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코리아 김창섭 기획자

게임 속 모든 콘텐츠를 섭렵하고, "아 게임에 할 게 없네"를 외치는 일명 '토끼공듀'는 이미 하드코어 게이머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어마어마한 콘텐츠 소비 속도를 자랑하는 이들이 마을에서 더 이상 즐길 거리가 없다고 외치는 데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넥슨의 장수 온라인게임 '메이플스토리'도 예외는 아니다. 한 게임이 15년 이상 서비스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콘텐츠를 섭렵한 유저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법. 이러한 '토끼공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넥슨코리아의 김창섭 기획자는 NDC 2018 강단에 올라 '오래도록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해 온 노력들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창섭 기획자는 특히 MMORPG 장르에서 반복 경험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반복 경험이 MMORPG에서 필요한 가장 큰 이유가 플레이타임 연장에 있다고 전한 그는 서비스 방식과 유저 성향, 그리고 개발 일정이라는 세 요소를 들어 설명했다.

먼저 서비스 방식의 측면에서, MMORPG는 정해진 플레이타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엔딩이 정해져 있다면 40~50시간 분량의 재미를 보장하면 되지만, MMORPG는 한 유저가 10년 이상도 플레이할 수 있는 장르다. 실제로 메이플스토리만 봐도 15년 넘게 서비스되고 있는 중이다.

유저 성향에서도 여타 장르의 게임과 비교해 각각 유저들 사이의 기대치나 인내심, 실력 등이 큰 차이를 보인다. 누군가는 게임을 24시간 내내 플레이할 수도 있는 반면, 누군가는 30분만 할 수도 있는 것이 MMORPG라는 의미. 이토록 유저가 MMORPG에 기대하는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긴 플레이타임이 필요한 이유라는 것이 김창섭 기획자의 설명이다.

물론 게임이 언제나 새로운 놀 거리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콘텐츠의 업데이트 속도와 유저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속도는 크게 차이 나며, 업데이트한 모든 콘텐츠가 유저들의 마음에 들어 플레이타임을 연장시키리라는 보장도 있지 않다. 김창섭 기획자는 이러한 맥락에서도 게임에 양질의 새로운 놀 거리를 추가하기 위해 긴 플레이타임을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김창섭 기획자는 강연의 제목대로 메이플스토리를 '오래 해도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례를 설명해 나갔다. 이날 그가 소개한 방법은 크게 '오래 할 거리 만들기'와 '지루함 줄이기', 그리고 '다른 할 거리 제안하기'로 나눌 수 있다.

오랜 기간 서비스를 계속해오는 MMORPG라면 어떤 게임이든 겪는 문제를 메이플스토리 또한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 육성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더 많은 플레이 시간을 요구하며, 그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피드백(보상, 레벨업 등)은 낮아지게 되는 점이다.

1레벨에서 250레벨까지 키우는 것은 힘들고 그 과정이 점차 느려진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성장시킬 수 있는 140레벨까지 한 캐릭터를 키우고, 다른 캐릭터를 140까지 키울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김창섭 기획자는 이러한 고민을 통해 캐릭터 육성 프레임을 계정 육성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메이플 유니온'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메이플 유니온'이란 플레이어의 계정 내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치를 하나의 지표로 보여주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캐릭터 레벨의 총합을 유니온 레벨로 표시하며, 20개의 등급으로 나눠 계정을 육성하는 중간마다 일정한 보상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메이플 유니온은 캐릭터의 집합체라는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유니온에 속한 캐릭터를 등급과 직업 별로 다른 블럭 모양으로 만들어 공격대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나 유니온 코인 재화를 습득할 수 있는 레이드 등의 콘텐츠가 바로 그 사례다. 김창섭 기획자는 플레이어들이 키운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해 레이드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높일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식으로 성장 목표를 제시한다고 해서 유저들이 굳이 캐릭터를 많이 키워야 할 이유가 충분히 확보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메이플 유니온과는 별개로 코인샵 물품 구매 등을 통해 다른 캐릭터를 많이 육성하면 그 다음 캐릭터를 쉽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 고리를 기획하는 것 또한 필요했다. 또한, 하드코어 유저의 성장 동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랭킹 시스템과 보상 등도 기획했다.

김창섭 기획자는 이러한 메이플 유니온 시스템 업데이트 이후, 140레벨 이상의 캐릭터 비율이 상당히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하드코어 유저들의 호응 또한 상당했는데, 2017년~2018년 사이 유니온 레벨 구간별 증가율을 확인해 보면 4,000레벨을 초과하는 플레이어가 300% 이상 증가했다.


다음으로 김창섭 기획자는 게임이 서비스가 계속되면서 단순하게 발전하는 반복 경험에 변화를 주기 위해 메이플스토리가 시도한 노력을 설명했다.

게임의 서비스가 계속되다 보면, 처음과는 다른 모습을 띈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메이플스토리도 과거에는 여럿이 모여 버섯 하나를 사냥하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필드내 모든 몬스터를 한 방에 처치하는 일명 '한방컷'의 시대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토록 게임의 반복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은 낮으면서 효율은 높은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데, 이를 다시 말하면 점점 게임이 예측 가능하고 지루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김창섭 기획자는 이렇게 단순하게 발전하는 반복 경험에 효율을 높이는 변수를 추가하기 위한 요소로 '다이나믹 필드'를 적용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다이나믹 필드'는 기존 사냥에 다양한 변수를 추가하되, 기존 보상 획득치보다 더 높아지는 상황을 추가하는 것으로 기획했다. 룬 시스템이나 콤보킬/멀티킬, 버닝필드 등의 추가는 기존 사냥에 일정 주기마다 보상의 획득량이 조금 더 높아지는 상황을 추가한 것으로 보면 된다.

돌발 미션이나 엘리트 미션 등은 지루할 수 있는 사냥에 변수를 주는 것으로 사냥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위해 추가되었다. 사냥 스트레스를 조금 더 높이는 반면, 보다 높은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도전과 즐길거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반복 경험에서 오는 지루함을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 김창섭 기획자의 설명이다. 그밖에 폴로와 프리토, 불꽃 늑대 등의 포털 시스템은 공간 변화를 통해 반복 경험에 시청각적 환기를 제공하는 용도로 기획되었다.


이어 김창섭 기획자는 기존의 반복 경험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게임 내에 추가한 '콘텐츠형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방법으로 상시 반복 경험을 보완하는 데는 어느정도 한계가 존재했다. '콘텐츠형 이벤트'는 새로운 룰을 기본으로 한 반복 경험을 통해, 제한된 시간동안 기존의 성장 목표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기획된 요소다.

처음 메이플스토리에 소개된 '콘텐츠형 이벤트' 사례는 2015년 진행했던 '설귀도 탐험열차'가 그 시작이다. 당시 유행했던 서바이벌 소재를 차용해 오랜 시간동안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이벤트성 콘텐츠로 제작되었으며, 반복 경험을 자극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장비를 획득하고 강화하는 데 일정 시간이 소요되도록 기획했다.

김창섭 기획자는 이러한 콘텐츠형 이벤트를 기획할 때 기존 반복 경험을 통한 보상과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전했다. 기존 반복 경험인 사냥보다 월등히 좋은 보상을 제공한다면 유저들이 기존 사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 이벤트의 보상을 비교적 보수적인 방법으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메이플스토리의 콘텐츠형 이벤트는 '니할사막의 무역왕'이나 가장 최근 진행된 '몬스터 택시운전사' 등 꾸준히 기획되고 있다. 김창섭 기획자는 그 결과로 플레이어의 약 23%가 콘텐츠형 이벤트에 참여했으며, 약 30분에서 한 시간가량의 플레이타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라이브 이벤트 치고는 준수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고. 또한 유저들이 직접 해당 이벤트들의 공략을 공유하며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창섭 기획자는 '왜 게임이 오래 해도 재밌어야 하는지' 물음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전한 뒤 그 답을 영화 '트루먼 쇼'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설명했다.

영화 '트루먼 쇼'는 30년간 거대 세트장에 감금된 채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트루먼이 세트장을 탈출하는 이야기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자칫 게임이 유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오래 해도 재밌어야 한다는 의미냐고 생각할 수 있게지만, 김창섭 기획자의 의견은 그와 달랐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트루먼이 아니라, 30년간 트루먼 쇼를 시청하고 있던 시청자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30년 동안 한 TV 쇼를 시청해 온 사람들에게 있어 '트루먼 쇼'는 인생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메이플스토리를 즐겨왔다면 이미 성인이 되어 인생의 일부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창섭 기획자는 "'오래 해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이유는 유저가 탈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저가)언제 돌아오더라도 놀고 싶은 만큼 놀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