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공개되어 와우인벤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립니다.
본 인터뷰 내용에는 셰인 디바리가 생각하는 '와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과 처음 와우를
개발할 당시의 상황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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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전 수석 프로듀서인 셰인 다비리 씨와 함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구상,
제작, 초기 반응 그리고 성공적인 MMORPG 제작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셰인 다비리: 네, 워크래프트: 오크 앤드 휴먼(Warcraft: Orcs & Humans) 이었습니다. 당시 오리지널 베타 테스터였죠.
블리자드 소식지: 셰인 씨는 프로듀서 역할의 기반을 다진 사실상 블리자드의 첫 번째 ‘프로듀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셰인 다비리: 네, 그랬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프로듀서로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했었지요.
블리자드 소식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초기 게임 구상 단계에 팀에 합류하셨나요, 아니면 개발 진행 중에 합류하셨나요?
셰인 다비리: 사실 제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2가지 아주 중요한 시점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스타크래프트:브루드 워(Starcraft:Brood War)의 수석 프로듀서였습니다. 브루드 워 작업을 마친 후에, 제가 다음엔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할지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죠. 브루드 워의 현지화 작업을 하던 중에 회사 내부 기밀 프로젝트를 맡는 새로운 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프로젝트가 별 쓸모가 없고, 블리자드의 품질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그 게임에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을 허비했죠. 프로젝트의 주제에 부합하는 디자인 자료도 충분치 않았고, 종일 거기에 매달릴 미술 팀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팀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엔 뭘 하지?’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우리 팀 대부분의 사람이 에버퀘스트(EverQuest)를 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에버퀘스트 베타 테스트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플레이했었죠. 이전에 우리 회사에서 출시한 게임들은 온라인 멀티플레이어적 요소가 많아서 그런 개념에는 익숙했습니다. 모두 에버퀘스트에 정말 반해 있었고,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게임의 확실한 진보 형태였죠. 우린 그런 규모의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우리만의 MMO를 만들자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죠. 처음부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지를 고민했습니다. 많은 논의 끝에 판타지 장르가 일반 게이머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워크래프트로 결정을 했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그 당시 MMO게임들이 유행이었죠.
셰인 다비리: 스타크래프트 MMO를 만들까도 생각했었는데, 공상 과학 MMO로는 대중에게 그리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거라 결론지었죠. 일단 판타지 쪽으로 결정 짓자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회사 비밀 프로젝트팀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모두가 만족하는 결정이었나요? “좋아, MMO 해보는 거야!’ 이런 식이었나요?
셰인 다비리: 10명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중 일부 사람들이 MMO를 플레이하긴 했지만, MMO 장르는 게임에 있어 아직 새로운 패러다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결국 다른 게임들을 눌러 버리고 성공을 시키셨습니다.
셰인 다비리: 그렇죠. 그런데 MMO에 있어 다른 게임을 이겼다거나 눌러 버렸다고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는 게 중요합니다. 저와 공동 창립자 중 한 분인 앨런 애드험(Allen Adham)과 일부 팀원들은 에버퀘스트(EverQuest),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 메리디안 59(Meridian 59) 같은 게임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젬스톤(Gemstone) 같은 텍스트 기반 머드 게임에 한 달에 300달러씩이나 내면서 플레이했죠. 저희는 이런 장르가 대박을 터트릴 거라는 걸 알았고, 회사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 성공을 확신시키는 게 문제였죠.
블리자드 소식지: 어떻게 설득을 시키셨나요?
셰인 다비리: 정말 힘들었습니다. 회사를 설득시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뭔가를 보여줘야만 했었죠. 솔직히 말해서 전체 개발 기간에, 첫 번째 회사 내 알파 테스트를 하기 전까진 보여줄 게 없었죠. 회사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 “우와, 이제 알겠네요. 이거 정말 재미있군요!” 이런 반응들을 하더군요.
우리 회사 게임 개발 부문 경영 부사장이시자 공동 창립자이신 프랭크 피어스(Frank Pearce) 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에 피어스 씨는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대체 제가 왜 이런 게임을 플레이 해야 하는 건가요? 대체 누가 이걸 하려고 15달러를 낸단 말이죠? 어떻게 성공시킬 건가요?” 이렇게 말하는 분이었죠. 회사 내 알파 테스트를 시작한 이후, 피어스 씨는 업무 후에도, 주말 내내 항상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플레이했죠. 그리곤 결국 “이거 진짜 재미있네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때야 우리가 정말 해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일에 헛수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반대 편에 서 있던 사람까지도 하루아침에 우리 편으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정말 아주 대단한 걸 만들어 냈다 싶었죠.
블리자드 소식지: “이거 정말 크게 성공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스쳐 갔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성공을 할 거고, 그 성공이 계속 이어질 거란 걸 깨달았던 때는 언제였나요?
셰인 다비리: 좋은 질문이네요. 우리도 “수백만의 사용자를 모으자.”하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하고 싶어하고, 꾸준히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자. 레벨을 올리고, 전세계에서 모인 친구들과 플레이하고, 우리가 진정 원했던 MMO를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자.”라는 생각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아 계속해서 알파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저희는 “이게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생각했죠. 게임을 만들 때 흔히들 하는 생각이었죠. 개발 마지막 단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관점이 흐려지는 때가 항상 있죠. “이거 별로일 거 같아.”라거나 “이제 더는 재미가 없어.”라는 생각들을 했죠.
알파 테스트에 들어가고 우린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상에, 이 부분도 안 끝났고, 저 부분도 안 끝났고. 여긴 정말 최악이야. 사람들이 정말 싫어할 거야.” 이런 식으로 스스로 나쁜 생각들을 다 떠안고 있었죠. 하지만 곧 사람들에게서 정말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어요.
“이거 재미있네요.”, “이런 게임은 처음이에요.”, “정말 놀라워요.” 이런 반응이었죠. ‘친구들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알파 테스트를 한 이후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이봐, 뭔가 잘못된 게 있을 거라니까.”라며 사람들을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정직하게 자기들이 느낀 걸 말해 준 거란 걸 알게 됐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도 잘못된 점이 있었어요. 게임이 완벽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사람들은 게임을 정말 즐겼죠. 알파 테스트 기간에 생긴 또 다른 일은, 우리의 시간을 집중해야 할 곳이 어느 부분인지 알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게임 요소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내용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린 우리가 잘해냈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준 의견은 우리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이 싫었다고 말해준 부분이 있었기에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알파 테스트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오랫동안 진행됐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가장 큰 성공”은 뭐였나요? 게임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과 셰인 씨에게 가장 많이 칭찬했던 건 뭐였나요?
셰인 다비리: 주로 위험/보상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겐 처음으로 거대한 세계에서 이런 관점으로 디아블로와 비슷한 방식의 게임을 한 때였죠. 게임에 그리핀을 추가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칭찬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이 땅끝에서 저 땅끝으로 날아갈 수 있었거든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어요. 또 사람들이 인상 깊어했던 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세계의 완벽한 자연환경이었죠. 로딩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죠.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이건 정말 기술적으로 대단한 업적이네요!”
솔직히 말해서 경험으로 가능했습니다. 저희 중 아무도 MMO를 만들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3D 게임을 만들어 본 적도 3D환경에서 일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저희 모두에게도 새로운 노력이었죠.
블리자드 소식지: 해내신 것 같네요.
셰인 다비리: 달에 착륙하는 것 같았죠.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을 결국 해냈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그런 식으로 되돌아 봤습니다. 우리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것들을 많이 이야기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해냈다는 사실은 놀라워요.
블리자드 소식지: 팀원들이나 그 문화에서 어떤 요소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게 했나요?
셰인 다비리: 제 대답은 세상모르고 순진했기 때문인듯하네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만들 당시 우리가 좀 순진했던 같아요. 우리가 정말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죠.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순진해질 때가 있죠. 그렇지 않고는 해내지 못할 겁니다. 못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몰라야 하는 거죠.
블리자드 소식지: 순진하여 미리 예측하지 못해서 엄격하게 지켜낸 게 반영된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셰인 다비리: 일관성 있는 지역 특성과 연결된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많은 게임들이 지역을 너무 세분화했었죠. 하지만 저희는 인스턴트 던전만 세분화했습니다. 경매장을 만드는 시도도 정말 단순하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게임에는 공개 거래 채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매장을 만들면 우리 커뮤니티를 망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죠.
사람들을 거래 채널을 이용해 글을 올린 다음에 만났기 때문에 약간은 강제적인 사회성을 경험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면에선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묘한 면도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거래를 하려면 상대방과 동시에 접속해 있어야 하는 등 거래 채널에만 의존해선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이 많았습니다.
경매장을 만들려고 하자 우린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서버에 정확히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매장이 더 나은 게임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을 볼 수 있었고, 여전히 거래 채널을 이용해 직접적인 교류를 원하는 사람들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셰인 씨 고유의 생각이 담긴 부분은 무엇인가요? 셰인 씨께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무엇인가요? “게임 전체”라고 하는 게 셰인 씨에겐 가장 공평하겠지만, 게임 안에 포함시키려고 셰인 씨가 가장 노력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셰인 다비리: 음, 좋은 질문이네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게임에 관해선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은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어 내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 의견을 관철하려는 싸움이 많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저희 모두 우리의 의견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우리가 구성했고, 게임을 만들어낸 우리 팀 자체입니다. 우리 팀원들은 지금까지 제가 같이 일해 본 사람들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장르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결국 해내고 말았죠. 바로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점입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팀에 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도 될까요? 불타는 성전 이후에 현재 다른 팀으로 옮기셨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과 일했던 때의 어떤 점이 그리우신가요?
셰인 다비리: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게임 회사에 사람들이 계속 머무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게임이고, 두 번째는 바로 사람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작업을 하면서 이 두 가지 모두를 정말로 아꼈습니다.
확실히 저에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보다 게임을 그만두는 게 더 쉬웠습니다. 5년의 개발 기간과 그 후 2년의 확장팩 출시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좌절해 있을 때 저를 일으켜 위로해 주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가 된 사람들입니다. 회사 동료가 아닌 진정한 친구가 된 사람들인 거죠.
블리자드 소식지: 그렇다면 사람을 제외하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에서부터 새로운 팀에서 일하기까지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셰인 다비리: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아주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얻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지속적으로 성공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실수가 있었고 그 실수들을 통해서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말은 처음 하는 걸 텐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여정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기복이 있었죠. 잘못된 결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실수는 또 다른 MMO를 만들 때 정말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한 경험이 됩니다. 뭔가 정말 제대로 이루어내기 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지요.
블리자드 소식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에서 일하는 동안, 팀만의 행사라든가 재미있는 일화가 될 만한 일은 없었나요?
셰인 다비리: 제품을 출시 때마다 우린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를 했습니다. 모두 항상 원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정말 재미있었어요. 매달 회사 전체로 생일을 맞은 사람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제가 처음 블리자드에서 일을 시작할 때의 전통을 따랐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생일 축하 노래이지만 블리자드에서는 그 노래를 약간 다르게 불렀습니다.
블리자드 식의 생일 축하 노래는 회사가 작은 규모였을 때 생겨났죠. 다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 각자 자신의 음정, 박자에만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들 끝까지 노래를 불렀지만 이런 식이었습니다. 보통 생일 축하 노래는 “생일 축하합니다.” 이렇게 끝나는데, 저희 노래는 부르는 내내 불협화음에다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였습니다. 팀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죠.
블리자드 소식지: 재미있는 일화로군요. 더 넓은 범위의 질문을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질문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이 정도로까지 성공할 수 있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콜라캔도 있고, 미니어쳐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그저 게임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데요. 어떻게 이 정도로까지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셰인 다비리: 저희가 게이머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회사에는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좋아하는 다양한 집단의 게이머들이 있었죠. 블리자드는 RTS게임으로 유명했지만, 우린 출시된 모든 종류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의 일부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게임은 만들 수 없었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제가 항상 사용하는 비유는 ‘좋은 보상, 강력한 명예 시스템’ 혹은 ‘훌륭한 탐험과 멋진 퀘스트’만을 위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를 만들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놀이동산 같은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놀이동산에 가면 회전목마도 타고 가벼운 게임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 롤러코스터 같이 전율이 느껴지는 놀이기구들을 탑니다. 놀이동산에 오는 사람들에게처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그런 방식으로 흥미를 끌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놀이동산에 퀘스트, 탐험, 전문 기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던전, 명예 시스템, 대규모 공격대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구성하는 데 집중해, 가능한 한 깊이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점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큰 성공 요인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두 번째 성공 요인은 우리가 선택한 미술 스타일입니다. 당시 여러 게임에서 3D기술이 널리 퍼졌었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 최첨단 3D 그래픽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문제점은 그 해에만 최첨단 기술이었다는 거죠. 다음 해엔 컴퓨터의 사양도 초과하는 새로운 기술이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최첨단 기술을 좇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미술 스타일을 창조하기로 했지요. 우리가 추구하는 미술은 더욱 양식화되고 좀 더 2D이면서도 약간 비현실주의적입니다. 우리는 게임 그래픽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들려고 갖은 치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창조한 미술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갔습니다. 만약 현실적인 그래픽의 게임이 출시된다면, 우리 같은 열혈 게이머들은 당연히 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나 여동생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강렬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게임을 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뭔가 살짝 가벼운 듯하면서도 별난 점이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그 성공의 소용돌이때문에 아까 말씀하신 놀이동산 접근 방식을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콘텐츠를 추가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진 않았나요?
셰인 다비리: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플레이어들이 꾸준히 사랑하는 게임을 만들고자 항상 뭔가 더 추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더는 넘고 싶지 않은 선은 있습니다. 지금도 그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출시된 지 5년이 되었고, 게임의 완전성을 유지하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지요. 저희는 우리가 추가하려고 하는 콘텐츠의 종류에 대해 매우 신중을 기합니다. 우리의 핵심 역량 중에 “Gameplay First”라는 내용이 있지요. 추가한 콘텐츠가 우리의 플레이어에게 재미를 선사하지 못하거나 꾸준히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게임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훌륭한 답변이시군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개발 기간에 셰인 씨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은 없었나요?
셰인 다비리: 정말 많았습니다. 게임을 출시할 당시 게임시장 선두 기업이 보유한 플레이어의 수가 45만 명 이었습니다. 저희는 “사용자가 정말 많구나. 정말 성공할 수도 있겠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적어도 그 정도의 플레이어가 우리 게임을 즐기거나 그 수치를 넘지 못할 거면 차라리 목표는 두 배로 잡기로 했습니다. “목표를 크게 잡자!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게임 출시 1년 만에 백만 사용자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게임 출시를 시작한 지 첫 한 달 만에 이미 그 목표치를 넘어섰습니다.
서버 하드웨어 배치 방법을 위해 세웠던 목표는 정말 바보 같았습니다. 저희는 일정 비율로 서버를 이러저러한 비율로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껏 가장 끝내주는 게임 출시가 되겠군!”이렇게 생각하면서 서버를 구입했었죠. 12개월 동안 100개 서버를 배치한다는 계획이었지만, 100개 서버를 한 달 만에 모두 배치해야 했습니다.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죠.
블리자드 소식지: 불타는 성전을 거치면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요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행 과정과 레벨 올리는 방법, 플레이어간 전투 및 투기장에 변화가 있었고, 보석 장착과 문양들이 추가되었고, 최대 레벨도 상향되었습니다. 셰인 씨가 팀에 합류한 첫 번째 날부터 팀을 떠나기 전까지 있었던 가장 큰 철학적인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셰인 다비리: 저는 플레이어간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재미있으면서 플레이어에게 의미 있는 플레이어간 전투를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플레이어간 전투에 구현해 보고 싶은 내용들이 있어도 실현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개발 초기에는 주로 명예 시스템과 전장과 관련된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블리자드인으로써 반복 확인 작업은 핵심이죠. 저희는 단지 출시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능을 개선하고,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는지 반복 확인하고, 플레이어들의 의견을 반영해 더 나은 게임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대격변 작업을 보면 정말 뿌듯합니다. 아제로스의 기존 세계로 돌아감으로써 지난 두 차례의 확장팩에서 얻은 많은 것들을 이용해 아제로스 대륙을 개선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기술은 더욱 진보했고, 개발 주기의 이해도도 훨씬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새로운 콘텐츠 개발 작업은 훨씬 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격변은 게임 전체적으로 큰 진보를 담게 될 겁니다. 아웃랜드와 노스렌드로 이동하면서 모두에게 거의 버려졌던 기존 지역 모두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될 겁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기존 세계의 자취 중 셰인 씨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 게 있나요?
셰인 다비리: 전 아직도 가시덤불 골짜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저희가 만든 첫 번째 정글 지역이었거든요. 가시덤불 골짜기를 디자인하면서 원화 작업을 정말 많이 했고, 풍부한 원화 작품들도 많이 나와서 정말 큰 지역이 완성되었죠.
블리자드 소식지: 플레이어의 입장으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플레이하시면서 겪은 즐거운 순간들은 없으셨나요?
셰인 다비리: 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닉시아를 잡았을 때였고, 두 번째는 화장 심장부에서 라그나로스를 잡았을 때였죠. 많은 사람들에게도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일 테지만, 저에겐 특별히 더 기억에 남습니다.
저희가 직접 개발하고 테스트한 지역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맞아, 저 사람들은 직접 테스트를 했으니깐 다 알고 있을 거야. 완전 식은 죽 먹기일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죠. 얼마나 많이 수정했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에 전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수없이 전멸했었고 결국 토론 광장에서 플레이어들이 올린 공략을 찾아봐야 했습니다!
오닉시아와 라그나로스를 잡은 순간, 공격대에 참여한 모두가 정말 큰 업적을 달성한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하는 것 같았죠. 우리가 만든 게임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의미였습니다. 게임 외적인 거라면, 프라이스 일렉트로닉스(Fry’s Electronics)에서 열린 사인 행사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아무도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며 장소에 도착했는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심지어는 사인을 받으려고 다른 나라에서 온 분들도 계셨습니다. 우린 새벽 5, 6시까지 프라이스 일렉트로닉스에 있었는데, 게임이 다 팔려서 회사 창고에 있는 게임을 더 가져오려고 차를 되돌려 보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찾아온 분들 모두가 사인이든 다른 어떤 것이라도 받고 가시게 하고 싶었습니다. 수고스럽긴 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마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일한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상을 받는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작업을 하실 때의 최고의 순간에 대해서 말해 주시겠어요?
셰인 다비리: 게임에 있어서는 최고의 순간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으로 최고의 순간은 게임 출시 이후 첫 번째 열렸던 블리즈컨이었습니다. 처음 회사를 시작했을 때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출전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워크래프트: 오크 앤드 휴먼(Warcraft: Orcs & Humans )을 처음 선보였죠.
9평방 미터의 부스에 36인치 TV를 설치해서 시네마틱 동영상을 상영했습니다. 블리자드 티셔츠를 입고 부스에 인원을 몇 명 배치해 두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5명, 다음엔 10명, 그다음엔 한 무리가 찾아왔고, 우리는 정말 깜짝 놀라서 이렇게 생각을 했죠.
“오, 이거 진짜 멋진데? 우린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다 부스도 있어!” 첫 번째 블리즈컨 때 애너하임 컨벤션 센터에 만 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처음 회사에서 일을 시작할 때 만에도 10년이나 12년 후에 만 명이나 되는 우리 커뮤니티 사람들과 얘기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입장권이 모두 매진된 걸 보면 2만 명이나 3만 명을 초대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았죠. 저희는 록스타가 되고 싶어서 사업에 이렇게 열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게이머였고, 다음엔 우리가 즐기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커뮤니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우리가 만든 게임에 대한 칭찬을 듣는 건 정말 놀라우면서도 황송한 일이었습니다. 5년간의 개발기간 동안 쏟은 우리의 노력과 땀, 피, 눈물, 좋은 시절과 어려웠던 시절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저의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어떤 것이 유산이 될 거라 생각하시나요?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사람들이 게임 개발 안내 책자를 읽다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페이지를 펼쳤을 때, 어떤 내용을 보게 될까요?
셰인 다비리: 다음 10년 또는 20년 후에 제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진입하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가고 수익도 잘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할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많은 개발사에서 MMO를 만들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 성공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5년 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백만 명의 플레이어를 보유하게 되자, 사람들은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어 낸다면, 놀이동산 방식으로 게임으로 다가간다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탁 트인 환경을 창조해낸다면, 사람들을 웃고 즐기게 할 수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일궈낸 또 다른 훌륭한 점은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전 동부에 살고 있는 어머니와 서부에 살고 있는 아들이 게임에서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항상 듣습니다. 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배우자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희는 데이트 서비스나 전화 시스템을 만든 게 아니라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게임 그 이상의 것이 되었습니다.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퀘스트를 하거나 몬스터를 잡으러 가려고 게임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이 무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게임에 접속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다른 이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의 가장 큰 유산인 것 같습니다.
블리자드 소식지: 말씀 감사합니다, 셰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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