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C 2016의 마지막 날. 여전히 바람은 선선히 불었고, 푸드트럭의 줄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볼거리도 꽤 즐겼고, 레트로 장터에서 구하고 싶던 옛 게임까지 구해 기분이 좋았건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남아 있었다. 게임! 그래 게임을 다 해보지 못했다.

물론 80여 종에 이르는 게임을 전부 해본다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부스마다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모인 참관객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 그 줄을 뚫고 들어가 게임을 한다는 건 문화시민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자니 시간이 모자란 상황.

결국, 노선을 바꾸었다. '몇 작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감상을 적어 봐야겠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 또 다른 벽이 눈앞에 나타난다. BIC 2016에 출품한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게임들이기에, 어떤 게임이 더 낫고 또 어떤 게임이 더 별로라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스테이크와 갈비찜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눈물을 머금고 몇몇 작품만 플레이해본 후, BIC의 출품작들이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게이머 분에게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부터 말할 게임들이 선정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 때문에 모든 작품을 소개하기가 어려울 뿐. 이 정도 작품이 80여 종이나 나왔구나 하는 것을 모든 분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슈퍼미트보이' 못지않은 피학적 플랫포머 - SRBR


처음 이 게임이 진열된 부스에 갔을 때,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던 이는 아직 학교도 안 다닐 만큼 어린 아이였다. 나름 그림이 나왔다. 화사한 배경과 섬세하게 찍힌 도트 그래픽. 그리고 머리에 분홍색 두건을 두른 곰돌이가 뛰어다니는 플랫포머 게임이라. 누가 봐도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가 조종하던 곰돌이는 점프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고급 세단의 엔진 못지않은 RPM을 뽐내며 회전하는 톱날에 떨어져 버렸고, 말 그대로 곰 고기가 되어 버렸다. 솔직히 흘겨 보았을 때는 전혀 잔혹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었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창백한 얼굴로 아이의 손목을 끌고 자리를 뜨는 부모님 덕에 게임을 해볼 수 있었다. 뒤에서 '한판만 더 할래!'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 게임. 생각보다 진국이다.

▲ 처음엔 그냥 아동용 게임인줄 알았다

'슈퍼미트보이' 이후로 하드코어 플랫포머는 끊이지 않고 등장해왔다. 근데 이 게임. SRBR(Super Rude Bear Ressurection)은 한술 더 뜬다. 애초에 장르명부터가 'Masocore 플랫포머'다. 피학증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게임을 더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거란 뜻이리라.

물론 난이도가 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다. '오리앤더블라인드포레스트' 못지않은 즉각적인 조작성은 게임의 묘를 살린다. 원래 게임을 할 때 가장 화나는 순간이 제대로 눌렀는데 조작이 인식이 안 돼서 죽을 때다. "아 눌렀다고!!" 하면서 의자를 휘두르는 오락실 형아들이 화를 내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게다가 실시간으로 흔들리고, 또 기울어지는 화면의 전환이 게임 자체의 긴박감을 끌어올린다. 안 그래도 심장 쫄리게 어려운 게임이 그냥 보는 이들마저도 쫄깃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했던가? 여기 등장하는 짐승에 가까운 이 생물은 죽어서 시체를 남긴다. 이 시체를 어디에 쓰느냐고? 쌓고 쌓아 발판으로 만들 수도 있고, 날아드는 미사일을 막아줄 고기 방패(...)로 삼을 수도 있다.

가슴 떨리게 어려운 게임 한번 해보고 싶은 분. 남들과의 싸움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싶은 분이라면 곧 스팀에 등장할 SRBR을 기다려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단순, 명쾌, 통쾌함 속 예술 - Split Bullet


SPLIT BULLET은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수한 다각형, 그러니까 적들을 쪼개버리는 게임입니다. 당신의 육감과 무기들을 이용해서, 저들이 당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인디고블루가 개발한 '스플릿 불릿'의 소개 전문이다. 진짜로 저렇게 쓰여 있다. 하지만 나라고 해도 저거보다 저 게임을 더 잘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짜 저 문구가 '스플릿 불릿'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플레이어는 화면 중앙에 있는 정사각형이 된다. 그리고 화면 주변에서, 각종 형태의 다각형 덩어리들이 플레이어를 향해 꼬물꼬물 다가오고, 플레이어는 신 나게 총알을 휘갈겨 그 다각형들을 깨부수면 된다.

굳이 서너번씩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단순함 그 자체. 하지만 게임 자체는 생각보다 속이 깊다. 기본적인 총알, 그리고 튕기는 총알과 탄막을 쏟아내는 기관총, 그리고 레이저의 이펙트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저 단색의 화면 속에서 만들어지는 선과 점일 뿐이다. 그럼에도 '스플릿 불릿'은 플레이하는 내내 플레이어에게 짜릿함을 안겨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알과 그 총알에 산산이 조각나는 다각형 파편들이 화면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꾸미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게임은 아니다. 처음에야 느긋하게 다가오는 사각형들을 보며 편하게 게임을 하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오는 적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우스와 무기를 고르는 숫자키 넷만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면서도 난이도까지 잡아냈다.

내 드래그와 클릭을 따라 산산조각이 나는 오브젝트, 나아가 화면 자체를 부수는 듯한 강렬한 선과 점의 미학. '스플릿 불릿'은 예술을 담고 있다. 간단한 색과 선만으로 예술을 표현하던 '차가운 추상'의 거장 몬드리안과 같은 느낌의 예술 말이다.




분노의 철권 맛 쬐끔만 보거라! - 반격유희

▲ '반격유희' 공식 트레일러

누가 뭐래도 BIC 현장에서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부스였다. 싸이버틱하게, 혹은 심플하게 부스를 구성하는 것이 대세였던 BIC에 난데없이 차이나타운 느낌 물씬 나는 부스라니. 지금이라도 왕서방이 비단을 사라고 줄달음을 칠 것만 같다.

근데 그게 또 어색하지 않다. '스파르탄X'에서나 느꼈을법한 싸이버 홍콩의 쌈마이함. 히로인이 납치된 상황에서도 결코 뛰는 일 없이 양반의 체통을 지키며 저벅저벅 걸어가는 주인공과 선빵을 쳐놓고도 맨날 지는 적들까지. '반격유희'는 브루스리 시절의 감성에 B급 조미료를 팍팍 친 그 시절의 맛을 낸다. 마치 녹색 얼룩 그릇에 담긴 짜장면에 단무지 세 쪽, 그리고 고춧가루 한 줌을 뿌린 맛이라 해야 할까?

이쪽 또한 게임 플레이 방법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게임이 게이머에게 요구하는 소양은 오직 단 하나. '순발력' 뿐이다. 적이 뻗을 주먹의 궤도를 읽고, 거기에 맞춰 버튼을 눌러주면 만사 OK. 적의 주먹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이어진 분노의 철권이 급소에 꽂힌다. 그 찰진 손맛이야말로 이 게임의 정수. 웬만한 액션 게임에서도 이렇게 찰지게 패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해 '반격유희'가 게임으로서의 복잡함이나, 대단한 디자인을 보여주는 게임은 아니다. 하지만 '반격유희'의 매력은 게임의 중심을 잡아주는 '설정'에 대한 충실함이다. 악당이 히로인을 잡아가는데 굳이 구구절절한 이유를 대지도 않으며, 적들도 구태의연한 대사를 내뱉지 않는다. 전진, 격투, 전진. 주인공의 행동은 이 패턴이 전부인데다, 뚜샤! 와다! 하는 기합 외에는 대사조차 없다.

클래식 필름 느낌의 화면 구성도 일품. 묘하게 지직이는 느낌의 비주얼은 '반격유희'의 매력에 체리 한 알을 딱 얹었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시대라 했다. 복잡함을 거두고 감성 그 하나에 집중한 '반격유희'. 추석날 고향 내려가는 길에,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촌 형 때문에 고통 받을 때 딱 좋다.




80년대 감성 고전인디게임 - 타로티카 부 두


부산 BIC에는 수백 개의 인디게임이 초청되어 전시되었다. 인디게임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거시적 시점으로 해석해본다면 퍼블리셔와 어느 후원 없이 개발자 개인의 능력으로 만든 게임을 인디게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인 또는 소수의 작업으로 화려한 그래픽과 방대한 스토리 모드는 기대할 순 없지만 인디게임이 가지고 있는 소소한 재미와 각 게임마다 숨겨진 특징적 요소를 즐겨볼 수 있을 것이다.

축제에 초청된 작품들은 각자의 개성을 내세우며 화려한 그래픽 대신 스태프들의 화려한 언변으로 참가자들을 유혹했다. 필자 또한 사람들이 몰린 부스에서 서성이며 체험을 즐기던 중 제일 구석 자리에 자리 잡은,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게임 부스에 눈길이 갔다. 해당 게임을 처음 봤을 때 ‘이건 뭐지? 어떻게 이런 게임이 BIC에 초정됐을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매력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초청작으로 선정됐을까? 다 같이 '타로티카 부 두(Tarotica Voo Doo)'를 살펴보도록 하자.

▲ 패드로 즐기는 고전게임 '타로티카 부 두'

'타로티카 부 두'는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기법으로 만들어진 고전 어드벤처 인디 게임이다. 주인공이 비행기 사고로 추락한 집을 탐험하면서 감금된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것이 대략적이 스토리이고 조작법은 원 버튼 형식으로 정말 단순하지만, 게임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플레이를 해보면 여러 퀴즈가 복잡하게 조합되, 어느 순간부터 길 잃고 헤매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테이지 진행을 위해서는 보스를 물리치거나 제공되는 힌트를 바탕으로 방에 숨겨진 퀴즈를 해결해야만 한다.

게임 제목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처음 들었을 때 필자와 처럼 ‘저게 뭐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개발자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이다. 다른 인디게임과 비교하면 확실히 질 적인 측면이 부족한 감이 있지만, 게임 진행에서는 필요 이상의 집중력이 요구됐다.

고전 인디게임은 영향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그래픽적으로도 뛰어난 인디게임이 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필자가 게임을 체험하던 중 어느 어린 참가자가 게임 개발자에게 ‘나도 이런 게임을 지금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라는 말을 들었다. 순간 ‘타로티카 부 두’같은 고전 인디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누구나 쉽게 접근해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고전 인디게임을 단순한 재미로 취급하기보단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개발자의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본보기와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 85년도부터 게임 개발을 시작한 이쿠시 토고(Ikushi T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