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시리즈: 시대를 넘어선 고찰과 디아블로 IV의 평가

90년대, 도트 그래픽의 시대를 넘어 디아블로 1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게임 속 압도적인 분위기와 무자비한 공포는 마치 부처가 와서 나를 난도질할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습니다. 그 감정은 쉽게 잊히지 않았죠.


디아블로 2는 전작이 쌓아놓은 독특한 분위기와 핵 앤 슬래시의 재미를 더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발전시켰습니다. PC 보급화의 물결을 타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설적인 게임으로 자리 잡았죠. 확장팩 '파괴의 군주'까지 포함해 디아2는 그야말로 '최고의 게임(GOAT)'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디아블로 3는 발매 당시부터 1, 2편과 비교해 아류작이라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럼에도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에서 말티엘의 등장으로 세계관이 확장되며 스토리 전개가 나름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비록 초기 반응은 차가웠지만, 디아블로 세계관은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디아블로 IV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 게임은 디아블로의 정식 후속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별도의 스핀오프 게임으로 나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이렐 같은 캐릭터는 왜 등장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PC주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캐릭터일까요? 디아블로 3에서도 변질된 가족 이야기(엄마와 딸의 관계)가 등장했는데, 이번에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억지로 이어지며 스토리의 몰입감을 떨어뜨립니다.



디아블로 1, 2가 선사했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디아블로 IV는 잔혹한 고어 컷씬만이 강조되는 느낌입니다. 특히 릴리트가 등장하는 시네마틱만이 그나마 분위기를 살린 요소였습니다. 오픈 월드라는 시도는 좋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제 그래픽 카드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보면 제 PC 사양 탓도 있겠죠.


디아블로 3까지는 천상과 지옥의 대립 속에서 인간인 네팔렘이 대악마들과 싸우는 장대한 서사였지만, 디아블로 IV는 그보다 더 심리적인 전쟁에 가깝습니다. 대규모 전투보다는 국지적인 싸움, 마치 전쟁의 막바지에서 벌어지는 소모전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번 확장팩에서도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물론 아카라트와 증오의 심복과의 마지막 결투 장면은 연출적으로 재미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신규 캐릭터와 시스템은 확장팩의 주된 업데이트 요소였지만, 이런 부분들은 사실 시즌 패치를 통해서도 충분히 추가할 수 있는 것들이었죠. 게임 진행 중에는 불필요하게 긴 컷씬과 설명이 많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 대신 지저분한 얼굴의 클로즈업이 너무 자주 등장해 몰입감을 해쳤습니다. 물론 시네마틱은 훌륭합니다. 다만 인게임 그래픽 클로즈업이 좀...

국내 모바일 게임과 비교하자면, 가차 게임들에 비해 디아블로 IV는 확실히 혜자라고 할 수 있겠죠. 몇 초 만에 3~5만 원을 쓰는 모바일 게임과 비교해 보면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에 대한 기대가 높은 유저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블로 IV의 추가 확장팩이 출시되면 저는 아마도 다시 구매하게 될 겁니다. 이번에도 일반판으로 구매했지만, 추후에도 얼티밋 에디션 같은 것은 굳이 필요 없을 듯하네요. 그래도 다음에는...이런 작은 기대감 속에서 디아블로 특유의 핵 앤 슬래시와 파밍의 재미를 가끔씩 한두 시간씩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요.

페스오브엑자일 2도 곧 출시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디아블로 스타일이 더 맞습니다. 차라리 디아블로 시리즈가 3편에서 마무리되고, 평행세계나 새로운 설정으로 확장하여 신작을 선보였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물론 개발 비용과 스토리, 연출 등을 고려하면 엄청난 도전이겠지만, 억지로 스토리를 이어가기보다는 그런 새로운 시도가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