리 친 것만큼이나 실력도 좋길 빌지. 하지만 명심해 둬, 잭스. 녹서스인은 은원관계는 철저하게 지켜. 탈론의 목숨을 빚진 이상, 나는 그의 주인된 자로서 이 소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어. 물론 그건 탈론도 마찬가지야. 만약 당신이 실수라도 해서 소나가 목숨을 잃는다면…….” 카타리나가 스산하게 말했다. “그때는 이 발로란 대륙 최고의 암살자 중 두 명이 당신 목을 가져갈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잠이나 자 두시오. 출발은 밤에 할거니까.”
잭스가 ‘그럴 일 없을테니 네 할 일이나 잘해라’라는 투로 말하자 카타리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을 뻔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내리눌렀다. 그 분풀이라도 되는건지, 그녀는 탈론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약간 떨어진 나무 밑에 자리를 마련한 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누웠다. 피를 많이 흘린 탈론의 체온을 보호해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또한 자신이 가족이라고 인정한 사람(이래봤자 아버지가 실종된 지금 그 범주에 속한 사람은 카시오페아와 탈론이 전부지만)을 꼭 끌어안고 자는건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탈론은 조용히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알 수 없는 자야.” 카타리나는 투덜거렸다. “겁이 없는건지, 아니면 무모한건지…뭐가 되었든 몇 시간 후면 알게되겠지.”
“실력 하나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풍에 찬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건 나도 알아. 행동거지나 작전을 즉석에서 짜는거나, 절대 보통 녀석은 아니지. 그래, 솔직히 말하면 저 자라면 정말 소나를 보호하면서 중단 공격로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알잖아, 탈론?” 카타리나는 가고일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잭스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난 비밀이 많은 자를 신뢰하진 않아.”
“뒷조사를 해볼까요?”
탈론의 말에 카타리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뒷조사라-그것도 다 여기서 살아 나가야 가능한 얘기였다. 탈론은 그런 식으로, ‘우린 해낼거다’라는 각오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부터 그게 네 잠정 임무야. 임무 중에 죽음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란 거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가씨. 이 탈론이 쿠토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 따윈 없을겁니다.”
탈론이 자신의 방식으로 각오를 다지듯, 카타리나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죽지 마라’라고 말했다. 카타리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건 뒤로 미뤄야 할 일이었다. 이런 데서 사과를 구할 생각 따윈 없었다. 녹서스 군사 병원의 침대 위에 탈론을 눕힐 때까지 그녀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반드시 탈론과 같이 돌아가겠다고 마음 속으로 깊은 각오를 다졌다.
잭스는 카타리나와 탈론이 잠들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끔 소나를 내려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당시에 그걸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끄르륵…….”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잭스가 가로등을 내리치는 순간 슬쩍 전장에 뛰어든 카타리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선 검은 무리 중 한 명에 목에 칼을 쑤셔넣었다. 불과 다섯 시간 전까지만 해도 카타리나는 잭스가 공격로의 반도 못가서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잭스는 카타리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훨씬 빠른 시간 내에 중단 공격로를 돌파한 것도 모자라 상대를 슬슬 구슬려 정보란 정보는 죄다 불게 만들고, 챔피언 다섯 명과 검은 마법사 한무리를 상대로 전혀 꿀림 없이 싸우고 있었다. 이거 그림이 왠지 발목을 잡는게 이쪽처럼 그려지잖아-카타리나는 입을 삐죽이며 다시 한 번 얼굴도 모르는 검은 놈의 모가지에 칼을 쑤셔박았다. 그렇게 대강 몇 명을 처리한 카타리나는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슬며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선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탈론이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서 먼저 대기하고 있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탈론이 낮게 속삭이며 새까만 망토를 불쑥 내밀었다. 놈들의 망토였다. 탈론 역시 카타리나와 마찬가지로 몇 놈을 처리했던 모양이었다.
“준비성 좋은데?”
카타리나는 살짝 윙크를 하며 낼름 망토를 받아 뒤집어썼다. 가뜩이나 모습을 숨기는 데에 능숙한 암살자들이 밤이라는 무대에 새까만 망토까지 뒤집어쓰자 용사가 전설의 장비를 얻은 격, 카타리나와 탈론은 순식간에 전장을 이탈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넥서스를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등 뒤로 전쟁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5대 1의, 후퇴 따윈 없는, 고독하디 고독한 전쟁의 소리가.
저건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 아니 이미 하나의 작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잭스의 무력이 카타리나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챔피언은 우악스럽게 달려들기만 할 뿐인 슈퍼미니언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아무리 그 중 셋이 반쯤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으며, 럭산나라면 충분히 그들을 가지고 연계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습과 암습에 잔뼈가 굵은 쇼나 베인까지……. 카타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저런 상황이라면 소나 부벨르라는 소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카타리나는 소나를 전혀 전력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엔 소나는 전쟁, 아니 심지어 동네 아이들 패싸움도 구경해 본 적도 없을 법한 양갓집 규수 그 자체였다. 그런 소녀가 진짜 죽음이 넘실거리는 저 살벌한 전장에서 전력으로 칠 수 있다고? 그거야말로 농담이었다. 아주 질 나쁜 농담. 진짜로 목숨 걸고 하는 전투는 안전이 보장된 리그에서의 경기 따위와는 그 궤를 달리할 정도로 험악한 것이었다. 즉, 한낱 전쟁의 ‘ㅈ’자도 모르는 아가씨 따위가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기에 카타리나는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최대한 저쪽의 전력을 깎아줬다. 조금이라도 더 잭스가 오래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탈론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인다.”
저 멀리 넥서스가 보였다. 앞서 봤던 방어 타워들처럼, 넥서스도 검붉게 물들어있어 불길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그건 넥서스를 호위하고 있는 듯 굳건히 서 있는 두 개의 방어 타워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카타리나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호흡이 변했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몸놀림이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질주하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망토를 벗어던진 그녀의 손엔 어느샌가 칙칙한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있었다. 탈론 역시 카타리나와 마찬가지로 망토를 벗어던진 채 달리고 있었다.
[방어 타워의 배 부분에 있는 수정이 동력원이오. 멍청하게 경기 때처럼 오만 고생 해가며 타워 부수지 말고 그거만 부수시오. 그럼 타워는 자연스럽게 무너질테니.]
출발 직전, ‘타워를 부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라는 카타리나의 물음에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듯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하던 잭스의 말이 떠오르자 카타리나의 입꼬리가 조금 실룩거렸다. 그녀는 탈론과 함께 동시에 양 타워를 무너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단박아 넥서스까지 박살낼 심산이었다. 타워의 공격 반경에 들어왔는지 수정이 타오를 듯 마력을 뿜어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력 덩어리가 방출되는 그 찰나의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숨에 속도를 올려 수정을-
“어……?”
깨지, 못했다.
“어서와요, 카타리나 양. 배신의 대가를 치루러 왔군요?”
그곳엔 르블랑이 있었다.
온 몸에 끔찍하리만큼 수정 파편을 다닥다닥 박은 채로. 더 끔찍한 건, 수정마다 스파크처럼 지직거리는 마력 때문에 살이 타들어가고 터져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 끔찍한 몰골로 카타리나 바로 앞에 나타나서,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바라보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위협적으로 파직거리는 그녀의 지팡이를 카타리나의 미간을 향해 겨눴다.
“당신이 떠나서 마스터가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아나요? ‘여과기’로서 선택된 영광을 차버리다니 저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아가씨!”
실책이었다. 럭산나가 떠벌린 정보만 믿고 르블랑을 고려하지 않은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느새 르블랑이 손을 썼는지 카타리나는 환영의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
“저라면 당장에, 당신의 머리를 터뜨렸겠지만…….” 르블랑이 지팡이로 카타리나의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넓으신 마스터는 두 다리만 없애놓으라고 하셨어요. 아, 이 얼마나 자애로우신지……. 마스터에게 감사하며 얌전히 두 다릴 내놓으세요, 카타리나 양.”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카타리나는 자신을 향해 발사되는 타워의 마력 포탄을 느린 동작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진로를 바꿔 뛰어오는 탈론의 모습이 보였다. 미간에 겨눠진 르블랑의 지팡이와 피칠갑을 하고서도 홀린 듯이 웃고있는 르블랑의 얼굴도 보였다. 마지막이라도 생각한 순간, 카타리나의 뇌리에 떠오른 인물은 탈론도, 실종된 아버지도, 하나뿐인 여동생도 아닌-아주 웃기게도, 남 무시하는 말투가 특기인 가면 쓴 용병이었다.
미안, 잭스. 아무래도 이쪽이 발목을 잡은 것 같아.
“아가씨이이이이이!”
탈론의 외침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콰과과과광!!!
끔찍한 폭음과 함께, 카타리나의 모습은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 잭스
카타리나와 탈론이 전장을 이탈한 직후, 잭스는 쉬바나의 어깻죽지를 박살내고 있었다.
캬오오오오오오!
잭스가 휘두른 가로등이 쇠망치처럼 용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우지직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용은 비명을 질렀고 잭스는 다시 뒤로 펄쩍 뛰어 맨 처음 전투를 시작한 장소, 즉 소나의 앞으로 되돌아갔다. 그토록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도 그는 침착하게, 끝까지 소나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금 자세를 잡은 그의 모습은 흡사 사냥감을 사냥하는 맹수 그 자체였다. 소나는…그의 예상대로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잭스는 힐끗 돌아보는 것 외에 더 이상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주위에 시체가 많아짐에 따라 그의 모습도 바뀌어있었다. 피를 한 양동이 뒤집어 쓴 듯 잭스의 몸엔 피와 허여멀건 뇌수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검은 무리들은 몇몇을 제외하고선 거의 전멸 상태였고, 우르곳은 양 팔과 네 다리가 모조리 박살이 나서 대강 기운 가죽 자루같은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이온은 아예 가슴 부분이 움푹 들어간 채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캬오오오오오오!
“으…으아아아!”
“이 멍청한 놈들아, 빨리 제어를 해! 어서 제어를 하란 말이다!”
꼴을 보아하니 마구잡이로 날뛰는 쉬바나 역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하지만…여전히, 가장 까다로운 상대 두 명은 건재했다. 럭산나 크라운가드와 쇼나 베인. 잭스가 소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 검은 남자 곁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고 전투 중간중간마다 기습적인 공격 한 번씩만 해올 뿐이었다.
“럭스, 쇼나! 어서 저 녀석을 죽여! 죽이란 말이다!”
“걱정 마세요 마스터. 곧 저분을 산 채로 구워서 마스터 앞에 대령할게요.”
“아직 최후의 섬광은 멀은거냐, 럭산나?”
“어머, 적 앞에서 그걸 말할 순 없잖아요? 후후.”
거의 패닉에 빠진 검은 남자를 우는 아이 달래듯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럭산나가 잭스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 그대로 눈에서 살기를 내뿜자, 잭스는 긴장하며 가로등을 더 꽉 잡았다.
최후의 섬광-일직선으로 빛을 발사하는 럭산나의 무시무시한 기술.
그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소나를 지키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하는 잭스의 입장에서 그 기술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도 없었다. 첫 번째 럭스가 그 기술을 썼을 때엔 반사적으로 튕겨냈지만, 두 번째는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소나가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소나를 생포해야 한다’라는 명령 때문인지 럭산나가 출력을 급감시켰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잭스의 왼쪽 팔은 그 여파로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기실, 그는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뼈마디가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고 화상을 입은 왼쪽 팔은 화끈거렸다.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향해 치고 올라왔지만 잭스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꿀꺽 삼켰다. 비리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에 내장까지 맛이 간 모양이었다.
콰과과과과광!
“어머나, 에밀리아씨가 쥐새끼들을 발견한 모양이에요. 흐음-카타리나 아니면 탈론이려나?”
폭발음은 넥서스 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넥서스가 부서질 때 나는 소리가 아니라 타워의 공격에 의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이엔 마법에 의한 폭발음이 틀림없는 소리도 끼어있었다. 카타리나라면 탈론과 동시에 쌍둥이 타워를 부수고 그 기세로 넥서스를 부쉈을 터-그 폭발음이 들려오고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실패했다는 것.
즉, 잭스 측이 패했다는 사실이었다.
“…네 놈의 입으로, 분명 에밀리아 르블랑은 반쯤 죽은 시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머, 전 거짓말 한 적 없어요. 에밀리아씨, 지금까지 용케도 움직일 수 있었나보네요. 음……. 아무래도 저쪽에 널브러진 저 쓸모없는 분들이 기절하는 덕분에 여과기로서의 부담이 좀 준거 아닐까요? 그분 역시 마스터를 향한 충성심이 상당하니까요.” 럭산나는 생긋 웃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제 충성심이 더 높아요.”
어지간히도 제대로 세뇌를 한 모양이군, 잭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밀리아씨,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더라도 가지고 있는 마력량은 엄청날거에요. 그도 그럴게 넥서스와 연결되어 있는걸요. 그렇다면 아까의 폭발로 쥐새끼들은 분명 죽었다는 뜻인데……. 이봐요 잭스, 그냥 곱게 죽어주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넥서스를 부수는 시도가 실패한 이상, 지금 당신의 행동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당신은 저희들을 뚫을 수 없어요. 아니 설령 뚫는다 해도 에밀리아씨와 두 개의 타워가 버티고 있는 이상, 넥서스는 절대로 부술 수 없을거에요.”
럭산나가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태도로 잭스의 신경을 긁으려 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잭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소나와 계약했다. 에뜨왈을 찾고, 그녀를 협곡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고. 기사들이 명예를 존중한다면 용병인 잭스는 계약을 존중했다. 분명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꼭 그가 지금 싸우고 있는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잭스는 소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잭스는 소나라는 챔피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잭스는 소나같이 전쟁의 상처를 겪지 않은 순수한 소녀가 이 더러운 전장에 발을 들이미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잭스는 계약의 대가로, 소나에게-
‘나도 많이 약해졌군.’
잭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자신은 약해졌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많이 물러졌다. 세월이, 평화라는 녹은 어느샌가 그를 좀먹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잭스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약해진다는 의미는 그만큼 이 대륙에 평화가 지속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잭스는 좀 더 자신이 약해지길 바랬다. 자신과 같은, 전쟁의 부산물일 뿐인 용병은 이렇게 녹슬다 스러지는게 올바른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소녀와의 계약을 완수해야만 했다.
잭스는 힐끗 고개를 돌려 소나를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소녀는 어느샌가 기절한 채 땅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눈에 띌만한 상처는 없었다. 뭐 여기저기 까지고 긁힌 상처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사지 멀쩡히 붙어있으니 계약 위반은 아니었다. 잭스는 피식,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자세를 풀고선 섰다. 그 행동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기에 베인의 뒤에서 덜덜 떨고있던 검은 남자의 마음엔 다시금 자신감이라는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 크크크큭! 그래, 그래! 역시 네놈도 무리라는걸 알겠나보군! 하지만 잘 했어, 용병. 네 손으로 녹서스의 챔피언 둘과 데마시아의 챔피언 하나를 죽였어. 그리고 넌! 럭산나와 쇼나에게 죽을 것이다. 좋다 럭산나, 내 마지막 아량이다. 고통없이 깔끔하게 죽여라. 쇼나! 저기 쓰러져있는 소나를 데려와라.”
“들었죠, 잭스 씨? 마스터는 정말 자애로운 분이세요.”
럭산나는 또각,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그를 향해 마법봉을 겨눴다. 무리한 마력의 운용으로 내장을 다쳤는지 그녀의 입가에선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걸 보며 잭스는 가로등을 스윽 내렸다. 가로등 속에는 조그마한 불꽃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파란, 아주 조그마한 불꽃이. 그걸 보는 럭산나의 마음에 묘한 감정이 비집고 들어왔다. 위화감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저것은, 아주 뭔가가, 정말로 이질적이다-럭산나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고.
저 파란 불꽃은, 위험하다고.
“…있잖아요 잭스 씨.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거 진짜 황동으로 만든 가로등 맞아요? 어떻게 그걸로 바위를 부수고 용의 뼈를 부수고 이 많은 인원들을 때려잡았을까?”
그러나 잭스는 럭산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대에 어긋나게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오늘 죽는건 오직 너 뿐이다, 검은보자기.”
검은 남자는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저건 허세가 분명했다. 저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세 챔피언이 죽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죽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자기가 직접 죽여도 되고 세뇌해서 써먹어도 됬다. 이상하게 저 파란 불꽃이 거슬리긴 하지만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순 없다-기껏해야 마지막 발악일 터, 남자는 그리 생각하며 마음속에서 자꾸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왜 불안감이 드는지 그는 몰랐다. 그게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기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것을, 남자는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학회에서 내게 내린 규제에 반발해서 난 오직 이 가로등만을 무기로 쓰겠다 선언했지.” 잭스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 가려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말야, 그 누구도 그 규제의 내용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는 거야. 그게 뭔지도, 어떻게 풀리는 지도, 심지어 어떤 식으로 규제를 해놨는지도 말이지.”
순간 잭스는 가로등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돌과 함께 쨍그랑, 하며 가로등 머리에 있던 유리창은 지금까지의 활약이 허무하리만치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게 퍽퍽 몇 번 내리치자 잭스의 손엔 가로등의 긴 몸통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가로등 속에 들어있던 조그마한 파란색 불꽃 역시, 그 자리 그대로 떠 있었다.
길 잃은 병사들을 죽음의 늪으로 인도한다는 윌 오 위스프의 빛-그 불꽃을 보는 럭산나의 뇌리에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그거였다. 서서히 잭스의 가면에 나 있는 구멍에서 푸른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 놀랍고도 두렵고도, 기괴한 광경에서 모두들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파란 불꽃이 살짝 일렁이더니 부러진 가로등을 타고 덩굴식물처럼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침내 잭스의 손가락에 불꽃이 닿았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펑 하고 날아갔다.
새파란 횃불같았다.
잭스의 망토가 새파란 불꽃으로 휘감겨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가면에선 불길한 색의 푸른빛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부러진 가로등 끝에는 불꽃이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휘감겨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압도적일 정도의 기세와 마력이 그에게서 쏘아져나오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피부가 저릿저릿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마력이 그에게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힘은 두 번 다시 쓰지 않기로 그놈과 약속했었지만 말이야.” 잭스가 묵직하게 말하며 이제 창처럼 변한 가로등을 럭산나를 향해 겨눴다. “하지만 뭐, 그 녀석도 약속 깨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놈이니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약속 좀 어겼다고 뭐라 할 순 없겠지.”
잭스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양 발을 넓게 벌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창을 앞을 향해 낮게 내리고. 시선은 앞으로, 뒷발은 언제든 도약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불의 갑옷을 두른 전귀(戰鬼) 그 자체였다.
“자, 그럼 한 번 해 보자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불꽃의 창이 바람을 가르며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