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이슈 '콕!'은 네이버 제휴 콘텐츠로 모바일 페이지 '게임·앱' 코너에 함께 게재됩니다.

게임계의 핫이슈를 짚어보는 시간. 첫 시간은 게임 역사상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게임의 탄생 과정이다. 당신이 수정란에서 첫 세포분열을 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 처럼 태동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게임의 발전방향은 기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술이 게임 발전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콘텐츠 자체는 기술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므로 게임의 발전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즉, 게임은 기술과 시대(문화)의 융합으로 탄생한 새로운 '문화적 가치'로 조명할 수 있다.

게임은 컴퓨터가 지닌 부정적인 이미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이 어째서 기술,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매체로서 기술과 예술 사이에 서 있게 됐는지를 알아보기에는 게임의 탄생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전쟁 기술에 의해 시작된 게임은 게임 산업 내부 경쟁을 통해 다양한 게임 장르들의 창발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운과 경쟁 요소를 바탕으로 한 단순한 게임이 대부분이었으나 서사의 도입과 그래픽의 발달로 문학, 영화 등 타 장르와의 혼합이 진행되면서 게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생산했다. 현재는 가상경제, e스포츠 등 다양한 게임 관련 문화가 생겨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현상으로 발달했다.

게임이라는 말의 학술적 정의에 대한 통일적 견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비교적 통용되고 있는 로제 카이와의 '즐거움을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과 그렉 코스티캔(그렉 코스티키안)의 '플레이어가 주어진 자원을 관리해가며 행하는 의사결정과정'이라는 정의와 함께 디스플레이에 출력되며 외부 조작장치로 조작할 수 있는 콘텐츠로 한정한다.



■ 기술로서의 게임 - "컴퓨터 그거 미사일 궤도 계산에나 쓰는 거 아냐?"

최초의 게임이 어떤 게임이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업계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관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한 데다 이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1971년 첫 번째 상업용 게임인 '컴퓨터 스페이스(Computer Space) 등장 이전의 유사 게임 -선구자-들에 대해 먼저 짚고 갈 필요가 있다.

광의의 게임, 즉 기술로서 게임의 토대는 1939년 마련됐다. 미국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콘돈(Edward Uhler Condon)은 그의 연구원들과 함께 '니마트론(Nimatron)'이라는 자동계산기를 만들어 수학적 전략 이론게임인, 'NIM'을 플레이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도 없고 별도의 컨트롤러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 기준으로 본다면 게임이라고 불리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다.

1940년 공개된 이 기계는 당시 기준으로 크기가 작아 가정용 컴퓨터로 보급, 엔터테인먼트 기계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공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탄도 계산에 사용된 컴퓨터는 '전쟁에 쓰이는 도구'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떠안게 된다. 그리하여 '니마트론'은 엔터테인먼트 기계로 컴퓨터의 가능성만 열어놓은 채 잊힌다.

종전 후 컴퓨터 공학자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컴퓨터가 '악마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고 실용성 있는 기계임을 증명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그들은 대중에 쉽게 다가가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도구로써 '게임'을 대중에 선보이려고 노력해나간다.

▲ 니마트론. 당시에는 매우 작은 크기였다.

1947년 최초의 게임 장치가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다. 토마스 골드 스미스(Thomas. T. Goldsmith Jr.)와 에슬 레이만(Estle Ray Mann)이 개발한 '캐소드 레이 튜브(CRT) 어뮤즈먼트 디바이스 (Cathode Ray Tube Amusement Device)'가 그 주인공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레이더 디스플레이에서 착안해 고안한 이 장치는 CRT 화면에 표시된 표적을 여러 개의 손잡이를 이용해 속도와 커브를 조절하여 맞추는 방식이었다. 원시적 형태이기는 했지만, 영상장치를 게임에 이용했다는 점과 기계적 회로를 이용해 명령처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게임 장치로 평가받고 있다.

▲ 당시 특허청에 제출한 삽화

1951년, Ferranti사는 존 베넷(John Bennett)의 제안으로 전략적 수학이론 게임 'NIM'을 플레이할 수 있는 컴퓨터 님로드(NIMROD)를 만든다. 앞서 소개한 '니마트론'을 레퍼런스로 제작된 이 슈퍼컴퓨터는 480개의 진공관으로 만들어졌으며, 디지털 로직으로 연산 처리하는 '디지털 게임'의 원시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님로드'는 당시 독일 연방공화국의 경제장관과 수상을 역임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의 이벤트 매치에서 3전 3승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님로드'는 '니마트론'과 마찬가지로 CRT 디스플레이로 화면을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전면부 유리패널의 점멸상태로 게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게임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공학자들이 컴퓨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접근을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천 기술이 전쟁 과정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은 '컴퓨터=전쟁 도구'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엔터테인먼트적인 접근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는 최초의 게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핵 연구소에서 탄생한다.

▲ 2차 세계대전 암호해석을 위해 만들어진 튜링 봄비(Turing Bombe)처럼 컴퓨터는 전쟁 도구였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 작품으로서의 게임 - "게임의 시대적 과제... 문화적 창작물로 발돋움"

윌리엄 히긴보텀(William A. Higinbotham)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물리학자로, 미국 뉴욕에 있는 원자핵 물리학 연구소인 BLM(Brookhaven National Labotary)에서 기계설비 부문 책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BLM은 매년 가을이 오면 일반인에게 연구소를 개방하는 '방문자의 날'을 열어 연구소의 안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연구소를 찾은 방문자들은 삽화나 설비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쉽게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듯 컴퓨터는 전쟁의 도구로 쓰이는 '악마의 물건'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있어, 연구원들은 '방문자의 날' 행사를 좀 더 일반인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고안해야만 했다.

히긴보텀은 로버트 드보락(Robert V. Dvorak)과 함께 방문객을 위한 행사에 선보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 특정 시간 간격(대역)의 전압 변화를 볼 수 있는 장치)와 Systron Donner SD-3300 아날로그 진공관 컴퓨터를 활용하고 게임 전용 입력 장치를 접목한 기기를 개발하게 된다.

그들이 생각한 인터랙티브 시스템은 사용자와 컴퓨터가 마치 대화를 하듯이, 컴퓨터가 출력한 내용에 따라 사용자가 적절한 입력을 하는 식으로, 입력과 출력이 공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 '테니스 포 투' 플레이 화면

이를 통해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세계 최초의 게임 '테니스 포 투 (Tennis for Two)'다. 디스플레이와 외부 조작기기를 활용한 이 게임은 오늘날 관점에서 게임의 정의에 제일 근접한 게임이다.

'테니스 포 투'는 오실리스코프 디스플레이에 가로 방향의 코트, 수직 방향의 네트를 표현해서 공을 치고받는 형태였으며 특히, 수직 방향의 네트에 공이 걸리면 공의 각도가 불규칙하게 변하는 기능도 구현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는 다이얼 형태의 외부 조작기기를 이용해 공을 치는 각도를 변경할 수 있었다.

히긴보텀이 이용한 Systron Donner SD-3300 아날로그 진공관 컴퓨터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핵 발사를 위해 탄도 거리를 측정하는 데 쓰이던 군사 목적의 컴퓨터였다. 현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게임은 전쟁 도구로 사용하던 컴퓨터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 '테니스 포 투' 공개 50주년 기념, 재제작한 전용 컨트롤러

1962년에는 인터페이스 측면에서 아케이드 게임기의 원형이 된 '센소라마(Sensorama)'가 등장한다. 모튼 하일리그(Morton Heilig)가 개발한 이 장치는 현재의 VR 기기처럼 머리에 쌍안경 장치를 쓰고 오토바이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일인칭 시점의 오토바이 영상이 펼쳐지는 입체필름을 감상하는 도구였다. 진동음과 인공향기, 바람 장치까지 구현된 이 장치는 사용자의 움직임 정보를 읽어 들여 게임 안의 가상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단계까지 구현했다.

흔히 최초의 게임으로 잘못 알려진 '스페이스 워!(Space War!)'도 1962년 등장한다. MIT 학생 '스티브 러셀(Steve Russel)', '앨런 코톡(Alan Kotok)', '야크 그라에츠(Shag Graetz)'는 음극선관 그래픽 출력장치를 가진 미니컴퓨터 'PDP-1'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게임을 개발했다.

'스페이스워!'는 조이스틱을 이용해 우주공간에서 로켓을 조종해 멀리 떨어진 적함을 미사일로 격추하는 게임으로 중앙에 강력한 중력을 지닌 오브젝트를 배치, 미사일이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않게 해 조작 재미를 구현했다.

▲ '스페이스워!' 게임 화면

히긴보덤이 만든 최초의 게임인 '테니스 포 투'는 이 게임만을 위해 개발한 전자회로였으나 '스페이스워!'는 이미 만들어진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짜 넣은 최초의 게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특정 기기가 없어도 컴퓨터만 있다면 언제든지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실제 게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테니스 포 투'에 으레 따라붙은 핵 실험 연구소라는 명패를 떼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스페이스워!'를 시작으로 게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전을 적용한 '테크니컬 데모' 혹은 '작품'으로서의 게임은 컴퓨터가 전쟁 도구라는 인식을 희석하며 문화 산업으로써 발전을 꾀한다.

기술을 활용한 작품으로서의 게임이 '문화적 창작물'로써 의미로 쓰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컴퓨터가 오로지 전쟁을 위해 사용하는 악마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하고 이로운 기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즐거움까지 더해주는 엔터테인먼트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결과물이자,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처음으로 다뤘으므로 기술과 문화가 융합한 '문화적 창작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 상품으로서의 게임 - "상용 게임 시대 개막... 마케팅 등 인접 산업과의 조우"

'스페이스워!'는 유타 대학교에서 전자 공학을 공부하던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는 '스페이스워!'에 매료됐고 게임이 재미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로써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당시 부쉬넬이 염두에 뒀던 컴퓨터 'IBM9700'의 가격은 매우 비쌌고 이는 1971년 블랭켄베이커(John V. Blankenbaker)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켄벡(Kenbak)-1'을 발표하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짜 넣어 어느 컴퓨터에서나 즐길 수 있는 '스페이스워!'가 개발되었음에도 게임은 결국 전용기기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전용기기 제작은 필연적으로 추가적인 지출이 발생하므로 비즈니스 관점에서 게임에 접근한 부쉬넬은 돈을 내야만 게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임이 최초의 상업용 게임 '컴퓨터 스페이스(Computer Space)'다.

너팅어소시에이츠(Nutting Associates)를 통해 출시된 이 게임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버튼과 미사일을 발사하는 버튼을 지원했으며 효과음도 지원하는 진정한 의미의 '게임'이었다. 비록 총 판매량 1,500대에 그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부쉬넬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삼아 '아타리(ATARI)'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아타리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 '퐁(Pong, 1972)'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세계 최대의 게임회사로 군림한다.

그는 '컴퓨터 스페이스'의 실패 요인으로 마케팅의 소홀을 꼽았는데, 비즈니스 측면으로 게임에 접근한 부쉬넬에게 있어 마케팅은 게임 자체와 같은 중요도를 가졌다. 이는 현재까지 유효한 관점으로 '컴퓨터 스페이스'는 기술과 작품의 벽을 깨고 나와 흥행 문화 산업으로써 게임의 탄생을 알렸다.

▲ 영화 'Soylent Green(1973)'에 등장하는 '컴퓨터 스페이스' 기기

'컴퓨터 스페이스' 이후 상업용 게임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랄프 베어(Ralph Bear)는 추가 가능한 카트리지와 TV 화면에 붙이는 셀로판지를 통해 12종류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최초의 콘솔 '마그나복스(Magnevox)'를 출시하며 1972년 한 해에만 8만 대 이상을 판매했다.

MIT의 그레고리 욥(Gregory Yob)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게임인 '움퍼스(Wumpus)'를 출시해 개인용 컴퓨터 게임의 역사를 열었다. '움퍼스'는 메인 프레임 터미널에서 아스키코드로 제작된 그래픽을 보면서 "옆을 보라". "앞으로 가라." 등 사용자가 직접 텍스트로 명령을 입력해 진행하는 텍스트 기반의 어드벤쳐 게임이다. 계산 편리성을 위해 개발한 컴퓨터가 전쟁 도구에서 완전히 탈피해 재미 요소를 지닌 상품으로 발전했음을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 문화로서의 게임 - "기술를 바탕으로 한 문화융합"

현대 문화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게임은 기술,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매체다. 디지털 미디어와 놀이문화, 예술의 융합 등 현대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총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다. 앞서 말했듯 게임은 탄생부터 기술과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야만 했기에,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내포하며 발전했다.

컴퓨터가 가진 전쟁 도구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컴퓨터 공학자들이 실험의 일환으로 만든 게임은 어느덧 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됐다. 게임은 발전을 거듭해 문자와 이미지, 사운드 등이 동시에 작용하는 멀티미디어이면서 사용자 간의 의사결정 및 상호작용이 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유형의 유일한 표현 매체로 자리 잡았다.

놀이와 환상으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문화가 지니는 미학을 끌어내 사용자의 일상에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구축하는 힘으로 자리매김한 게임. 게임이 문화산업인가 단순한 흥행산업인가에 대한 담론이 많은 현재, 게임의 탄생 과정은 게임을 즐기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최근 게임을 둘러싼 각종 문제의 해결책을 세우는 데 있어 게임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는 것이 새로운 통찰력을 얻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