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itisong&logNo=110143624281&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문경새재와 신립장군, 달래강의 탄금대 전투를 살펴보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무기력하고 무능한 전투를 꼽으라면 단연 제일이 문경새재를

지키지 않은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요, 다음이 원균의 칠천량 해전이다.

지금도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신립장군을 살펴본다.

이는 신립장군의 개인을 욕되게 하고자 함이 아니며 오직 역사와

야사의 두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소백산맥으로 위쪽으로부터 소백산 - 월악산 -문경새재 -속리산

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의 진행상황과 조선조정의 대응방법을 먼져 살펴본다.

1592.4.14일:왜군은 15만이 넘는 병력으로 부산진을 공격하여

함락-첨사 정발 전사

4.15일: 동래성을 공격하여 함락-송상현 전사           

이에 조선조정은 급히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삼아 왜군의 진격을 방어케 함

4.24: 순변사 이일 상주에서 패전하여 신립에게 도망쳐옴

                 4.28: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패전 전사                                 

  4.30: 선조와 조정중신들 피난길 오르다.               

  5.3: 한양 점령 하다.(날짜의 확인요-이견 있음)   



탄금대는 달래강 앞의 벌판 이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신립의 작전 입니다.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를 버리고 한참 후퇴하여 강앞에 배수의 진을 치다니

어찌된 일이었을 까요?

 

신립장군의 군사들은 8천여명 이었으며 조선의 최 정예부대 였으니

그들도 신립의 명성과 문경새재를 지키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들 이었다.

종사관인 김여물이 "이일이 패한 것은 새재의 요새를 지키지 아니하고

경솔히 상주까지 나갔기 때문이오니,장군께서는 속히 진군하시어 새재를

지키도록 하시오"

그러나 신립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여물은 다시"새재 높은 곳에서 적을 막아낸다면 우리의 군사가

8천 명이지만 한사람이 능히 백 명을 당해낼 수 있으니 왜병이 아무리

많다 하나 겁낼 일이 아닙니다.속히 문경으로 내려가 새재를 지킵시다."

하지만 신립은 충주 달래강 앞에 배수진을 칩니다.

 

신립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조선군사는 기병이 주력이다.따라서 넓은 들판에서 싸워야 유리하다.  

2.목숨을 걸고 싸우라는 배수진은 한나라의 한신의 예를 들어 주장 한다.

  3.병사들의 사기가 약하다. 도망병이 많았다 함.                        

 

문경새재를 버리고 배수의 진을 친 탄금대 전투는 손금보듯이 뻔한 전개

입니다. 더구나 전날 비가내려 바닥은 질척거려 기동성이 우선시되는

기병의 발목을 잡았다 .

조선의 군사들은 사력을 다 했으나 턱없이 역부족 이었다.

숫자에서도 열세 이고 무기에서도 조총의 위력을 감당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패 였다 아니 전멸 이었다.도순변사 신립도 종사관 김여물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비록 패했지만 비겁하지 않은 무장 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순변사 이일만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 났다.




조령산

이미지출처:한국지형산책,이우평,푸른숲

 

나는새도 쉬어 넘는 조령산

이화령에서 조령으로 이어지는 조령산릉은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 사령관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새재를

둘러보고 천하의 요새라 할정도의 지세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병법을 모르는 어느 누구도 알고 있는 문경새재의 요처를 지키면

승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최고 지휘관이 이를 간과 한다?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경새재 길목만 지켰어도 전쟁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었다.

병력이나 화력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끝가지 막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왜군에게 타격을 입힌다면 그들의

세력도 약해질 수 밖에 없어 전쟁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알 수가

없었다.

문경새재를 버린 도순변사 신립을 이해 할 수 없어 야사가 생겨난듯

하다.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3일 벌어진 부산진 전투를 그렸다.

(육군박물관)

이미지출처:이야기 한국사,이현희,청아출판사

 

♠문경새재와 신립장군에 얽힌 야사 한토막 입니다.

제가 어릴적 선친 으로부터 들은 야사 소개 입니다.

실제 역사하고는 다를 수 있으니 순수한 야사임을 말씀

드립니다.

 

신립장군은 권율장군의 사위이다.(이항복,정충신도 사위임)

전쟁이 나기전 신립은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사냥감이 어찌나

빠른지 쫓다가 그만 길을 잃게 되었고 날도 저물었다.

멀리서 불빛이 비치는 마을을 찾아갔는데 마을이 죽은 듯이 고요

하였다. 사람을 찾다 보니 왠 처자가 혼자 있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어서

사연을 물으니 처자왈'저녁마다 이마을에 귀신이 나타나 매일 한사람 씩

잡아가고 있으며 오늘 마지막으로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것이다.

신립이 저녁에 지키고 있으니 과연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귀신들이

나타났는데 신립이 무찌르니 귀신들이 달아 났다.

마당에서 흔적을 찾으니 패랭이 꽃이 어지러히 떨어져 있었다.

그 연유를 처자에게 물으니 처자는'어릴적에 패랭이 꽃으로 사람을

만들어 장난을 많이 하였는데 그것들에 혼이 붙어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립은 이처자들의 놀이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 이튿날 신립이 떠나려 하자 처자는 여기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 살 수

없으니 지기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 하였다.

하지만 신립은 처가 있고 어제의 기분도 있어 끝내 거절 하였다.

그러자 처자는 가시는 고개를 넘기전 이쪽 뒤를 한번돌아보라고 요청

하였고 신립이 돌아오는 길에 그 집쪽을 돌아 보니 처자는 나무에

올라 있다 우물로 떨어져 자살 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돌아와 자랑삼아 권율장군에게 말하자 칭찬을 들을줄 알았는데

오히려 속이 좁다는 핀잔을 들었다.사내 대장부가 여인 하나를 더

거둬들이는 것이 뭐가 문제라서 죽도록 했냐는 것이었다.

 

신립장군이 문경새재를 지킬것인가로 고민을 하는데 꿈에 그 죽은 처자가

나타나 배수 의 진을 치도록 권유 했다.

신립은 자기가 처자의 생명을 구해준 것만 생각하여 은혜를 갚으려

한다고 여기고 그 여인의 말을 쫓았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문경새재에 얽힌 신립장군의 야사 입니다.

너무나도 비 상식적인 전술을 구사한 신립장군을 이해 하지 못해 생겨난

야사 인 듯 합니다.




오늘퇴근하고 탄금대, 신립 찾아 보고있는데 참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