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방심할 수 없는, 누구도 낙담할 수 없는.

프로게이머라면 대부분 최선을 다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라면, 그 최선은 최고가 되곤 하지요. 조지명식을 치른 뒤 펼쳐지는 16강이 그렇습니다. 기분 나쁜 도발을 들어도, 껄끄러운 상대를 만나도 그 상대를 이길 동기부여가 서로 이루어진다면 재미있는 스토리와 흥미로운 명승부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2013 WCS 시즌1 망고식스 GSL, WCS의 이름으로 첫 출발한 시즌이기에 선수들의 투지와 도발은 더욱 빛났습니다. 모두가 새 마음으로 출발하는 만큼 어느 때보다 진출자의 향방을 예상할 수 없는데요. 한 조에서 함께하게 된 선수들의 사연을 짚어봄과 동시에, 이 대결이 어느 점에서 흥미로울지를 조목조목 살펴봤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펼쳐질 대결, 지금부터 미리 보기를 시작하세요.


※ 조별 이미지 자료는 유저 '페타디'님의 대진소개에서 따왔습니다.



A조 - 신노열 vs 신재욱 / 최병현 vs 김민철





"어서와, 16강은 처음이지?" 신노열
vs "오묘한 프저전의 세계는 처음이지?" 신재욱

전 시즌 우승자 신노열, 우승 직후 WCS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포인트 측면에서는 좀 아쉬울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시즌 첫 16강에서 우승까지 이루어낸 것처럼, 상대가 16강 신입이라고 방심할 리는 없을 듯합니다. 신노열은 최근 개인 리그와 팀 리그 모두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하고 있죠.

이번 16강의 첫 피지명자가 된 것은 바로 신재욱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16강 신입생의 숙명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실력으로 돌파해야 하는 큰 관문을 만났습니다. 16강에서 피지명자의 승률은 무려 55.7%, 오히려 지명자보다 높지요.

32강에서 박수호와의 불리한 싸움 끝에 오묘하게 경기를 끌고 가 결국 뒷심으로 승리를 거둔 신재욱은, 프로리그에서도 끈질기게 후반으로 버티면서 저그를 쓰러뜨린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후반 운영이 신노열에게도 통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안하지만 제가 살고 봐야죠" 최병현
vs "혹시 '벽'이라고 아세요? 요즘 대세인데" 김민철

조지명식을 통해 '상남자'로 떠오른 최병현이 묵직한 한 방을 날렸습니다. 웅진 스타즈 선수 둘을 한 조에 몰아넣은 것이죠. 저그를 원하던 최병현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저그가 김민철뿐이었으니 탓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명을 당한 김민철의 입장에서는 곧장 진지한 궁서체로 맞대응할 수밖에 없는 일!

그렇다고 해서 이 지명이 최선의 선택이었느냐, 이것은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최병현은 군단의 심장 첫 대회였던 IEM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 이번 대회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민철 역시 최근에 보여준 테란전이 놀라운 수준입니다. '철벽'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내용을 보여주는 김민철은, 벽 안으로 어떤 거대한 것이라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자신감으로 차 있지요.

과연 최병현이 '진격의 요다'가 될 수 있을지. 기대되는 빅 매치 중 하나입니다.



■ '팀킬'에 분노한 웅진 스타즈, 그리고 두 명의 우승 후보

조지명식 과정에서는 왠지 모르게 소외당한 신노열, 하지만 그 역시 2연속 우승을 따내기에 부족함이 없을 내용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서로 칼을 세우고 있는 나머지 셋을 멀찌감치 따올리고 조 1위로 진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강력한 평가를 받는 최병현과, 현재 협회 최강의 팀 웅진 스타즈 두 명까지 치열한 난전을 펼칠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셋이 안정적인 방어력이나 끈기로 후반 운영에 강점을 보인다면, 최병현은 초반부터 몰아치는 맹공이 아주 날카롭습니다. 최지성과 더불어 가장 공격적인 테란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방패 셋과 창 하나의 맞대결.

예술적인 방어를 보느냐, 예술적인 찌르기를 보느냐의 갈림길이 A조에서 펼쳐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B조 - 원이삭 vs 이승현 / 이신형 vs 이영호





"승현아, 굴욕 세리머니 당해도 울면 안 돼" 원이삭
vs "형, 재미없게 너무 빨리 GG치면 안 돼" 이승현

최근 가장 '사이 나쁜 친구들'이 만났습니다. 지난 12월부터 쉴 새 없이 만난 끝에 블리자드 컵 결승에서는 이승현이 승리했고, 지난 시즌 16강에서는 원이삭이 결국 이승현을 떨어뜨렸지요. 이번 32강에서는 같은 조에 속했지만 대결은 하지 못한 채 16강에 동반 진출했습니다. 계속되는 악연 끝에 다시 원이삭이 이승현을 도발했고, 서로 물러서지 않는 패기를 보이면서 맞대응한 두 사람.

따로 선수 소개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최강의 프로토스와 최강의 저그입니다. 밸런스 또한 미세하게 변수로 작용할 수 있겠는데, 이승현은 이전 인벤 인터뷰를 통해 "후반 가면 프로토스를 못 이긴다"라고 말하면서도 최근 오히려 프로토스를 압살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원이삭 역시 물오른 저그전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불멸자 타이밍 러시밖에 없다는 일부 비판은 군단의 심장 들어 다양한 전략 발휘로 사그러들고 있지요.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기고 싶을 두 사람, 이번 승리는 누구의 것이 될까요?



"뭔가 뽑아야 할 것 같아서 뽑긴 했는데, 이 조 이상해" 이신형
vs "죽음의 조는... 익숙하니까" 이영호

쉽게 가고 싶다는 계획과는 달리 결국 자기 손으로 지옥 같은 조를 완성해버린 이신형, 하지만 이 선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지요. 또한 쉽사리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환상적인 난전 유도로 곧잘 승부를 가져오곤 하는 것이 지금의 이신형입니다.

이영호, 별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이 선수가 가는 곳은 언제나 죽음의 조가 됩니다. 스스로 피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항상 죽음의 조에 있었고, 거기에서 배워왔다"고 말하는 이영호입니다. 드래곤볼의 사이어인처럼, 이영호는 경기를 치를 때마다 끝도 없이 실력이 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영호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포스를 찾았지요.

'신형병기'와 '최종병기'의 대결. 지난 MLG 윈터 챔피언십에서 두 선수가 4강에서 만나 예술적인 명승부 끝에 이영호가 결승에 진출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신형이 복수해야 할 입장. 현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테테전을 기대해봅니다.



■ 스타크래프트2 사상 최악의 조, 인생이 망쳐질 두 명은 누구?

이승현의 "두 명의 인생을 망치고 싶어요" 발언으로 인해 졸지에 '인생빵' 승부가 되어버린 죽음의 조. 현재 판을 움직이는 최고의 선수 넷이지요. 섣부른 전망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우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진출 후보는 이승현입니다. 저그가 없는 조에서 탈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의 이영호 역시 기록으로 설명되지 않는 선수고, 이신형도 최근 모든 대회에서 8강 이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장 지난 시즌에서 이승현을 탈락시킨 것은 또 원이삭이고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진정한 죽음의 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지켜볼 것은 이영호가 즐겨 쓰는 빌드, 최근 테란의 저그전 화두인 트리플 최적화입니다. 이것은 최근 관심사 '신 리쌍록'과 연결되는데요. 이승현은 이영호와 최근 만난 MLG 결승과 실내무도 선발전 4강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이번에 있었던 선발전에서는 이영호의 완성된 트리플 빌드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그 체제가 갖춰지기 전 타이밍 러시를 통해 두 세트를 따내며 승리했지요. 이번에 둘이 다시 만난다면, 빌드 싸움이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할 만합니다.

원이삭 역시 승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MLG 윈터 챔피언십에서 이영호에게 무력하게 패했던 복수도 해야 하고, 프로리그에서 이신형에게 첫 패를 안았던 복수도 필요합니다. 또한 모두가 기대하는 이승현과 이신형과의 대결이 이루어질지, 그렇다면 어떤 멀티태스킹 싸움이 펼쳐질지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C조 - 윤영서 vs 이영한 / 김유진 vs 최지성





"다들 그렇게 내가 만만했다 이거지?" 윤영서
vs "그 분야에서는 내가 원탑이었거든?" 이영한

윤영서는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지명권을 쓰려고 하자, 많은 이들이 손을 들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외쳤거든요. 그중 김유진에게는 "윤영서 선수 빼고는 다 잘 하시는 테란들"이라는 말까지 듣고 말이죠. 현재 16강 테란 중 GSL 최고 커리어를 자랑하는 윤영서로서는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이영한 역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할 선수입니다. 처음으로 올라온 GSL 16강, 하지만 선수들이 생각하는 'easy맨' 리스트 첫 머리에 꼽히고 있기도 합니다. 32강에서도 압도적으로 통과했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지요. 결국 실리를 택한다는 윤영서의 말과 함께 지명되었지만, 한편으로 이영한 스스로 자원해서 이 조에 속했기도 합니다.

자신의 클래스를 다시 증명해야 할 한 명, 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알려야 하는 또 한 명이 만납니다. 객관적인 예상은 윤영서에게 쏠리는 것이 사실. 이영한이 태자를 상대로 강력한 폭풍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저는 뭘 할지 모르는 사람이예요" 김유진
vs "제가 정해드리죠. 방어만 하게 해드릴게요" 최지성

한때 '오하나 원주민'으로 불리던 김유진, 이제는 맵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에는 특정히 하나를 내세우기 힘들었다면, 이제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만능 유틸리티를 보여주고 있지요. 후반 운영과 교전 능력, 그리고 초반 전략까지 능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김유진의 최근 초반 판짜기를 보고 있자면 과연 다전제 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맞을지 의심될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폭격기' 최지성, 현존하는 테란 가운데서도 손꼽힐 정도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의료선 동시 타격은 자유의 날개에서도 숱하게 보였고, 건설로봇을 동반한 러시도 일상적으로 즐겨 하지요. 심지어 세리머니까지 공격적입니다. 잠시 멈칫하면 그 자리로 폭격입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늘 날이 바싹 서 있어야 합니다.

관전 포인트는 '공격 주도권이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아닐까요. 군단의 심장 프로토스와 테란의 대결은 특히 시작부터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두 종족의 초반 찌르기 수단이 다양해진 지금, 두 선수는 어떤 방식으로 예리한 날을 세울지 기대됩니다.



■ 도발과 심리전 끝에, 세 자루 창을 맞이한 태자

김유진은 프프전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윤영서, 원 플러스 원 상품으로 김유진을 선택한 이영한, 윤영서가 테란 중 가장 쉽다는 김유진 등 C조 구성원들은 독특하고도 매서운 도발로 한 자리에 묶였습니다.

윤영서가 후반 물량과 생산에 강점을 보이면서도 초반에 결코 약하지 않다지만, 나머지 세 선수들은 그야말로 야생의 공격성을 가졌습니다. 처음부터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할 듯합니다. 언제 무언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단 몇 초의 승부로 진출과 탈락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변수는 윤영서의 손목 상태가 어느 정도냐가 될 듯합니다.

게임의 재미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흥미로울 수도 있는 C조입니다.



D조 - 강동현 vs 어윤수 / 황강호 vs 고병재





"이 구역의 땅굴왕은 나야!" 강동현
vs "이 구역의 버스 기사는 나야!" 어윤수

GSL에는 준우승자 징크스가 있지요. 전 시즌 준우승자는 32강 탈락 확률이 높다는 것. 하지만 강동현은 보기 좋게 뚫어냈습니다. 땅굴망을 뚫으면서 말이죠. 방태수의 땅굴 러시를 칭찬한 채정원 해설에게 섭섭함을 표현한 강동현, 그만큼 땅굴망 전략에 대한 자신만의 전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 땅굴망을 사용한 경기에서, 강동현만큼 높은 승률을 보유한 선수는 없습니다.

조지명식이 처음이라는 어윤수, 이영한과 함께 'easy맨' 리스트에 거론되는 불명예를 안았는데요. "저를 뽑으시면 버스 운전해드릴게요" 라고 패기를 뽐내기도 했지만 앞에 놓인 산은 험난합니다. 하지만 어윤수는 스타리그 4강까지 진출한 경험을 가진, 개인 리그에서 이미 보여준 것이 있는 선수입니다. 더군다나 승부는 저저전, 협회 저그들의 저력이라면 변수는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이변이 속출하는 저그 대 저그, 이들의 승부는 예상대로일까요, 아니면 이변일까요?



"아놔, 또 너냐?" 황강호
vs "흐흐, 또 너냐?" 고병재

지난 시즌 16강, 이 둘의 혈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만남에도 주목하고 있을 것입니다. 1시간 28분 동안 눈물 나도록 처절한 싸움을 벌인 끝에 일벌레 한 기가 없어서 패배한 황강호가 다시 한번 고병재를 만나게 됐네요. 껄끄러운 상대지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일벌레를 아껴두겠어!" 하고 벼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지난 시즌 혈전의 날, 황강호의 표정 변화는 마치 인간극장을 방불케 했다.


이형섭 감독의 활약으로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조를 찾아간 고병재, 저그가 셋입니다. 군단의 심장 들어 고병재의 저그전이 더욱 물 올랐다는 평가가 많지요. 드림핵에서 귀국한 후 대진표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만족하는 조를 만든 뒤 고전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첫 상대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황강호. 이 둘은 다시 한번 사활을 건 승부를 치르게 될까요?



■ 악연으로 똘똘 뭉친 외길인생 4인

황강호는 지난 코드A 3라운드에서 어윤수에게 완승을 거둔 바 있고, 강동현 역시 황강호에게 승격강등전에서 진 빚이 있습니다. 각종 관계로 얽혀 있는 네 사람인데요. 세 저그 선수의 물고 물리는 접전도 D조를 살펴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로 추천합니다.

한편 개성과 뚝심이 있는 선수들이기도 합니다. 강동현의 땅굴은 말할 것도 없고, 황강호 역시 자신의 운영 방식을 더 발전시켜서 승부를 거는 스타일입니다. '사나이'들이 모여 있는 D조, 여기에서 '고병갓'과 다른 세 저그가 어떤 리듬으로 어우러질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