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Steam)이라는 희대의 거물급 플랫폼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수많은 게임들을 편리하게 즐기면서, '대체 이것들을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람들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가상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방대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췄으면서도 끊임없이 진화해나가는 하나의 유기체 같았으니까요.
밸브 코퍼레이션(Valve Coperation), 흔히 '밸브'라는 짤막한 이름으로 불리며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춘 것으로 잘 알려진 회사. 이들은 사실상 언론 매체를 통한 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지만, 일반 유저들에게는 항상 열려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멀리 미국에 위치한만큼 한국의 유저들이 찾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밸브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사고'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이번 E3 기간에 그에 대한 해답을 확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도타 2'의 한국 서비스를 준비 중인 시점에서 넥슨 측이 마련한 탐방 자리에 인벤을 비롯한 한국 게임매체 기자들이 다녀왔습니다.
■ 이른 아침의 비행, 시애틀을 향해
아침 6시. 약 3일간 머물렀던 LA의 숙소를 떠나 버스 안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간단하게 때운 뒤에 곧장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기나긴 탑승수속을 마치고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시간은 오전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LA에서 밸브 인근에 있는 시애틀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로 약 2시간 거리입니다. 차량으로는 28시간 정도를 '논스톱으로' 달려야하는 거리라고 하네요.
워싱턴 주의 최대 도시인 시애틀은 우기(雨期)가 매우 긴 곳입니다. 대체로 영국의 수도인 런던과 비슷한 기후라고 하는데요. 1년 중 8~9개월 정도가 비가 오며 6월부터 8월까지 3~4개월 정도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데, 이 시기를 가리켜 '에메랄드 섬머(Emerald Summer)'라고 부른답니다. 기온도 적절하고 무엇보다 습도가 낮아 쾌적함을 만끽할 수 있는 이른바 '시애틀의 황금기'인 셈이죠.
거의 항상 비가 내리는 시애틀이지만, 기자가 도착한 날은 운 좋게도 에메랄드 섬머가 막 시작되는 시점. 구름이 많이 끼긴 했지만 대체로 쾌청한 날씨여서 탐방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습니다.
■ 미국의 판교? '벨뷰' 입성
시애틀 공항에서 밸브사가 위치한 벨뷰(Bellvieu) 시까지는 버스로 약 30분에서 1시간 사이의 시간이 걸립니다.
시애틀 도심과 벨뷰 시 사이에는 거대한 호수인 '레이크 워싱턴(Lake Washington)'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머서 아일랜드(Mercer Island)'가 있는데요. 지금은 전세계 내로라하는 부자나 유명인사들 다수가 살고 있는 섬입니다. 빌 게이츠 회장은 벨뷰에서 약간 북서쪽에 위치한 메디나(Medina)에 거주 중이라고 하네요.
시애틀과 벨뷰에는 유명한 업체들이 여럿 자리잡고 있습니다. 스타벅스 1호점을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도 이 곳에 몇 개의 사옥을 가지고 있고, 보잉(Boeing)사와 코스트코 본사도 위치해 있죠. 특히 벨뷰는 최근 IT 업체들과 젊은층 인구 유입이 많아져 평균 연령대가 대폭 낮아진 도시로, 한국으로 치면 분당이나 판교와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입니다.
개발 부서는 주로 북동쪽에 위치한 레드먼드(Redmond)에 있다네요
건물의 6개 층을 사용하고 있답니다
■ 리얼리티 밸브 탐방기, 지금부터 시작~!
내부 안내와 소개를 맡은 에릭 존슨(Erik Johnson)은 밸브 역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입니다. 밸브의 기업문화 특성상 직급체계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굳이 직급 상으로 보자면 부사장(Vice President) 급의 인물이죠.
밸브는 창립 이후 현재까지 두 번, 터전을 옮긴 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벨뷰의 북쪽에 위치한 커클랜드(Kirkland)에 있었고, 그 다음 남쪽으로 내려와 벨뷰 도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벨뷰 안에서 또 한 번 이사한 곳으로 창립 이후 세 번째 사무실입니다.
에릭 존슨은 밸브의 커클랜드 시절 있었던 40명의 멤버 중 한 사람입니다. 밸브의 시초작으로 잘 알려진 '하프라이프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7개월 전 '밸브 호'에 합류하게 됐죠. 오랜 시간 몸담았던만큼, 밸브의 내부 사정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릭 존슨의 안내를 받아 5층부터 9층까지, 총 5개층의 둘러보았습니다. (나머지 한 개의 층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5층은 회사의 첫인상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밸브의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각종 장식물과 기념물을 비롯해 회의실, 사원 복지시설 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게이브 뉴웰의 형이 기증한 것이라고.
■ 매주 목요일, 아침을 여는 대규모 커뮤니케이션
내부 계단을 통해 6층으로 올라가니 층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규모의 카페테리아가 있었습니다. 밸브의 전체 직원은 현재 350여 명. 이들 모두가 매주 목요일 아침 이 곳에 모여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자가 방문했던 날도 목요일이었는데, 그 날 아침도 어김없이 진행됐던 공식 행사 중 하나라네요.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몇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번 E3 2013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았는데요. 이에 대해 에릭 존슨은 "이번 E3에서 밸브가 보여줄만한 게 없었다"라고 일축했습니다. '밸브가 보여줄만한 것'이라고 하면 스팀박스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는 스팀박스 개발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머지 않아 공개할 수 있을 거라 말했습니다.
밸브의 인재상에 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밸브는 가능한 한 많은 인재를 고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주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시니어 인력을 널리 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몇 명을 뽑겠다'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고, 프로젝트를 지휘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나볼 용의가 있다는 것이 에릭 존슨의 말.
직급체계가 없는 것과 더불어 밸브의 또다른 특징은 분야별 포지션의 구분도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아티스트가 프로그래밍 작업을 하거나 디자이너가 원화를 그리는 일이 이 곳에서는 자연스럽다는 것인데요. 정해진 직함 없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여러 분야에 관여함으로써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하고 보다 폭넓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랍니다.
■ 도타 2 프로젝트 On Air, 자유로운 감각이 숨쉬는 곳
7층부터는 본격적으로 개발업무에 관련된 공간들입니다. 이번 탐방의 단초를 제공한 '도타 2' 프로젝트가 바로 이 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각자 작업이나 의견 교환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다들 표정 만큼은 무척이나 밝아보였습니다.
도타 2의 업데이트는 매주 한 번씩, 정해진 요일에 실시합니다. 게임의 볼륨을 생각하면 사실상 업무량이 엄청날 것 같은데요. 에릭 존슨에 의하면 모든 직원들은 '개인의 업무를 스스로 조절하고 결정'한다고 합니다. 직급체계가 없는 만큼 누군가 관리·감독을 하지 않으며, 야근을 비롯한 근무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런 터치가 없습니다.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면서 맡은 작업 및 팀 내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하도록 풀어놓았다는 것인데요. 프로젝트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 마치 오픈월드 게임과 같은 자유도가 현실화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항상 켜져 있는 것인데, 오늘은 내부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다네요
■ QA 팀이 없다? 또 한 번의 '다른 생각'
8층에는 밸브에서 진행 중인 전체 프로젝트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테스트룸이 있습니다. 매일, 혹은 몇 시간 단위로 테스트하는 게임이 바뀌기 때문에 테스트룸에 있는 PC들은 수시로 설정이 달라집니다.
통상적인 개발사와 다른 점이라면, QA 팀이 따로 없다는 겁니다. 밸브에서는 전 직원이 소속된 팀에 관계없이 모든 프로젝트의 중간 테스트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의견을 가감없이 내놓을 수 있습니다.
에릭 존슨은 "테스트를 진행하며 라이브로 나오는 요구사항이나 개선안은 고스란히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팀에서 맡는다"고 말합니다. 이쯤되면 하나의 프로젝트 팀이 어느 정도의 일을 처리하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현재 밸브에서는 '도타 2'와 '카운터스트라이크 온라인 2'를 포함, 총 5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3개는 비공개 상태로, 탐방에서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층이 이 프로젝트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최초 외부 공개, 밸브표 자체 스튜디오
탐방의 마지막인 9층에 오르기 앞서 에릭 존슨은 "언론매체는 물론이고 외부에는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초'라는 말에 약간의 설렘이 앞서고 카메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직업본능인 듯합니다.
가장 먼저 돌아본 곳은 모션 캡처 스튜디오. 게임 속 캐릭터의 움직임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표본이 될 모션을 촬영하는 장소입니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다른 회사가 쓰고 있던 층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션 캡처 작업은 LA 쪽에서 대행해왔다고 하네요.
사내에서 진행 중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Free to Play'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는 현재 밸브에서 자체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아직은 포스터 이미지 몇 장 정도만 공개됐으며,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단계랍니다.
이밖에도 음향 녹음실과 영상 믹싱룸 등 전체적으로 9층은 영상과 음향 등 멀티미디어적인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많은 방문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곳이랍니다
■ '자유로움'의 대표주자, 수많은 새로움을 배워가다
작년 7월, 밸브의 신입사원 안내서가 한글로 번역·공개되어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독특한 조직구조, 독특한 업무방식, 독특한 이념 등 밸브가 내세운 많은 것들이 참신하다는 느낌을 던져줬었죠.
▶ [관련기사] 최고의 게임 기업 핵심은?, 밸브의 '신입사원 메뉴얼' 한글 번역판 공개
그들이 제시했던 '과감할 정도로 독창적인' 기업문화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가다듬어진 모습으로 밸브를 숨쉬게 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밸브만의 '자유로움'이 살아있는 작품들이 이제 차례차례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올 가을 국내 서비스를 앞둔 '도타 2'를 비롯해 현재 진행 중이라는 나머지 4개의 프로젝트도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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