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고 있는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 2014)도 어느덧 마지막 날.

저녁까지 수많은 강연으로 일정이 빽빽한 다른 날과 달리 마지막 날의 강연 스케쥴은 다소 널널한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강연을 들으려는 사람들 역시 컨퍼런스 일정을 마무리 짓는 분위기다. 늦게 열리는 일부 강연은 넓은 컨퍼런스 룸이 무색하게 2~30명의 조촐한 청중을 두고 열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

각 게임사들의 뜨거운 전시가 이어졌던 EXPO 행사도 오후 3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많은 이들의 동선이 얽히며 북적댔던 모스콘 센터도 한가로워지는 날이다.

하지만 인기 있는 강연은 여전히 있었다. 이 강연의 제목은 '하스스톤 게임 디자인의 10가지 지혜'. 강연이 시작되기 30분전부터 컨퍼런스 룸을 채우던 청중들은 시작 직전까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안내요원들은 연신 '다른 분들이 앉을 수 있게 안쪽으로 붙어서 앉아주세요'하고 외쳐야 했다.



▲ 마지막날 강연을 맡은 블리자드의 에릭 도드 수석 디자이너



강연대에 선 것은 하스스톤을 개발한 블리자드의 에릭 도드(Eric Dodds) 수석 디자이너. 넓은 컨퍼런스 룸을 가득 채운 청중들을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둘러본 그는, 간결하고 명확한 태도로 하스스톤의 개발 과정에서 세웠던 원칙과 철학을 설명했다.

에릭 도드와 그의 동료 벤 브롭(Ben Brobe)은 하스스톤을 개발하기 전 순수하게 게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기획 기간' 동안은 프로그래머가 한 줄의 코드도 작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종이로 만든 카드나 플래쉬를 이용해 이런 기획을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 테스트해볼 수 있었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 게임을 만들고 수정하고 테스트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굉장히 빠르게 반복할 수 있었다.



▲ 기획 단계에서 이용된 종이 카드(좌)와 플래시 프로토타입(우)



하스스톤이 지향하는 비전을 팀원들이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TCG 게임이 처음 하는 유저들에게 진입 장벽이 있는 부분을 잘 알고 있던 에릭 도드와 그의 동료들은, 완전히 새로운 유저들도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경쟁을 즐기지 않는 유저들도 하스스톤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하스스톤 개발팀이라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누구나 하스스톤에 대한 기획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했다.

하스스톤을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명제로 삼았던 것은 단순성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당연해보였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TCG 게임들에서 볼 수 있는 한 번의 턴 속에 여러 번의 행동들을 두 플레이어가 교차로 진행하는 것은 재검토되었다. 결국 하스스톤은 자신의 턴에는 자신의 행동을 하고 상대방의 턴에는 아무 행동을 할 수 없게 했고, 이는 게임의 스피드를 빠르게 만드려는 목적을 달성케 했다.



▲ 내가 카드를 쓰면 상대가 함정카드를 발동하고, 그걸 내가 카운터치는 식의 플레이는 없다.
자기 턴에는 오직 자신만이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 하스스톤의 기본 명제



다른 게임들에서 일반적인 '자원카드'도 마나로 단순화 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덱을 친구에게 자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여기 이런 멋진 하수인 카드도 있고, 이것 좀 봐. 이 주문 카드를 난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전설 무기도 가지고 있고 말이야. 음... 그리고 이건 그냥 자원 카드들이네...' 자원카드는 별로 멋지지 않았어요."

카드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Exhaust : TCG에서 카드를 옆으로 꺾는 행위)도 없애버렸다. 하수인을 옆으로 꺾어서 하수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은 단순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하스스톤의 하수인은 기본적으로 '공격'만 할 수 있게 되었다.



▲ 꺾어서 특수능력을 쓰는 WoW TCG와 달리 공격 자체로 효과가 발동되는 물의 정령



하지만 무조건 단순성을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하게 만들었을 때 과연 재미가 있느냐 하는 것.

"소환 후유증(하수인을 낸 턴에는 하수인이 공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도 없애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 게임이 재미가 없어졌죠. 다시 되돌린 부분이었습니다."

에릭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들을 쳐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건 아주 작은 아이디언데 정말 괜찮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 넣다보니, 전체적으로 별로였다. 승리 화면이 처음에 아주 많은 정보를 보여주다가 결국은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그리고 퀘스트 수행 단계를 보여주는 것 정도로 정리된 것은 바로 이런 아이디어 쳐내기 과정을 거쳤던 것이라고.

하지만 게임을 너무 단순하게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속에서도 게임의 깊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를 위해 추가된 것이 영웅 능력. 단순히 하수인 간의 전투에 영웅 능력이 추가되면서, 한정된 마나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카드는 단순했지만, 카드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었다. 모든 하수인에게 피해를 주는 '소용돌이' 카드는 그 자체로는 피해를 주는 것일 뿐이지만, 피해를 입을 때마다 카드를 한 장 뽑는 '고통의 수행사제'나 하수인이 피해를 입을 때 공격력이 높아지는 '거품무는 광전사'와 함께 사용했을 때 또 다른 깊이를 가지게 된다.



▲ 이른바 전사들은 "하수인이 피해받는" 상황을 이용한 연계를 자주 사용한다.



전통적인 TCG들이 가지고 있던 규칙들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었다. '비밀'은, 턴 중에 상대방의 행동을 카운터 칠 수 있는 이전 TCG의 그것을 하스스톤에 맞게 변형해 넣은 시스템이었다.

그러면서 현실세계의 카드 게임에서는 할 수 없는 온라인 게임만의 재미도 추구했다. 턴의 제한 시간을 15초로 만드는 카드나 무작위로 상대 카드를 선택하는 등의 장치는 현실의 카드 게임에서 사용하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생각 훔치기는 상대방의 덱에서 2개의 카드를 내 손으로 가져오는 카드입니다. 이건 온라인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실제로 손에 카드를 들고 하는 현실의 카드 게임에서 상대방의 카드를 뺏어온다면 아주 기분이 나빠질테니까요."



▲ 현실이라면 상대가 내 덱을 뒤적여서 2장을 가져오는 셈이다. 난수를 쓸 수 있는 온라인의 메리트



하지만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꿀 필요는 없었다. 카드는 '카드'모양인 게 나았다. 카드를 섞거나 뽑거나 내거나 하는 용어나 행동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용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걸 그냥 쓰면 되는 것이었다. 공격력은 공격력으로, 체력은 체력으로 하면 되지 그 게임만의 특수한 용어를 따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에릭은 강조했다.

이어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가라앉은 사원 이미지가 화면에 나타낫다. 동료들과 가라앉은 사원에 던전 공략을 하러 갔다가 구멍에 떨어진 이야기를 한 에릭은 이것은 게임이 아닌 유저 자신만의 스토리라며, 하스스톤에서도 이런 자신만의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 있도록 고민했다고 말했다.


"밀하우스 마나스톰은 2마나 코스트에 공격력이 4, 체력이 4나 되는 굉장히 좋은 하수인입니다. 동전카드를 내고 첫 번째 턴에 밀하우스 마나스톰을 내면 굉장한 압박이 되죠. 그런데 상대방의 주문 비용을 공짜로 만들어주는 바람에, 상대방이 심리조작을 사용했고, 하필 내 덱에 있는 라그나로스가 필드에 소환되면서 밀하우스 마나스톰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죽었죠. 이런 식의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투기장의 랜덤 요소 또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죠. 리로이 젠킨스가 4장이 나왔다거나 말이예요."



▲ 2턴에 게임을 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강력(?)한 밀하우스



유저들의 감정을 고려한 게임 디자인은 사소해보이지만 중요한 요소였다. 게임을 시작해 상대방을 찾는 화면에서 하스스톤은 항상 '적절한 상대'와 만났다고 알려주는데, 이는 처음에는 '완벽한 상대(Perfect Opponent)'로 되어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게임을 해보면 완벽한 상대를 만났다고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부당하게 패배를 했다고 느끼는 게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 플레이어는 언제나 적절한 상대와 맞서게 된다.



너무 강력한 옵션들도 삭제되었다. 자원을 파괴한다거나 상대방이 카드를 버리게 하는 옵션들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TCG에는 있었지만 하스스톤에서는 삭제되었다. 이런 옵션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

감정을 고려한 것은 게임이 출시된 후 패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사제의 '정신 지배' 너프가 바로 그것.


"사실 정신 지배와 관련해서 통계적으로 혹은 수치적으로 분석해봤을 때는 너무 강력한 카드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정신지배로 카드를 뺐겼을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죠. 밸런스 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기 위해서 패치를 했습니다."



▲ 이른바 핸드파괴덱이라고 불리는 상대 손패 버리기 계통의 카드는 하스스톤에선 배제되었다.



그는 원턴킬(카드를 모았다가 한 턴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전략)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하스스톤은 작은 승리들을 계속 경험하는 게임이라는 것. 한 번의 턴에서 상대방의 전장에 배치된 하수인들과 내가 가진 카드들을 한정된 마나 자원으로 풀어내는 과정은 마치 퍼즐을 푸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며 이는 하스스톤이 가진 핵심적인 재미요소라고.

하지만 원턴킬 전략은, 비록 그런 전략 자체도 하나의 전략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카드를 다 모아야 하는 등의 제약이 있지만, 그 때까지 계속해서 게임을 풀어내려고 했던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도 못하고 패배를 맛보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 알렉스트라자+돌진+은신하수인(또는 무기) 조합은 대표적인 원턴킬 콤보였으나 너프로 사라졌다.



에릭 도드의 하스스톤 게임 디자인의 10가지 지혜 강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테스트를 빠르게 많이 반복할 것. 팀원들 간의 비전을 공유할 것. 단순화할 것. 하지만 깊이를 가질 것. 너무 많은 것을 바꾸지 말 것. 유저들의 감정을 고려할 것 등등. 어떻게 보면 이 내용은 "게임 디자인 방법론"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당연한 걸 하는 게 어렵다. 그리고 '질문시간'이 없었던 이번 강연은 바로 그 당연한 걸 해낸 하스스톤 개발자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